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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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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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대한민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신부). 김해 김씨 안경공파 5세손, 경파 11세손, 수로 61세손으로 알려져 있다. 출생지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세례명안드레아. 이름은 재복(再福)이고 족보에 등재된 이름은 지식(芝植). 후에 중국 마카오에서 대건으로 불리게 된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축일은 7월 5일.

집안 대대로 천주교 집안인데 그의 증조 할아버지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증조 할아버지,큰할아버지,아버지가 순교했다.

1845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년 1개월 만에 순교했으니, 그가 밟아온 사제의 길을 세속적 시점에서 바라보면 매우 안습하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사제로서의 삶뿐만이 아닌, 정신적으로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일말의 기회조차 오지 않았던 것이다.

군함이 상륙하는 데 도움이 될 해안지도를 프랑스인 주교에게 전달하려다 잡혔던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김대건 신부가 전달한 것은 조선전도이고[1] 이미 전달하고 돌아온 도중에 잡힌 것이며 "프랑스 영사가 중국 황제에게 신부들을 죽이는데 대한 잘못을 설득시키고, 또 황제가 조선 왕에게 프랑스인들을 그렇게 쉽게 깔보고 죽이지 말며, 신자들에게 자유를 주도록 명하게끔 황제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대단히 좋을 것이다. 만일 중국 황제가 조선 왕에게 명한다면 조선 왕은 따를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평화로운 방법을 중시하였지 황사영마냥 군사적으로 천주교를 전파하려던 건 전혀 잘못된 내용이다.[2] 실제로 조선에서도 김대건 신부를 간첩이 아닌 천주교 신자로서 처형한 것이 대표적인 증거.[3] 딱히 군사적으로 유용하다고 보기도 힘들었고 저 지도로 인해 프랑스의 침략 계획에 딱히 영향이 가지도 않았다. 빼도 박도 못하고 이적질하다가 처형당한 황사영과는 전혀 케이스가 다르다.

그가 순교하기 이틀 전, 조선 조정이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배교나 추방 중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거부하자 전원 처형했다. 이후 왜 자국민을 죽이냐고 따지러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는데, 당시 조정은 힘에서 밀릴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프랑스와의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라틴어, 중국어를 모두 구사하며 서툴지만 프랑스어도 가능한 엘리트였고 당시 조선 팔도 통틀어 이런 인재는 전무한 수준이었기에[4] 국가적으로도 상당히 쓸모있는 인재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조정 관리들 앞에서 즉석에서 깃털펜을 만들어 가늘고 꼬부랑대는 서양어 필기체를 능숙하게 써 보이자, 조정 관리들이 마술 보듯 신기하게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관리들 대부분은 철펜이나 깃털 펜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으로 그 가늘고 꼬부랑거리는 서양어를 쓰는 능력자들의 집합체인 줄 알았다고.[5]

조정 내 몇몇 대신도 그 능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하여, 천주교만 버리면 살려줄 뿐 아니라 벼슬도 내리고 후한 보상을 하겠다면서 설득해 보았지만 그가 결사코 거부했다. 다만 배교는 거부해도 조정에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요청해 오면 그 일은 협조할 생각이었는데, 천주교 사제 신분으로 조선 정부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좋게 이끌어 내는데 성공만 한다면 천주교 공인까지는 몰라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올라갈 건 확실하니 김대건 신부로서도 해 볼 만한 일이었던 셈.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자신들의 입장이 담긴 종이 쪼가리만 휙 던져주고 사라져버려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조선 정부도 어쩔 수 없었는지 배교를 다시 권했으나 거부하자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져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형장에서 다른 신자들처럼 참수를 당하며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에는 강화도 조약 체결 전까지 흥선 대원군이 다시 한 번 쇄국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 천주교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만큼 업적이 뛰어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건 신부와 동기이자 동시대 사람이며 친구이자 한국의 2번째 신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 입지가 김대건 신부보다 업적은 많을지언정 인지도에서는 미비하다. 한국 천주교에서 김대건 신부를 의 증거자라고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의 증거자라고 부르는데, 최양업 신부가 죽은 김대건 신부의 몫까지 도맡아 하느라 결국 과로로 운명을 달리한 걸 보면 땀의 증거자라는 말이 그냥 붙은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신부 수업을 받으러 중국 마카오까지 가서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고, 김대건과 같이 사제 공부를 하러 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중국에서 같이 사제 공부를 하다가 최방제가 그만 지병인 천식말라리아가 겹쳐 유명을 달리하고 최양업은 사제가 되기에는 나이가 부족하단 이유로 중국에 남겨졌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 전체를 다시 세례명으로 쓸 수 있다. 이 경우 본명인 '대건'과 세례명인 '안드레아'를 모두 합쳐 세례명으로 쓰기 때문에 홍길동이란 사람이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교적홍길동 대건 안드레아라는 식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본명을 갖고 있는 한국 출신 성인의 경우엔 모두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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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된 후 신자들이 수습한[6]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으로 방부처리한 후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 두개골의 측정치를 이용하여 생전 모습을 3번에 걸쳐 복원하였는데, 흔히 알려진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갸름한 서양형 얼굴이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국에 있는 대건중학교, 대건고등학교들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학교이다.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논산시에 있다.) 당연히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 그 외에도 예수회 재단인 서강대학교에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김대건관이 존재한다. 몇몇 미션스쿨에서는 김대건 신부를 수호성인으로 지정하는 경우도 있다.[7]

평화방송에서 김대건 신부의 삶을 조명한 특집극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 그런데 이것도 좀 애매하다. 조선전도는 조선의 전도를 그린 지도인데 이걸 해외에 넘겨주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그 시대로서는 이적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다.
  2. 다만 같은 점이라면 중국의 황제를 통해 시도를 했다는건 같다. 하지만 좀 다르다면 황사영은 그 외의 방법에 더 관심을 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김대건은 이 방법에만 치중한 인상을 준다.
  3. 임금이 말하기를, "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출처는 <헌종실록> 김대건 신부의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로 밀입국'만이 언급되었다.
  4. 왠만한 역관들도 조선말 외에 한두 개 정도고 그나마도 라틴어, 프랑스어는 접해본 이도 없었다.
  5. 당시엔 훌륭한 서예 능력은 곧 인신수양의 결과이자 선비로서의 자질이요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이었으니 그 가늘고 조그만 서양 글자를 붓으로 쓴다고 생각했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6.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시신을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당시 17세의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내는 데 성공(…). 그리고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現 안성시 양성면에 도착하여(…) 무사히 안장시킬 수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오늘날의 미리내 성지이다.
  7. 오천중학교에 김대건의 이름을 딴 성 김대건관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