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총리 | |||||||
69대 | ← | 70대 | → | 71대 | |||
해럴드 윌슨 | ← | 제임스 캘러헌 | → | 마가렛 대처 |
풀네임 | Leonard James Callaghan, Baron Callaghan of Cardiff (카디프 남작, 레오나르드 제임스 캘러헌) |
출신 정당 | 노동당 |
생몰년도 | 1912년 3월 27일 ~ 2005년 3월 26일 |
재임기간 | 1976년 4월 5일 ~ 1979년 5월 4일 |
1 개요
노동당 출신의 정치인. 1976년부터 1979년까지 3년 동안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재무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총리대신을 모두[1] 경험한 먼치킨이었지만 정작 총리로는 경제 문제에 발목을 잡혀 단명하고 만다.[2]
2 생애
2.1 초기
1912년 아일랜드 출신의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의 추억은 무척 가난했다는 것이 전부이다.'라고 본인이 밝힐 만큼 집안 사정은 불우했고, 고등 학교를 졸업하자마자[3] 바로 세관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1931년 노동당에 가입하였으며 2차대전 시기에는 해군으로 참전하여[4][5] 종전 직후였던 1945년 총선에 카디프에서 하원직에 출마한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에게 신승을 거두었고, 캘러헌 역시 하원직에 당선되면서 그의 본격적인 정치 인생이 막을 올린다.
2.2 각료 활동
세관으로의 경험을 가졌던 덕인지, 1947년 캘러헌은 애틀리 총리에 의하여 교통수송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오늘날과 같이 검은 아스팔트 위에 하얀색으로 표시된 횡단보도를 도입한 것이 교통부 장관으로 캘러헌이 남긴 업적. 이후 잠깐 동안 유럽의회에 영국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지만 1951년 애틀리가 실각함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윈스턴 처칠 - 앤서니 이든으로 이어지는 13년 동안의 보수당 집권 시기에 캘러헌은 노동당의 그림자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해럴드 윌슨과 함께 노동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1964년에 다시 노동당이 집권하고 해럴드 윌슨이 총리직에 오름에 따라 캘러헌에게는 재무부 장관이라는 요직이 주어진다. 이 시기 영국 경제는 높은 실업률,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무역 적자 등으로 신음하고 있었고, 캘러헌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한편으로 파운드 화의 평가 절하를 단행한다. 그렇지만 평가 절하로 인하여 통화량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 예산 위기가 발생하자, 캘러헌은 소득세와 유류세를 인상할 것을 지시했고 이러한 조치에 직격탄을 맞은 계층은 바로 노동당의 지지계층이었던 노동자층과 서민층이었다. 이들이 들고 일어난 끝에 결국 정부는 소득세 인상분을 반환할 것을 약속해야만 했다(...)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캘러헌은 윌슨 총리와 협의 하에 적극적인 긴축재정을 실시하는 한편으로, EU에 가입하고자 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긴축재정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대응한데다가, EEC 가입 문제는 샤를 드 골에 의하여 비토당했던 것.[6]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67년에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유가가 폭등해버린다. 결국 캘러헌은 다시 한 번 평가 절하를 단행했고 이는 엄청난 논란을 야기한다.[7] 결국 평가 절하를 단행한 직후 캘러헌은 재무부 장관에서 사임하고 만다.
사임 직후 내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8] 캘러헌은 IRA의 무장테러에 대응하여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 파견을 지시한다. 또한 1968년 영국 내에서 인종에 근거한 취업, 교육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내무부 장관으로 캘러헌이 남긴 업적. 하지만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에게 두 석 차이로 패배함에 따라 캘러헌은 내무부 장관에서도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1974년 다시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캘러헌은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1975년 영국의 EU 가입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2.3 총리 시기
그러던 중 1976년 해럴드 윌슨 총리가 뜬금없이 사임을 선언해 버린다.[9] 그리고 윌슨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에서 마침내 캘러헌이 영국의 70대 총리로 선출된다. 하지만 총리가 된 기쁨은 잠시, 캘러헌에게는 해결해야 할 온갖 난제가 쌓여있었다. 영국병이라고 불리던 고 인플레이션, 고 실업률의 상황은 해결될 기미가 안보였으며 노조들은 기득권화되어서 툭하면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발하는 파업을 일으켜 국가 경제를 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다.[10]
한편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였으며[11] 심지어 웨일스에서도 분리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 결과 다행히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영국의 일원으로 존속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북아일랜드라는 거대한 폭탄이 다시 터지고 만다. 1970년대 후반 IRA의 테러 등으로 인하여 한 해에만 수백명의 영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캘러헌 내각은 북아일랜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들의 신망을 잃게 된다.
그리고 1978년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 캘러헌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내 버린다. 불황으로 인하여 캘러헌 내각이 임금 동결 또는 소규모의 인상을 지시하자 노조 측에서 반발하여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 것. 결국 노동당의 주요 지지자들이 이탈한 결과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마가렛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게 참패를 당하였고 캘러헌은 수상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대처를 뽑았던 노동당 지지층들은 신자유주의로 대차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2.4 여생
마가렛 대처에게 총리직을 넘겨준 이후에도 한동안 캘러헌은 의석은 유지하였지만 두드러지는 정치 활동을 보이지는 않았고, 1987년을 끝으로 작위를 수여받음에 따라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후 2005년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 이 네 자리는 영국 정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로 여겨진다. 아예 이 네 자리를 Great Offices of State라고 부를 정도.
- ↑ 심지어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제문제 그거 다 내 탓임 ㅇㅇ 내가 지난 200년 동안 최악의 총리로 꼽혀도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닐듯?'이라며 셀프디스를 시전하기도(...)
- ↑ 옥스퍼드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됐음에도 집에 돈이 없어서 못 갔다고 한다. 안습.
- ↑ 여담이지만 역대 영국 총리 가운데 해군 사병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캘러헌이 유일하다고 한다.
- ↑ 여담의 여담으로 나중에 소위로 승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훈련을 받다가 결핵에 걸려서 개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 ↑ 드 골은 영국을 미국의 딸랑이 정도로 여기고 있었고(...) 그래서 영국이 EEC에 가입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프랑스가 브렉시트하지 말라고 빌고 있는 판국 - ↑ 특히나 캘러헌이 평가 절하 직전에 '이번엔 진짜로 평가 절하 없어요'라고 언론에다가 말해놓고는 이를 뒤집은 거여서 문제가 더더욱 커졌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재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이 서로 자리를 스위칭했다.
- ↑ 대체 윌슨이 왜 총리직에서 사임했는지는 아직도 말이 많지만 일반적으로는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경제 문제에 질려서 탈주해버린 거 아닐까'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 ↑ 다른 서유럽도 노조의 규모가 엄청나서 노동자들이 마음 먹고 파업을 일으키면 국가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었지만, 영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 노조를 하나로 묶어주는 중앙화된 노총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정부가 개별 노조 하나 하나와 다 협상을 해야하는 상황.
미션 임파서블 - ↑ 스코틀랜드 입장에서는 이 시기 막 북해에서 채굴되기 시작한 유전이 자신들보다도 잉글랜드를 먹여살리는 현실이 못마땅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