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대 로마와 카르타고의 최후의 전쟁. 포에니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 전쟁의 결과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종말이 아니라 한 문명의 종말이기도 했는데, 본토 페니키아가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페니키아의 유력한 후계 도시이던 카르타고마저 멸망하면서 페니키아 문명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로마는 패망한 카르타고의 영토를 식민지로 접수하면서 지중해의 절대 강국으로 발돋음하게 된다.
2 배경
이전의 포에니 전쟁에서 연패하면서 카르타고는 서부 지중해 패자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강화를 맺으면서 해군을 해체하고, 이미 점령당했지만 모든 해외 영토의 소유권을 로마에게 완전히 넘겼다. 그리고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었다보니 로마인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나마 스키피오 나시카 등의 온건파는 카르타고의 존속을 주장했지만...
여전히 카르타고는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뛰어난 상업력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롭웠으나 군사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 1차, 2차 전쟁 때와는 달리 이 시점의 카르타고는 로마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불러온 결정적인 문제는 카르타고가 여전히 부유했다는 점이었다. 카르타고가 차라리 빈곤하고 가난한 나라가 되서 정말로 로마의 자비에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면 그나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니키아인들이 공들여 개척한 농업 생산력과 뛰어난 해상 무역 덕분에 카르타고는 패배하고 무장해제당했음에도 여전히 부유하고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문제는 카르타고인들이 이제 자신들의 '부'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당시로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땅에, 한 때는 강했지만 지금은 철저하게 나약해진 카르타고가 그 '부유함'만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에서 난 탐스러운 과일을 들어보이면서 "카르타고는 여전히 이렇게 부유하다."는 발언이 올라오게 되었으니, 로마인들에게 그 풍요로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협상으로 일시적으로 유예되었던 카르타고의 파멸은 이미 시간 문제였고 시시각각 다가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의 부를 탐내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카르타고가 다시 강성해지는 것이 두려웠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150년에 인구 25만의 엄청난 대도시였으며 웅장한 건물도 많이 있었다. 기계도 없이 일일히 손으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시절에 25만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사막화가 진행된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카르타고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갖고 있었으며 지중해의 한 가운데라 유리한 교역 거점이기도 했다. 참고로 제정 로마 시절의 카르타고가 재건된 도시임에도 인구가 50만까지 늘어나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가 되었다는 것만 봐도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의 입지조건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이런 도시를 점령했으면 거주민은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죽이더라도, 도시 자체는 이주민을 보내서 살리는게 당연히 유리하다. 그런데 이런 꿀같은 도시를 로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17일 동안 철저히 태우고 뭉개버렸다.[1] 어찌나 철저히 때려부쉈던지 오늘날 제정 로마 시절의 유적은 곧잘 발굴돼도 도시국가 카르타고의 유적은 잘 안나올 정도.
로마가 점령한 도시는 숱하게 많지만 이런 운명을 맞은 도시는 카르타고 외에는 거의 없다. 로마가 단지 카르타고의 부를 탐냈다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도시를 부숴버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마디로 로마인들에게 카르타고는 저주스런 이름이었고, 제2의 한니발이 나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카르타고가 재건되는건 로마인이 카르타고에 대한 강박관념을 완전히 떨쳐낸 100년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절이었고, 50년쯤 지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미 인구 50만을 찍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다.
2.1 로마와 그리스
한동안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인들과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리스에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셀레우코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에서 패권을 확립하였고, 온건주의 외교를 추진하게 된다. 당시 로마 원로원내에는 스키피오 가문을 위시한 온건파가 많았고 또한 온건주의 외교는 이탈리아 내의 동맹시를 다루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온건주의 외교 노선은 로마 문화의 전통인 파트리아, 클리엔테스 관계를 국가간에 적용한 것으로 로마가 파트리아 역할을 하고 동맹시들이 클리엔테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로마는 동맹시들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동맹시들은 로마에게 지원을 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에서 전제되는 것은 동맹시들이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상당히 느슨한 관계였는데 이탈리아내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와 수백년간 전쟁을 했으므로 로마의 군사적 강력함을 알고 있었고 또한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므로 이 관계를 훌륭하게 유지해왔다.
때문에 로마는 그들의 온건한 외교 노선을 신뢰하고 있었고 따라서 동방의 새로 패권하에 들어온 그리스 국가들에게도 같은 노선을 적용시켰다. 하지만 그리스는 이탈리아 도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로마와 전쟁을 해본 경험도 별로 없는데다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 도시들에 비해 멀리 떨어져있었으므로 로마를 그다지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파트리아 클리엔테스 관계라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주의적 사상이 매우 강했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이 발달 등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많은 도시들에서 귀족은 몰락했고 완전 민주주의를 하고 있었다. 강력한 가문이 뒤를 봐주고 그의 서포트가 된다는 식의 로마 전통을 이해할 리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의 도시들은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또한 로마의 온건한 외교를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의 우수한 문화에 열등의식을 느껴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2]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로마인들에 대해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군사적으로 반발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 손에 넣은 도시들이 당연히 클리엔테스의 책임을 다할 줄 알았던 로마에겐 뜻밖이었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지친 로마인들은 온건주의 외교노선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 시민들은 이렇게 반발할 때마다 전쟁터에 끌려가야했기 때문에 그리스의 잦은 반발에 대해 꽤 분개하고 있었다.
발레리아누스 가문은 명 웅변가 대 카토를 내세워 이러한 여론에 편승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발레리아누스 가문이 영향력을 확대하자 온건주의 노선이었던 스키피오 일족이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이러는 과정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탄핵당해 실각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원로원 내의 카토의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이것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자 로마는 점점 강경노선 외교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정계의 중심인물로 부상한 카토는 두가지로 유명하였는데, 첫째로 그리스 문화를 매우 혐오하는 태도를 보였고, 둘째로 카르타고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2 누미디아와의 전쟁
로마의 정세 변화를 지켜보던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는 자신의 왕국을 넓히기 위해 바로 옆에 붙어있었던 카르타고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없이 전쟁을 할 수 없었으므로 로마에게 군사적 행동의 허가를 요청했으나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게 우호적이었고 여전히 카르타고에게 적대적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이것을 견디다 못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맺은 조항을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용병을 모집해 맞서싸웠지만, 카르타고가 이미 예전의 카르타고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이들은 누미디아군에게 패배했다.[3]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은 즉시 무단으로 전쟁을 벌인 카르타고에게 선전포고를 결의했다.
2.3 강화 결렬
카르타고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여러차례 보내 사과하며 앞으로는 강화를 준수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로마는 카르타고 전체의 무기 몰수와 새로운 배상금 부과 등 다양한 압박을 가했고 카르타고는 로마가 내세우는 여러가지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로마는 카르타고가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자 더욱 중대한 조건을 내놓았는데, 선전포고의 철회의 대가로 수도를 파괴하고 모든 주민들을 해안에서 15km 밖으로 이주시켜라라고 협박했다.
이 15km의 이주의 조건에 대해 카르타고 사절들은 이것은 카르타고를 죽이는 것이라고 항의했으나[4] 로마 원로원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일 뿐이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카르타고 사절의 절반 이상은 카르타고를 돌아가는 중에 다른 나라로 달아나버렸다. 이들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5] 따라서 분노한 시민들을 마주하기 전에 목숨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과연 카르타고 시민들은 이 조건을 듣자마자 분노하며 귀국한 사절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것은 이 사절들이 카르타고 내에서 로마와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뒤 시민들을 설득해 사절로 간 평화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절들을 다 처형한 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결의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3차 포에니 전쟁이었다.
위의 15km 조건을 카르타고인들이 거부한 것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것이 가혹한 조건이 아닌데 카르타고인들이 괜히 반발하였다는 주장을 펼친 바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인 입장에서는 "바다에 가기 위해서 22km 정도 가는 걸 가볍게 생각하는 로마인"임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인은 집에서 한 걸음만 나가면 곧바로 배를 탈 수 있는 거리에 도시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런 카르타고인들에게 로마의 저 최후통첩은 곧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로마의 저 명령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려는 의도로 내린 것 보다는 카르타고의 문화를 잘못 이해해서 내린 것이며 카르타고가 이것을 수용치 않고 전쟁을 결의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고대인들이 로마의 명령이 가혹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예로 당시 로마인 역사기록자들이 위의 조건을 일컫어 강경하다이라고 썼다는 것을 언급한다. 만일 가혹한 조건이라면 강경보다는 가혹하다라고 썼어야 옳다고 그녀는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정세가 강경노선으로 흐르고 있는데다 그 중심에 있었던 카토가 카르타고의 멸망을 끊임없이 주장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로마가 그 이전과 이후에 어떠한 도시에게도 기존의 도시를 파괴한 뒤 이주할 것을 시도조차 안한 것을 본다면 로마가 위의 명령을 단순히 문화를 잘못 이해해서 내린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만일 로마인들이 파괴하고 이주하는 것을 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처럼 단순히 신도시의 건설로 보고 있었다면 이러한 명령을 왜 카르타고에게만 유일하게 내린 것인지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인들이 그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심한 굴욕감과 비참함을 맛보는 과정이다. 자신들의 군법에 1/10 형벌(Decimatio)을 정식으로 형벌로 도입하고 있었던 로마인들이 이것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천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역사가들 몇명이 가혹이라는 단어 대신 강경이라는 단어를 쓴 것만 가지고 전체 고대인의 정서가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카르타고와 로마는 이전에 두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전쟁을 치른 사이다. 카르타고인들이 항구를 포기하는 것을 로마인이 이해 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들을 바보 취급하는 셈이다. 적들의 장점과 단점도 제대로 파악 못했다는 것이니까(...).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카르타고에게 해안가에서 15km 떠나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살려는 드릴게"' 정도의 권유였던 것이다. 시오노가 베네치아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옹호할 때 보여주던 주화입마 행태가 도졌다고 받아들이는게 좋을 듯. 이걸 쉴드 쳤다고?
그 결과 카르타고와 로마는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승패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카르타고인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셈이었다.
3 전쟁 : 카르타고 공성전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카르타고 시가 완전히 포위되어 공성전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무장해제된 상태였지만, 도시 내에서 무기를 빠르게 생산하여 급히 재무장을 갖췄다.
카르타고 시민들이 옥쇄하겠다는 각오로 나섰으므로 군사적 영광을 욕심낸 로마의 집정관들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3년간이나 버텨냈다. 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도시에서 희망없이 하는 농성전이었고 해상도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으니 그저 파멸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시간을 엄청나게 끌었고, 로마군의 피해도 계속 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결과 짜증날대로 난 로마 시민들이 당시 스페인에서 우수한 전공을 거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6]를 재출마 10년 제한 자격을 무시하고 다시 집정관에 선출하여 지휘를 맡겼다.
결국 전쟁 3년차에 성벽이 뚫렸다. 도시에 진입한 로마군은 저항하는 카르타고 시민들과 시가전을 벌였는데 이때 카르타고인들은 대부분 무장한채 로마군에 맞서싸웠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거나 자살하였다. 학을 단단히 뗏는지 로마는 도시 함락 직후 살아남은 5만명의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이렇게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함으로써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만다.
전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멸망하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는 일리아드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언젠가는 로마 역시 카르타고처럼 멸망하게 될 것이다.'는 감상을 남겼다.그런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4 이후
카르타고의 영토는 로마의 직할령에 편입되어 아프리카 속주로 재편되었다. 로마 귀족들은 당시 풍요로운 북아프리카 지역을 대농장 라티푼디움으로 개발하여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구 카르타고의 도시 부지는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때에 재건을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 때에 재건을 마친다.
5 여담
같은 해에 그리스에서 세번째로 큰 대도시인 코린트도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 기원전 133년에는 스페인 켈티베리아 지방의 도시 누만티아도 두 도시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한편 제3차 포에니 전쟁은 1985년 1월에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 유고 베텔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이 만나 공식적으로 전쟁 종결에 서명함으로써 2131년이 경과한 후에서야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공식적인 종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났다. 무려 2131년(...)이다.
그 이유는 카르타고가 항복했지만, 그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고대에는 종전협정이 있어야 전쟁이 끝난다는 현대적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냥 이탈리아-튀니지의 관계개선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상징적인 협정이다. 어차피 현대 이탈리아나 현대 튀니지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포에니 전쟁의 직접 당사자도 아니었고 말이다.- ↑ 여담이지만 서양에서는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에 두 번 다시 농작물이 자랄 수 없게 땅에 소금을 뿌렸다는 말이 유명하다. 다만 실제로는 그를 증명할 당시 사료가 없어서 중세쯤에 만들어진 말로 보여진다.
- ↑ 그리스인들은 로마가 우리를 군사적으로 정복했으나 우리는 로마를 문화적으로 정복했다고 자화자찬했다.
- ↑ 먼나라 이웃나라 6편인 이탈리아 편에서는 누미디아군이 완파당했다고 나온다. 오류 중 하나.
- ↑ 왜냐면 카르타고의 주 산업은 해상 무역인데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라는 것 자체가 카르타고를 죽이는거나 마찬가지다. 즉 애초부터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생각이었던 것.
- ↑ 카르타고도 로마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국가였다.
- ↑ 역설적이게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小 스키피오)가 속한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카토 일파와 대립하며 카르타고에 대한 강경책을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