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s Bizet[1]
1838년 10월 25일 ~ 1875년 6월 3일
▲ 비제의 《카르멘》 中 〈하바네라〉(Habanera). 한 번쯤 들어 본 음악. 영상 마지막의 찰지구나(…)는 무시하자
1 생애
비제는 1838년 파리 근교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악 강사인 아버지에게서 음악 교습을 받은 비제는 일찍 재능을 보여 10살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파리음악원에서 작곡, 피아노, 오르간을 배운 그는 주로 샤를 구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56년 18세의 비제는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칸타타 '다윗'을 출품해 입상, 이듬해에는 마침내 대상을 차지한다.[2]
부상으로 로마에 3년 동안 장학생으로 유학을 갔다온 후, 비제는 오페라에 주력한다. 1863년 '진주조개잡이'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린 후, 계속해서 작곡에 몰두하지만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다.여기도 소포모어 징크스인가? 그러던 중 1869년 로마 유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로마의 회상' 모음곡을 발표하였고[3], 같은해 스승의 딸과 결혼한다.이쪽과는 달리 키잡은 아니었다 1872년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각색한 '아를의 여인'의 극음악을 작곡해 성공하고 그중 몇곡을 모아 모음곡으로 발표한다.[4] 하지만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은 1875년에야 나온다. 바로 카르멘. 비제는 이 오페라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으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될 때의 반응은.. 아 망했어요. 자세한 것은 카르멘 항목 참조. 결국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 초연 실패로 결정적인 타격을 맞은 비제는 초연 후 3개월 뒤인 1875년 6월 3일에 카르멘이 빈에서 대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2 작품 성향
비제는 남유럽, 특히 프랑스 특유의 극적이고 화려한 색채의 음악에서 강점을 드러내었다.[5] 또한 오페라, 극음악을 주로 쓴 작곡가답게 등장인물 표현, 감정 표현,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데 강하였다. 또한 카르멘, 아를의 여인에서는 극과의 절묘한 조화, 새로운 기법 등으로 이후 피에트로 마스카니, 지아코모 푸치니등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사실주의 오페라의 시초가 되었다.
3 기타
남겨진 작품 수가 적다. 요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제 자신이 생전에 마음에 안 든 작품들은 다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4 주요 작품
4.1 오페라[6]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오페라 코미크 '의사의 집'
오페라 '닥터 미라클'
오페라 부파 '돈 프로코피오'
오페레타 '여사'
오페라 '이반 4세'
오페라 '퍼스의 큰 하녀'
오페라 '카르멘'
오페레타 '전쟁하러 가는 말보로'
오페라 '툴레 왕의 컵'
오페라 코미크 '클라리스 할로위'
오페라 '돈 로드리그'
오페라 코미크 '그리셀리디스'
4.2 관현악곡
서곡 A장조
모음곡 아를의 여인 [7]
교향곡 1번 C장조[8][9]
교향곡 '로마' C장조
작은 모음곡
서곡 '고향'
4.3 합창곡, 가곡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데'
테 데움
송시 교향곡 '바스코 다 가마'
26개의 가곡
4.4 피아노곡
녹턴 F장조
연주회를 위한 색채적 변주곡
카프리스 C샤프 단조
카프리스 C장조
무언의 로망스 C장조
화려한 테마 C장조
왈츠 C장조
3개의 음악적 스케치
연주회용 큰 왈츠 E플랫 장조
마린
녹턴 D장조
라인의 노래
4개의 전주곡
무언의 샹송적인 멜로디의 로망스
베니스
- ↑ 출생신고 당시 이름은 알렉상드르 세자르 레오폴 비제(Alexandre César Léopold Bizet)이나, 가족들과 친지들 모두 유년기부터 조르주 비제라고 불렀다.
- ↑ 엑토르 베를리오즈, 모리스 라벨의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거 엄청 대단한 거다. 그것도 10대에...
- ↑ 이후 교향곡 '로마'로 개작한다.
- ↑ 모음곡 중 '미뉴에트'는 특히 유명한데, 들으면 안다. 화장실 등에서 BGM으로 자주 나오는 곡.
- ↑ 니체는 이를 바탕으로 그를 '지중해의 바그너'라고 칭하기도 했다.
- ↑ 오페라 부파, 오페라 코미크, 오페레타 포함
- ↑ 원곡은 27곡이나, 비제 자신이 전곡 중에 4곡을 골라 제1모음곡을, 비제 사후에 친구였던 에르네스트 귀로가 다시 4곡을 골라 제2모음곡을 만들었다.
- ↑ 번호를 붙인 교향곡이 이거 하나뿐인데도 굳이 번호를 써놓는 이유는 비제가 더 많은 교향곡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듯 아마 나머지는 비제가 불태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게 사람의 본능 - ↑ 이 작품은 비제 사후에 발견되어 바인가르트가 1935년 2월 26일에 초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