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

alphonse-daudet-1.jpg
Alphonse Daudet
1840년 5월 13일 ~ 1897년 12월 16일

프랑스소설가.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방의 님(Nîm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뱅상 도데는 비단 제조업을 하고 있었지만 불운을 부르는 사람이었고 하는 일마다 실패해서 알퐁스 도데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왕당파였고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들과 함께 행동했으니 당연히 저럴 수밖에.(…)

알퐁스 도데는 자라서 리용(Lyon)을 떠나 알레스(Alès)로 가서 교사 생활을 했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결국 1년여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말았는데 후에 그의 회고로는 "알레스를 떠난 몇달 뒤에도 나 자신이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 가운데 서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 수업이 어떤 상태에서 씌여졌을지 대략 짐작이 간다.

교사 생활을 그만둔 뒤 3살 연상의 형과 함께 살았는데 형은 파리에서 기자가 되고 싶어했다. 알퐁스도 형을 따라서 를 썼는데 쓴 시들을 모아 <사랑하는 여자들>을 출판했다. 이는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르 피가로지>가 도데를 기자로 기용했고, 2~3편의 희곡을 써서 장래성을 주목받았다. 한편으로 나폴레옹 3세의 대신이자 입법회의 의장인 샤를 드 모르니 후작의 후원을 받아서 모르니 후작이 사망하는 1865년까지 모르니 후작비서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866년, 첫 소설을 써서 크게 성공하게 된 도데는 이후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68년에 <Le Petit Chose>[1]라는 첫 자전적 장편 소설을 썼지만 이것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후 <밝은 타타린>과 3막짜리 희곡 <아를의 여인>을 썼지만 흥행에 실패했고[2], 이후 집필한 희곡 <프로몽과 리제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어권에도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로 <나바브> 등의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쓰는 등 작가로서의 위상은 뚜렷해졌다. 1867년에 쥴리아 아라드와 결혼했는데 그의 부인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883년 도데는 자신이 아카데미 회원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쓴 기자와 결투를 벌였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안좋은 기사를 쓴 기자와도 결투를 신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약을 잘못 쓴 탓에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1897년 6월에 세상을 떠났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은 서정적이며 그의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소설의 서정성은 그가 남프랑스 출신이라는 점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 듯하다. 생전에 알퐁스는 찰스 디킨스와 스타일이 유사하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도데 자신은 자신은 디킨스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디킨스와 비교해 보면 유사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도데가 디킨스를 모방한 건 아니며 분명하게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아버지도 왕당파였고 도데 자신도 나폴레옹 3세의 대신의 비서를 지낼 정도로 보수적인 위치에 서있는게 분명해 보인다[3]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수업은 우리나라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다. 보불전쟁을 다룬 소설이 많다.

말년엔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줄거리는 황금 뇌를 가진 아이가 머리를 다칠 때 피에 황금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누가 유괴해 갈까봐 비밀에 부치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알려준다. 그 아들은 뇌에 든 황금을 막 쓰다가 정신이 나쁘게 변했고 중간에 황금이 바닥나게 되면 결국 자기 생이 온전치 않게 되리라는 걸 알고 황금 쓰기를 자제한 적도 있었으나, 아들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아들의 뇌가 황금이라는 사실을 어쩌다가 알아내고는 몰래 밤중에 기어 들어와서 뇌 속의 황금을 조금 남겨두고 훔쳐갔다 그후에도 예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허영심이 많은 여자떄문에 머리의 황금을 또 쓰게되었고 어느날 여성이 죽자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모든 황금을 쓰게된 남자는 여인이 죽었다는것도 모르고 구두를 선물로 사주기 위해 머리에 붙은 황금 부스러기와 바꾸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위기철논리야 놀자 시리즈에서 나와 유명해지기도.

평생을 매독에 시달려 17세 때 걸린 매독이 39세에 척수 매독으로 진행,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통증만이 아니었다. 척수신경 손상으로 다리의 감각 기능이 없어진 탓에 몸의 균형 잡기가 힘들어져 걸핏하면 비틀거렸고 걸을 때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당시 매독의 '첨단 치료제'는 수은이었다.[4] 오랫동안 수은 치료를 받았던 도데는 수은중독에도 시달렸다. 통증을 견딜 수 없었던 도데는 모르핀까지 맞았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구역질로 고생했지만, 모르핀을 맞아야 그나마 통증을 잊고 잠시라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생을 너무 많이 사랑한 나머지 하느님이 내게 벌을 주신 거야."
실은 별을 통해 아몬이 속삭였다고 한다.
  1. 한국에는 <꼬마 철학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2. 단,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아를의 여인>의 음악들은 지금까지도 클래식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심지어 그의 아들은 반유태주의자였다.
  4. 현재는 물론 페니실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