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Wien / Vienna | |
빈의 문장 | |
국가 | 오스트리아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준수) |
서울까지 | 9시간 20분 8296킬로미터 |
한국과의 시차 | -8시간 |
인구 | 1,731,236 (2011년) |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수도. 독일어식 명칭인 빈 대신 흔히 영어식 명칭인 '비엔나(Vienna, /viːˈɛnə/ 비에너)'로도 불리며 가끔 비인으로도 불리나 이는 표기법 오류.[1]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오스트리아가 강대국이었을 때는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유럽의 영화로운 대도시였지만, 지금은 그냥 소국의 수도로 전락한 상황.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2]
유럽의 다른 이웃 도시들보다 거리가 매우 깨끗하고 치안이 잘 되어 있다.[3] 지하철이나 대중교통도 유럽치고 굉장히 깨끗하고 노선망도 우수하다.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의 대도시와 빈을 구분해 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헝가리의 수도였다가 지금은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와 특히 가깝기 때문에[4] 쌍둥이 도시(Twin City)라고 부르며 왕복이 잦다.
2 역사
도시 명칭은 고대 로마의 전선기지인 빈도보나(Vindobona)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지며, 12세기 바벤베르크 왕조가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127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1세가 정복하면서 비로소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 되었지만,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수도를 서쪽의 인스브루크로 옮기면서 잠시 수도의 위치를 상실하기도 했다. 후에 루돌프 2세 역시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수도를 이전한 적이 있었지만 동생인 마티아스와의 권력 다툼에 밀려 죽을 때까지 감금당한 것에 불과했다.
1529년과 1683년에 두 차례나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는데 둘 다 어떻게든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유럽, 특히 동유럽 역사상 유명한 1차 빈 포위와 2차 빈 포위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혁명의 파도'는 견디지 못해 나폴레옹에게 5년 만에 두 차례나(1805, 1809) 굴복했다(...). 이 굴욕 뒤에 1814~1815년 빈 회의로 화려하게 부활, 1848년까지 30년 남짓한 '빈 체제'를 형성해 시대에 도시의 이름을 새기는 족적을 남겼다. 1848년 3월에는 혁명으로 뒤덮이기도 했으며, 1857년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해체하여 현재의 링슈트라세를 조성하였다. 이 도로를 따라 국회의사당, 시청사, 대학,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 기타 관청과 증권거래소 등이 조성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멸망한 뒤인 1920년대에는 좌파 사회민주당의 거점 도시가 되어 '붉은 빈'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1938~1945년에는 나치 독일에 합병당해 20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가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고, 대전 말기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로 큰 손해를 입었다.
1945~1955년에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승전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군정의 공동 통치를 받았고, 1955년에 영세중립국을 선언하면서 겨우 외국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의 수도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3 이모저모
일찍히 신성로마제국 시대 이래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과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호프부르크 궁전[5], 쇤브룬 궁전[6], 슈테판(성 스테파노) 대성당[7], 성 카를 성당, 링슈트라세를 중심으로 건축된 국회의사당, 시청사(라트하우스), 보티프 성당, 빈 대학[8], 국립 오페라 극장[9], 자연사 박물관과 예술사 박물관, 제국극장, 사부아 공자 외젠의 거처였던 벨베데레 궁전[10],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음악협회의 대강당[11], 합스부르크 황족의 묘소인 카푸치너 성당 등.
런던이나 파리 못지않게 유적과 문화유산이 넘쳐나기 때문에 도시의 중심부인 구시가지(Innere Stadt)가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처럼 죽어도 외관을 바꾸는 건축 허가는 내지 않아서 리모델링만 해서 사용중이다. 20세기 초반 아르누보와 분리파 미술의 중심지였던 탓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에곤 실레, 아돌프 로스 등 이 사조와 운동에 참가했던 미술가와 건축가들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제체시온(secession), 로스 하우스 등등
루브르처럼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지만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이 모여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12], 오이겐 공의 궁전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쓰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 황실 가구 박물관, 에곤 쉴레의 작품이 많은 Musuem Quartier 박물관 지구의 레오폴트 미술관, 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을 개조하여 만든 훈데르트바서 박물관 등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독일어권의 유명 작곡가들과도 많이 얽히는 곳인데, 이 도시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생애의 상당 기간을 여기서 보내며 수많은 명곡들을 남겼기 때문에 음악도나 음악애호가들에게도 성지 취급받고 있다. '악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도 빈에서 35년동안 살다가 여기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베토벤의 제2의 고향'이라고 홍보하고 있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슈베르트도 비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기는 했지만 말년에 이 도시에 정주하며 최후의 대작들을 남겼다.
린츠 근교의 시골에서 태어난 안톤 브루크너도 중년기에 이 도시로 이주한 뒤 교향곡 작곡가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막내딸 발레리 공주의 도움으로 벨베데레 궁전에서 만년을 보내기도 했다. 구스타프 말러나 '신 빈 악파'로 불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도 이 도시에서 파격적인 음악들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음악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왈츠의 왕'으로 칭송받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롯한 소위 '슈트라우스 가족'들도 이 곳을 본거지로 활동했고, 이들이 남긴 수백여 곡의 춤곡들도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전통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음악이자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 이곳저곳에서 애주되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계보를 이은 헝가리계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13]도 1905년에 이 도시에서 자신의 최대 히트작인 오페레타 '유쾌한 미망인'을 초연해 대박을 터뜨렸다.
음악 도시로 자부하는 동네인 만큼 유명한 연주자들도 매우 자주 와서 공연하며, 위에 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빈 교향악단, 빈 방송 교향악단 등 세계구 급으로 유명한 관현악단들의 연주회나 양대 오페라단인 국립오페라단(Staatsoper)과 국민오페라단(Volksoper)의 오페라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입석으로 얼마든지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입석으로 보통 3유로(!)에서 비싸봤자 6유로 이내로 볼 수 있다. (국내 영화 관람비용보다 저렴한 비용이다!!) 다만 늦게 가면 영 좋지 않은 자리를 배정받아 오페라 소리(...)밖에 듣지 못하지만 제대로 자리를 차지한다면 오히려 좌석보다 더 괜찮은 시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14] 하지만 그날 공연이 바그너라면 포기하는게 낫다. 물론 좌석값은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시내에 있는 빈 중앙묘지는 클래식 음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인데, 빈에서 활동한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다만 모차르트의 묘지는 이 곳이 아닌 성 마르크트 묘지에 있다. 그나마 모차르트의 유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59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한 뒤, 나치의 탄압으로 1938년 6월에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생애의 90% 이상을 빈에서 보냈다. 유명한 저서《꿈의 해석》(1900)도 이 시기에 나온 것.
유럽에 커피를 전파한 시발점으로도 유명하다. 상술하였듯이 두 차례의 오스만 투르크 침공 때 투르크 병사들이 커피와 커피 조리기구, 기술을 남기고 갔고, 전쟁 후 이것들을 응용해 20종의 레시피를 만들어 냈고 현재는 15종만 가게들에서 판매 중인데 이중 그 유명한 비엔나 커피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빈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카페(커피숍)가 굉장히 많고, 시민들이 카페를 거의 집안 거실처럼 빈번하게 이용하는 문화도 유명하다. 요리 쪽에서도 인근 동유럽 국가들이나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 소박하면서도 이국적인 향취를 내는 메뉴들이 많은데, 돈까스의 시조 격이 되는 고기 튀김인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소스따윈 없고 레몬과 감자가 함께 나오는 음식)이나 비엔나 소시지라는 영어식 명칭으로 흔히 불리는 비너 뷰어스트혠(Wiener Würstchen)이 유명하다. 다만 이 소시지는 동양에서 생각하는 것 처럼 짜리몽땅한 모양은 아니고, 맛도 좀 다른 편이니 주의.
볼 것도 먹을 것도 많고, 교통도 편리하다. 동유럽, 서유럽의 주요 도시로 가는 열차가 많아서 유레일 패스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르는 도시다. 특히 주변국의 수도들인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와는 모두 자동차로 2~3시간 거리 내에 있어 동유럽 여행의 시작지로 삼기도 한다. 고속열차인 레일젯으로 오스트리아 주요 도시들과 부다페스트, 프라하, 뮌헨과 연결된다. 빈의 항공 현관은 공항은 빈 국제공항이다. 직항편은 대한항공의 인천-빈(KE937/938)이 있으며, 보잉 777이 투입된다. 또, 오스트리아 항공의 보잉 777이 나리타 국제공항-빈 국제공항(OS52/AUA52)편이 있다.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이며 국제연합의 유럽 거점 도시(?)로 지정되어 있어 국제연합기구 도시(UNO City)가 있으며,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본부도 빈에 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더이상 전쟁의 화마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낸 결과다. 국제기구가 많은만큼 스위스 제네바와 함께 스파이가 많은 도시로 유명한데 세계에서 외국인 정보조작원의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라고한다.
<비엔나 워킹투어>라는 책을 보면 빈의 오래된 거리와 건축물, 전설들에 대해서 상세히 알 수 있다. 어지간한 여행전문서적을 능가하는 수준.
이렇듯 이모저모도 많지만 문제는 기후. 5월에서 9월 사이만 조금 덥고 해를 볼 수 있으며, 그 외의 기간은 겨울이나 진배없고 흐릿한 날씨가 계속된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초콜릿을 아주아주 많이 섭취하는데 오죽하면 초콜릿 끊으라는 말이 담배 끊으란 말보다 더 심한 말이다.
음식이 매우매우 짜다. 이는 오스트리아 고유의 전통 탓인데, 암염이 채굴되어 나트륨 함량이 낮은 소금도 많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음식이 짜면 짤수록 귀한 대접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국인도 짜게 먹는 편이라지만 더한 편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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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장음 표기가 무시된다. 1988년 이전에는 비인이라고 불렀다.
- ↑ 기후가 온난하고 도시 구획 분리가 아주 잘되어 있다. 도로 정비도 대단히 깔끔해서 교통체증이 발생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시설이 즐비해있고 도시 시민들의 소득수준도 상당하다. 다만 5월에서 9월 빼곤 거의 겨울이라 쳐줘도 될 정도로 흐릿하고 추운 날씨를 유지한다.
- ↑ 물론 유럽이고 유명 관광지이니까 소매치기등의 경범죄등은 항상 주의하자. 다만 서유럽만큼 심하지않고 조금만 조심한다면 안심하고 다닐수있다.
- ↑ 열차 1시간 거리. 강남에서 일산 가는 것 보다 빠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외국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도 있다.
- ↑ 방이 무려 3천 개(!)가 넘는다는데, 이는 전대 황제와 황후 내외가 쓴 방을 쓰지 않는다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불문율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는 전체를 구성하는 건물들 중 일부 동을 개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고.
- ↑ 여름 궁전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배치만 다를 뿐 매우 흡사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가 좋아한 옅은 노란빛,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우로 칠해져 있으며 1,2층만 공개되고 3,4층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주공아파트로 쓰이고 있다
- ↑ 모자이크 지붕과 높은 첨탑이 아름다워 사람을 압도한다. 빈의 심장.
- ↑ 단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방학이 많고 길지만 노벨상 수상자가 꽤 많다.
- ↑ 처음 지을 때는 설계 변경이 잦아 건축가들은 불만이 많았다. 완공 뒤 ‘푹 꺼진 상자’란 혹평으로 두 건축가는 자살과 뇌졸중으로 죽었다. 2차 대전 말기에 불탄 뒤 국민 투표로 제일 먼저 재건되었으며, 가장 사랑 받는 건물이다.
- ↑ 현재는 미술관으로, 클림트의 키스나 유디트같은 유명 작품들과 조각이 전부 진품으로 전시되어 있고 당연히 내부 촬영은 금지. 직원들과 CCTV가 매의 눈으로 주시하며 촬영 시도시 가차없이 끌려나간다. 내장이 나무라 과거 소련군 주둔시 손만 대어도 우스스 부서져서 내장 70%는 다시 복원시켰는데 매우 화려하다. 관리가 철저해서 유일하게 빈에서 냉방, 난방 시설도 완비해둔 곳이다.
- ↑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이라고 한다. 그 중 메인 홀은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금빛 기조의 도색 때문에 황금홀(Goldener Saal)이라고 불리며, 클래식 공연장 중 최상의 음향 조건을 갖춘 곳으로 손꼽힌다. 그 화려한 면모는 매년 1월 1일에 거행되는 신년음악회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 ↑ 한국어 오디오가이드가 지원되니 필요한 위키러는 이용하도록 하자.
단 루브르 급의 퀄리티를 기대하진 말자 - ↑ 다만 그는 히틀러가 좋아했기에 나치가 극진히 우대했던 점으로 2차대전이 끝나고 친나치는 아니지만, 나치가 좋아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렀다. 물론 그 자신은 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초청받은 것뿐. 나는 나치의 사상을 지지한 적도 없다며 끝까지 당당하게 굴다가 갔다.
- ↑ 오페라 시작 80분 전부터 입석 좌석을 판매하는데, 대략 40등까지는 1층 좌석의 바로 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유명한 성악가가 나오는 날에는 이른 시간부터 아예 접이식 의자까지 준비해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 ↑ 그런데 1일 나트륨 섭취량을 보면 한국사람들이 훨씬 더 높은데, 이는 대한민국의 국물 요리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허나 이 동네 사람들은 음식이 전반적으로 짜긴 해도 국물을 먹지 않기 때문에 섭취량이 월등히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