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전 · 현직 정치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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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一載
1920년 2월 28일 ~ 1965년 9월 19일
1920년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 법과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이후 일제의 눈을 피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깐 활동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의 자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조선어 사전 편찬에도 참여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수감되었다.
8.15 광복 후 민주국민당에 몸담으면서 중앙집행위원, 기획부장, 경상남도당 청년지도부장 등을 지냈다. 1955년 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되어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후 민주당에서 중앙위원을 지냈다. 계보에서는 신파에 속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당 김법린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동래군-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노재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5년 초 민주당 정책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9월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