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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인질로 잡힌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직원들
1 개요
1979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미국인 50여명이 이란에 인질로 억류돼 있던 사건이다. 미국 내에서는 이란 인질 사태(Iran Hostage Crisis)라고 불리고 있다.
2 배경
이란 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팔라비 왕조의 압제를 단지 친미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원하는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팔레비 왕조의 독재와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물밑에선 반발심리도 커져가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여러차례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정권의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 와중에 이란 시아파의 최고 성직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강제로 이란을 떠나야 했다. 호메이니는 터키로 망명했다가, 결국은 프랑스 파리에 자리잡고서는 이란내 반팔레비 운동을 부채질하였다.
1978년 엄청난 규모의 반 정부 시위가 발발하였고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왕은 휴양을 이유로 이란을 떠나서 해외로 망명하였다. 바크티아르가 주도하는 과도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아무런 힘이 없었고, 팔레비 절대왕정에 반발했던 민주주의 세력, 외세결탁의 집권층 부패를 타도하려는 민족주의 세력, 그리고 여기에 서구식 근대화 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등 3개파가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15년간 해외에 망명해있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2월 전격 귀국해서 엄청난 대중을 동원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바크티아르 과도정권을 붕괴시키고[1], 4월 국민투표로 신권적 지배, 즉 이슬람의, 이슬람을 위한, 이슬람에 의한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다.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급진 강경파들은 기존 팔레비 왕조가 추진했던 모든 서구식 제도, 관습, 그리고 양태를 부정하고 이슬람 원점으로의 회귀라는 명분을 외치면서 중동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고 나선다. 따라서 서방 세계의 대표적인 상징이면서 원한관계에 있던 미국에 대한 도발은 어떤 형태로든 예상되고 있었다. 미국 또한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혁명 후 군수 부품 공급 등을 통하여 관계정상화와 분쟁 예방을 꾀했다.
그러나 미국이 벌인 작은 삽질 하나가 엄청난 참극을 불러올 줄은 미국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3 미국의 삽질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이란의 이러한 경직된 입장을 오판해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 왕의 입국을 허가함으로 이란의 급진 강경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호메이니는 팔레비의 송환을 강경하게 요구했고, 팔레비 왕의 지병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단 파견을 미국에 제의했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참고로 호메이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팔레비를 따르는 왕당파는 물론이거니와 혁명때 같이 싸웠던 좌파들까지 대대적으로 숙청했는데, 샤(팔레비)는 5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결국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에서 팔레비 신병 인도를 요구하던 과격파 학생 시위대가 시위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난입, 점거함과 동시에 약 70여명의 외교관을 인질로 억류함에 따라 미.이란 인질 사태의 막이 올랐다. 이미 급진 강경파가 장악한 이란 혁명 정부는 미국과 일전불사의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금지 조치에 이란의 대미 석유 금수 조치, 이란의 재미 예금 전액 인출 및 재이란 미국 투자의 국유화 조치에 미국이 재미 이란 공적 자산 동결조치로 응수하는 등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으며, 아라비아 만과 인도양에서 미 해군의 무력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미국 내 이란 중앙은행 예금에 대한 동결 조치로 인해 이란의 중앙 은행은 미국의 Chase 은행에 이자 지급을 못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의 Chase 은행이 이란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하였다.
4 사우디아라비아 카바신전 점거
이 사태는 엉뚱한 방향으로도 불똥이 튀었는데 11월 20일 중동의 대표적 친미 노선 국가였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카바신전이 일단의 무장 괴한 들에게 점거되고 수백 명이 인질로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다음 날인 11월 21일 이슬람력으로 1400년 원단(元旦)이었기에 이슬람권에 가해진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 습격사건의 배후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있다."는 괴소문이 떠돌아서 이슬람권 국가에서 격렬하고 파괴적인 반미운동이 연이어 발생하고 악성루머가 계속 연이어 발생해 사태가 증폭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경비대로 하여금 진압을 명령, 사우디 군경 127명과 폭도 117명이 죽는 엄청난 유혈참사 끝에 사태를 진정시켰는데 , 이 점거사태를 주도한 괴한들이 서구식 근대화를 부정하고 이란식 이슬람 혁명을 추종하는 교조적 광신도들임이 드러났다.
결국 이 사건은 미.이란 인질 사태에 악재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팔레비 왕조를 끌어내린 시아파혁명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잇던 사우디로 대표되는 온건, 친미 성향의 수니파 왕조국가들과 이란과의 정치적 대립을 야기시켰다. 이러는 와중에도 미국과 이란의 대립은 극에 달해 미국에 대한 단죄및 사과요구로까지 확대되고 미국 역시 미 대사관 난입과 인질사태는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결국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잠시나마 온건파의 중재로 협상의 기미가 보이는 듯 했으나 꼰쟁이 영감이 강경한 자세를 내비침으로서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육/해/공/해안경비대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인질을 구출하는 독수리 발톱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계획차질과 항공기 충돌사고로 애꿎은 특수부대 8명의 목숨만 앗아가는 결과만 얻고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5 종결
이렇듯 평행점으로 치달아 앞이 보이지 않던 인질 사태는 호메이니가 유화적인 태도로 나오고, 여기에 1980년에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전환점을 맞이하여 알제리의 중재 하에 미국이 동결된 팔라비 왕조 당시의 재미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기로 동의, 1981년 1월 20일 사건발생 444 은근슬적 불길한 숫자다(...) 일 만에 억류된 인질 전원이 석방, 미국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참고로 1월 20일은 로널드 레이건이 지미 카터의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카터가 임기 중에 인질 사태를 해결할 기회를 끝까지 주지 않으려고 했던 이란 측의 의도를 반영한 날짜 선정이었던 셈이다.
여담으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팔레비 전 국왕은 1979년 12월에 사실상 미국에서 쫓겨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집트로 돌아가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보호 하에 지내면서 투병하다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7월 26일에 카이로에서 객사했다.
6 파장
국제적으로 미국의 인도양, 아라비아해 지역의 군사력 증강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세력확장을 두려워 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사태를 야기했다. 여기에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종파적 갈등의 재개는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슬람권의 분열로 표면화 된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에 데인 서방 세계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한 사우디를 비롯한 수니파 왕조국가들, 심지어 중소결렬 이후 서로 쳐다보지도 않던 소련과 중국까지 대동단결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이라크를 지원하게 된다(...)[2] 전세계를 등에 업고도 이기지 못한 사담 후세인
미국 내에선 지미 카터 대통령이 '독수리 발톱 작전'의 대실패와 인플레이션 때문에 인기가 폭락, 대선에서 강한 미국을 외친 공화당(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에 참패했다. 특히 도덕외교를 내세운 지미 카터 행정부의 실패로 미국 정치권의 전반적인 보수화 현상이 가속화 되었다.
또한 '독수리 발톱 작전'의 대실패로 체면을 구긴 미군은 실패원인을 각 군간의 협동체계 미비, 준비부족으로 분석하고, 대책으로 미국 특수작전사령부를 창설해서 각 군의 특수부대를 한데로 모으게 된다.
7 미디어
벤 애플렉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아르고>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재미를 위하여 상당수 허구를 가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사건으로 인질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사건 당시 운 좋게 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이란을 탈출하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