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竹嶺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상의 고개이다.

고개 북동쪽에는 소백산이 있으며 고개 대부분의 구간이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 닦아서 "죽령"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로도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한강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 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 영남대로 가운데서 우로의 고비에 속하는 곳으로 한양에서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광역시 북구(울산) 염포로 통했다. 역사적으로도 여러차례 중요한 길목이었으나 보통 조령(문경새재)과 묶여서 서술되는 안습한 신세.

2 교통

죽령을 따라 건설된 5번 국도는 차량들이 별로 없어 한산하다. 중앙고속도로중앙선 철도가 해당 고개 밑을 관통하여 건설되었다. 특히 중앙고속도로의 죽령터널(1번 항목)은 현재 대한민국 도로 터널중 두번째로 길다(4,600m). 경부고속도로추풍령과 비교되는 점. 죽령터널개통 전에는 영주, 안동 사람들이 서울을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가야할 길목이였는데, 구불구불한 산길이라 시간을 매우 잡아먹었다. 터널 개통 전과 개통 후의 서울 도착시간이 거의 1시간정도 차이 날 정도.. 지금은 정상 즈음에 주막이 자리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나 소백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죽령 정상을 시종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단양과 영주 양쪽에서 죽령행 버스가 운행중이긴 한데 차 시간이 묘하다. 차라리 택시를 타던가 버스가 조금 더 자주 다니는 희방사 쪽으로 올라가던가 하는게 낫다.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시외버스들은 정속하다가도 죽령 내리막에선 찰지게 밟는다 카더라 [1]

3 관련 설화

죽령과 관련된 설화로 '다자구 할머니'가 있다. 죽령에 산적떼가 창궐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관군들이 이들을 소탕하고자 해도 죽령이 워낙 험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노파가 관아에 찾아와 묘안을 제시하는데, 그 묘안인 즉슨 기회를 봤다가 산적들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기습하는 것. '들자구야'라고 신호를 보내면 아직 잠이 덜 들었으니 기다리라는 뜻이고 '다자구야'라고 신호를 보내면 완전히 잠이 들었으니 빨리 기습하라는 뜻의 암호를 정해 놓았다. 그리고 죽령에 가서 '다자구야 들자구야'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이는 산적떼의 귀에 들어가 이를 수상히 여긴 산적 두목이 노파를 잡아다가 물으니 '다자구와 들자구는 내 두 아들인데 오래 전에 잃어버려서 애타게 찾던 차에 여기서 산적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둘러대었다. 이에 두목은 노파를 불쌍히 여겨 같이 살게 했다. 며칠 후 두목의 생일이 되어 술과 여러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 날 밤 술기운에 모두들 완전히 곯아떨어지자 이 때다 싶어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니 숨어서 기다리던 관군들이 별안간 습격하여 산적들은 꼼짝없이 붙잡혔다. 그 후 노파는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 노파가 죽령산신이었음을 깨닫고 '다자구 할머니'라 부르며 해마다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위치한 죽령산신당이 바로 이 설화와 관련되어 있다.
  1. 죽령터널에서 워낙 과속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현재는 구간단속제가 도입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