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달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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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7대 일성 이사금 박일성8대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9대 벌휴 이사금 석벌휴
시호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아달라왕(阿達羅王)
박(朴)
아달라(阿達羅)
생몰년도음력70? ~ 184년 3월
재위기간음력154년 ~ 184년 3월(30년)

1 개요

신라의 제8대 왕. 칭호는 이사금. 일성 이사금과 지소례왕(支所禮王) 박씨의 맏아들이며, 왕후는 지마 이사금의 딸 박씨 내례(內禮) 부인이다. 8촌 사이의 근친혼인데, 슬슬 석탈해의 후손 석씨 일족의 힘이 강해지자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1]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우선 석씨, 그리고 나중엔 경주 김씨 등에게 이어져 먼 훗날 아달라 이사금의 머나먼 자손이자 김씨 헌강왕의 사위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서 다시 왕위에 오를 때까지 박씨는 728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사실 말이 728년이지 이 기간은 이성계조선 건국 ~ 2016년 현재 사이의 간극보다도 더 긴 기간이다. 그래도 박씨는 그 동안 석씨처럼 완전 폭망하지는 않고 신라의 주요 귀족가문 지위는 수백년동안 계속 유지한다. 왕비도 많이 배출하는 편이고...[2]

비록 박씨 가문이 왕위를 잃긴 했지만, 아달라 이사금 치세에 신라는 이런저런 전투를 겪으면서 영역을 지금의 경상도 북쪽 끝 죽령문경새재가 있는 소백산맥까지 확장하는 등 준수한 업적을 남겼다. 소백산맥은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기 쉬운 천혜의 지형이었기 때문에, 일찌기 이 지역을 선점하고 굳혀서 진흥왕 이전까지 가야와 대결하며 내실을 굳히는 것이 가능했다.

2 재위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전전왕 지마 이사금 때는 상당히 좋았고 전왕 일성 이사금 때는 별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달라 시기에는 백제와 다시 사이가 나빠졌는데, 발단은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그 전에 들켜버리자 백제로 도망가버린 사건이다. 신라의 범죄자니 돌려보내라고 백제에 알렸지만 백제가 거부했고, 아달라 이사금은 화가 나 즉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갔는데 백제는 우주방어로 일관했고 일단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167년 7월에는 백제가 신라 서쪽 2개 성을 공격하자 8월에 반격으로 무려 2만 8천명(!)의 대병을 이끈 것으로[3] 한강까지 신라 대군이 오자 당시 백제로서도 상당히 위협적인 군세였기에 결국 잡아간 신라 백성들을 돌려주면서 화친했다. 그러나 몇 년 뒤 170년 백제는 다시 신라를 침략했는데, 소소한(?) 노략질 수준이었고 마침 백제가 쳐들어오기 직전에 서라벌에 지진+서리+우박 3단콤보가 와서 어수선했기 때문에 그런지 이번엔 변변한 반격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156년 계립령(문경새재 동쪽 길, 지금의 하늘재로 생각된다)을 열었고 158년에는 죽령의 도로를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영역은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을 상당히 장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173년에는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히미코의 도착 기록은 뭔가 연대가 부정확한 삼국사기와 고대 일본사를 비교적 연대가 정확한 중국 사서(삼국지 위지 동이전)와 교차검증할 수 있는 부분인데, 삼국사기의 이 기록과 70여년의 간극이 있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위나라 조예에게 조공한 히미코의 기록이 만약 둘 다 정확하다면,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히미코는 이제 막 즉위한 어린 여왕이었고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시기에는 늙은 할머니 여왕이었을 듯 하다. 다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사건 자체는 사실이더라도 일어난 연대는 부정확한 것이 많다고 보는 편이라, 히미코의 재위기간 전후로 좀 다를 수는 있다.

또한 천재지변 기록도 선대 왕들 때처럼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일식, 기근, 등등.

그는 키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두툼하고 커서 범상치 않은 형상이었다고 한다.말단비대증? 일단 잘 먹고 큰 왕족인데다 고대의 왕은 무예와 전쟁 지휘력도 갈고 닦아야 했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인들보다는 키가 클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 외에,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아달라 이사금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에는 174년부터 아달라 이사금이 사망하는 184년까지의 기록이 텅 비어있는데, 이후 탈해 이사금의 손자, 즉 박씨가 아닌 석씨인 벌휴가 벌휴 이사금이 되는 것, 이후 박씨가 왕권을 승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신라 내부에서 상당한 권력 투쟁 및 국내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왕후인 내례부인이 벌휴 이사금의 둘째아들의 아이(10대, 내해 이사금)를 낳았다는 기록을 보자면 막장(...). 내례부인은 지마 이사금로, 아달라 이사금의 조카가 된다. 아달라 이사금은 이전과 이후의 사례를 비추어보면 지마 이사금의 사위라는 신분도 왕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내례부인과 아달라이사금 사이에 금이 갔고 이후 내례부인이 석씨 일문과 손 잡은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들이 없다고 했는데 정작 수백 년 뒤에 다시 등장한 박씨 왕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직손이라고 써 있는데 삼국사기 같은 책 안에서도 초반과 후반의 말이 다르다. 이것도 당시에 무언가 문제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정리해서 말하면 신덕왕이 아달라왕의 적자의 후손이 아니고, 서자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전근대시대에 서자는 아들로 안 치는 문화도 있었기 때문. 그러나 신라는 왕감이 없으면 시밎어 여자까지 데려와서 여왕을 앉힐 정도로 한국사 다른 왕조보다 '이어지는 혈통'을 더 중요시했던 측면도 있어 좀 복잡하다.

죽은 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에 묻혔는데, 원래 아달라 이사금 한 사람만 묻혀있던 무덤이었지만 칠백 년 뒤 부활한 박씨 왕 후손들이 죽은 뒤 아달라의 바로 옆에 묻혔다. 그래서 3릉(三陵)이 됐고, 나머지 한 명 경애왕릉도 바로 근처에 있다.

3 그 외

아달라 이사금 때 등장한 구도(仇道)란 인물은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도는 김알지의 5대손이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다. 구도는 파진찬이 되어서, 김씨로는 처음으로 미추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발판을 다진 인물이다. 이름이 외설적이기로 유명하다. 성은 박이요 이름은 아달라 반대 의미(?)인 지마 이사금의 이름과도 엮인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二月 아달라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계원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四年春二月 감물과 마산의 두 현을 설치하다
四年春三月 장령진에 순행하다
五年春三月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七年夏四月 알천의 물이 넘치다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九年 사도성에 순행하다
十一年春二月 용이 서울에 나타나다
十二年冬十月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 백제로 망명하다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秋八月 군대를 보내니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十五年夏四月 흥선을 이찬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시조묘를 중수하다
十七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十七年冬十月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十八年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다
十九年春一月 구도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를 일길찬으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시조묘에 병고가 생기고 전염병이 돌다
二十年夏五月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다
二十一年春一月 흙비가 내리다
二十一年春二月 우물이 마르다
三十一年春三月 왕이 죽다

대체적으로 백제와의 전쟁과 각종 자연재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역을 순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재위 22년부터 죽을 때까지의 10년 동안의 기사가 없다. 아달라 이사금부터 삼국사기 제2권이 시작된다.
  1. 다른 가문과 혼인하면 부인 가문으로 힘이 분산되므로. 삼국시대 ~ 고려 초기는 이렇게 권력 분산을 막기 위한 근친혼이 자주 있었다.
  2. 당장 신덕왕이 바로 전 왕인 효공왕의 사위임을 생각하자.
  3.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파견한 흥선의 2만 군세와 아달라 자신이 직접 이끈 기병 8천이었다고 하는데, 아직 경상도 안에서도 낙동강 동쪽 일부 지역만 지배하던 당대 신라의 국력으로 단독으로 8천 기병대를 모집했다고 보긴 힘들다. 원래 8백 정도인데 과장했다거나, 그냥 왕의 직속 정예군을 뭉뚱그려서(아니면 비유적으로) 기록한 걸 김부식이 그대로 적은 게 아니냐는 말이 많은데, 실제로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들은 이런 식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백이나 모순이 심해 신뢰성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