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達
(? ~ 590)
목차
1 개요
고구려의 장수로, 봉성 온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정사에 기록된, '바보'의 대명사처럼 유명한 인물.[2]
평원왕의 사위로, 그의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로 영양왕 대에 까지 활약하였다.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온달 설화의 주인공이며,[3] 그야말로 여자 잘 만나 인생 확 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4]
2 생애
2.1 초기
온달은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 생김새가 우스울 정도로 못생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천성이 밝고 똑똑했다고 한다.엥?
온달은 어릴적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가 두 눈이 멀어 일을 하지 못하였고, 집안이 가난하여 달리 먹고 살 길이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며 먹고 살았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나중에 평강공주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온달이 추레하고 남루한 꼴로 매일 비럭질을 하고 다니다 보니(…)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평양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보라고 불린 것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5] '온달은 가난해서 산을 뒤져서 먹고 살았는데, 귀한 약재를 발견해도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의 형편을 감안해 그냥 주거나 적은 대가만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보라고 불렀는데, 온달은 별 말 하지 않고 웃어넘겨 더욱 바보 취급을 당했다.' 는 설.
어쨌거나 모습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행동 때문에 바보로 불렸든, 실제로 흔히 말하는 바보(=저능아)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바보가 글이나 무예를 깨우쳐 전쟁영웅이 되기는 어려웠을 테니. 그래도 평양 백성들 뿐만이 아니라 국왕까지 바보 온달의 명성을 듣고 딸에게 말했을 정도니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바보 취급을 받았던 모양이다(...).
2.2 평강공주와 만나다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평원왕에게는 평강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평강공주는 어릴적부터 자주 울었는데, 그럴때마다 평원왕은 "너는 너무 잘 울어서 시끄러우니 사대부들에게는 시집 못 보내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는걸?" 하고 우스개소리를 하며 놀렸다고 한다.[6]귀엽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딸을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아버님이 옛날에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으니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고 말하였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으나 평강공주는 "왕은 실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평원왕은 크게 실망하였고, 화가 난 나머지 평강공주를 궁 밖으로 나가버리라고 꾸짖었다. 당장 나가! 그러자 평강공주도 독이 올랐는지 금팔찌와 패물을 챙겨서 궁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챙길 건 챙겨 나가는 영특함
평강공주는 그 길로 온달의 움막집을 찾아가서, 온달의 어머니에게 대뜸 절하고는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때 온달은 배가 고파서 산에 올라가 느릅나무 껍데기를 벗겨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평강공주가 산 위로 올라와 온달에게 청혼하였다. 온달은 처음에는 영문도 몰라 귀신에 홀렸다고 생각하고 거절했지만 이후 그녀의 진심을 알고는 결혼한다.
평강공주는 궁 밖으로 나오면서 가져온 예물을 팔아서 집과 땅, 노비를 구입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중고차 비루 먹은 말을 사와서는 열심히 길러 훌륭한 말로 키웠다. 어느정도 먹고 살만해진 온달은 고구려에서 매년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2.3 왕의 사위가 되다
당시에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마다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이때 산짐승의 고기로 하늘과 선천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평원왕과 여러 신료들, 5부(五部)의 병사들까지 모두 참석하였다.[7]
온달은 평강공주가 사와서 잘 기른 말을 타고 대회에 나갔는데, 수많은 짐승을 때려잡으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평원왕은 대회에서 우승한 온달을 불러 그 이름을 듣고는 크게 놀랐으나, 아직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온달: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평원왕: 누가 니 아버님이래!!
이후에 중국 후주의 무제[8]가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는데, 평원왕 역시 군사를 이끌고 이산(肄山)[9]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이때에도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선봉에 서서 수십 명의 적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온달이 맹렬한 기세로 앞장서서 적을 무찌르자 뒤따르던 군사들도 사기가 올라 후주군을 공격하니, 결국 고구려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에 평원왕이 사람들을 모아 전공을 평가하는데, 참전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평하였다. 이에 평원왕은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기뻐하였다. 평원왕은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이하였으며, 대형(大兄) 벼슬을 내렸다. 이후로 온달은 평원왕의 총애를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위엄과 권세가 대단해졌다고 한다.
2.4 최후
이후 590년, 평원왕이 승하하자 그의 아들인 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10] 이때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한 출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여 영양왕의 수락을 얻었다.
온달은 출전하기에 앞서 "죽령 이서(以西)[11] 땅을 되찾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신라 정벌에 나서다가 그는 격전 끝에 신라군의 화살을 맞아 아차산성[12]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후 기록이 없어서 결국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되찾지 못했다고 추정되었으나 연개소문이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땅을 '수나라와 전쟁할 때 신라가 죽령 이북의 땅을 뺏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온달이 사망한 590년에서 수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난 598년, 612-614년 사이에 고구려가 죽령 이북의 땅을 회복했다는 말이 된다.
이후에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하는데 시신을 담은 관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생과 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으며 한편 온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크게 애통해하였다.
어쨌든 이로 인해 고구려의 대 신라 감정이 더 좋지 않게 되면서[13] 이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계속 대 신라 협공을 한다.
3 의문점
3.1 결혼과 출생
평강공주가 유력한 귀족과 결혼하지 않고 하필이면 비천한 신분의 온달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평원왕이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내놓은 술책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평강공주의 가출이 집안 문제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에도 이런 결혼은 막장드라마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일. 말하자면 재벌 외동딸이 노숙자와 결혼한다는 식인데, 엄격한 신분제였던 고대에 당시 저런 식의 결혼이 가능했을 법하지는 않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보잘것 없던 하급 귀족이었던 온달이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훈을 세워서 부마가 되었다고 보고 이때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았는데, 이것은 신당서에 나타난 고구려 12관등 중 6등급의 해당하는 관직이므로, 이렇게 대단한 전공을 세우고 이 정도밖에 못받았다는 것은 온달이 하급 귀족이라는 유력한 증거. 만약 귀족이 아니었다면 고구려 사회에서는 대형 관직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므로, 하급 귀족이나 몰락한 귀족의 자손 정도는 될 것이다.
이렇게 등급은 낮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평원왕의 총애를 받고 부마가 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고구려의 고급 귀족들이 이를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뒤에서 비꼬면서 바보 온달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당시 평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결탁했는데, 이들은 기존에 권력을 장악한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하급 귀족들 출신들일 수밖에 없었고, 온달도 그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단순히 출신이 미천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들과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관직을 받고 부마가 되었을 온달이 기존 세력들의 눈에 곱게 보였을 리가 없을 것이다.
3.2 온달이 전사한 곳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온달이 영양왕에게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자 출정하면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다시 찾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떠나 아단성(아차성)에서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온달이 전사한 장소가 문제인데, 서울특별시 아차산의 아차산성과 충청북도 단양군의 온달산성이 서로 온달과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이 두 장소 중에서 서울 아차산 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병도와 정약용으로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울은 온달이 되찾아오겠다던 죽령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겨우 18km 북쪽에 위치한 단양군 온달산성이 맞다는 설이 대립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고 문헌상으로도 광개토대왕 당시 아신왕을 털어버릴 때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미추홀(인천)과 아단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압박하다가 근성의백제 아신왕이 계속 저항하려 하자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 위례성이 함락 했다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아차산성 쪽이 유력하다[14]. 다만 지자체들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확실하지는 않다' 정도지만.
4 그 외에
연세대학교 지배선 교수(역사 문화학)에 의하면 온달은 사마르칸트 사람이라는 학설을 발표했는데 그도 그럴만한게 투바공화국쪽이랑 서아시아(사마르칸트쪽)에서 온달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있고 당시 사마르칸트왕의 성이 온溫씨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온달은 바보같이 생겼다는 말을 보면 우리와는 피부색, 얼굴모양이 완전히 다른 사마르칸트쪽 보다는 투바공화국이나 그 부근에서 온 사람이란게 더 맞는것 같다. 그럼 김수로를 잇는 두번째 국제결혼인가..
월악산에 가면 지름 1m의 돌이 있는데, 온달이 그 돌로 공기놀이를 했다는 전설이 있다. 흠좀무. 돌이 아니라 바위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인다. 즉, 잘난 여자가 자신을 빛내줄 거라 믿는 남자들을 빗대어 바보 온달 컴플렉스라 하는 것.
개그 콘서트의 코너 사마귀 유치원에 등장하는 쌍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낮에는 바보였지만 밤에는 바보가 아니었다고 한다(…).낮져밤이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하는 아차산성에서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이 세워져 당시의 전투를 기리고 있다. 또한 당시 고구려군이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 돌로 지은 전초기지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고구려 관련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상하게 드라마화가 안되는 인물, 여러모로 사극에 어울리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 평민에서 귀족으로 레벨업, 비극적인 죽음) 드라마화가 안되고 있다. 드라마의 주 소비층인 여성들에겐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출세시키는' 스토리는 성적 환타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극화만 되지않았지. 온달설화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는 여러편 있었으며 개중에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도 있다. 반대로 라이트 노벨 소재로 삼으면 괜찮을 듯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KBS에서 천추태후의 후속작으로 온달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을 기획 중이었으나 천추태후가 신나게 말아드시는 바람에 후속작은 다른 드라마가 꿰찼다. 천추태후 대신 온달을 했으면 온달을 말아먹었을라나
이외 사극이 아는 현대극에서는 온달왕자들과 내조의 여왕이 온달 설화에서 이름과 모티브를 따왔다. 물론 이중에서 온달왕자들은 임성한식 막장드라마라는게 함정
김은정의 만화 아스피린에서는 온달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동명의 캐릭터 온달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상의 실존인물인 온달과 비교하자면 심히 고인드립에 가까울 정도의 막장 캐릭터이다.
최인훈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실은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부관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혼령이 되어 나타나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평강공주에게 호소한다. 근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평강공주도 흑막에게 살해당한다(…). 틀렸어 이젠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디아블로 2에서는 '온달의 지혜'라는 이름의 유니크 스테프가 나온다. 그 온달이 온달인지는 모르나, '온달의 사랑' 헬멧[15]이나 '단군의 가르침'[16], '태백의 영광'[17], '해모수의 강직'[18] 같은 아이템들을 보아, 블리자드에서 노린 것으로 보인다[19]
레진코믹스의 웹툰 나에게 온 달에서는 평강의 환생을 찾아 현대까지 살아 있다는 설정이다. 만화 신암행어사에서는 질병의 고통에 시달린 평강의 도피처로 만들어진 상상속의 존재로 본다. 다만 작가는 평강과 온달이 아주 행복했을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메가드라이브 게임 '공작왕 2'가 국내정발될 때 온달장군으로 현지화가 되었다.
- ↑ 실제 백괴사전에서는 반달을 온달로 부른다.
- ↑ 물론 후술하겠지만 진짜 말 그대로 바보(=저능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 ↑ 온달이야기는 정사인 삼국사기에 온달열전으로 수록된 이야기로 완전한 전래동화나 설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 ↑ 이 때문에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성 버전인 온달 컴플렉스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다만 전자에 비해 잘 쓰이진 않는다.
- ↑ 북한 쪽 해석이라고 한다.
- ↑ 짓궂은 아버지가 어린 자식이 울 때 옆에서 놀리는 건, 왕족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 ↑ 즉 나라의 주요 지배층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는 뜻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던 것 같다.
- ↑ 정황상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일한 시기.
- ↑ 배산(拜山)이라고도 한다.
- ↑ 온달에게는 처남이 된다.
- ↑ 사실상 이 지역은 죽령 이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기에, 죽령 이북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 ↑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는 아단성(阿旦城)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이보다 얼마 전에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백제)을 잃은 백제를 생각해보자.
- ↑ 단양이 아단성이라면 광개토대왕은 인천에서 바로 단양을 점령하고 송파구에 있는 백제왕을 압박하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송파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뒤죽박죽인 동선이 나온다.
- ↑ 딱 삼국시대 왕관이다
- ↑ 유니크 메이스
- ↑ 앞에 괴물 얼굴이 새겨져 있는 유니크 워드
- ↑ 삼국시대풍 갑옷
- ↑ 저 유니크 4개가 한 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