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기에 앞서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사항을 적는다.
- "전통" 중국무술과 세련된 현대무술은 제대로된 비교대상이 아니다. 중국무술은 어디까지나 과거 스포츠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발전된 무술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 과거 전통무술들은 모두 투로 위주의 훈련을 했다. 스포츠과학과 의학의 한계로 부상을 치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라테 같은 무술에도 "카타"라고 하는 투로위주 훈련이 남아있고,[1] 유도도 원래는 본이라고 하여 그 흔적이 남아있다. 중국무술만의 특징이 아니다.
- 복싱, 유도, 가라데 등 과거에 개발되었으나, 현대에 와서 실전성이 인정받은 무술들은 한번에 대격변을 겪었다. 스포츠과학, 안면타격을 가능케 하는 훈련도구, 다른 무술과의 교류 등을 겪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존에 성공했다.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자. 전통권의 기술적 쇠퇴
2 전통 무술의 변화
중국무술이 열등하다고 까이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무술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과거에는 훈련시 부상의 위험, 갑옷 등의 존재로 인해 현대의 세련된 무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실상 인간은 도구를 활용하게끔 진화하였고, 맨손으로 싸우는 상황이 그리 많지 않으며 수렵과 전쟁에서조차 냉병기를 사용하여 백병전을 펼쳤으므로 현대 복싱의 세련된 타격기가 발전할 수 없었다. 그나마 무에타이, 근대 복싱처럼 도박이나 스포츠로써 발전한 무술이 있지만, 애시당초 도구를 쓰고 싸우는 것이 더 유리하므로 이들 맨손무술이 전장을 지배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중국권법으로 대표되는 전통무술은 한가지 특징을 가진다. 바로 타격기와 유술기의 병행이다.
우선 중-근대 맨손 무술에서는 안면 타격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는 맨손의 특성상 얼굴을 타격할때 자신의 손만 다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권투글러브 참조) 그렇기에 맨손 무술에선 '앞 손'을 내밀어 가까이 오는 것을 견제하거나 잡아 넘어뜨리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모습이다.
권투의 전신이었던 베어너클은 여러 가지로 중국권법과 비슷했다. 앞 손을 내밀어 견제한 것도 비슷했고 붙으면 던지는 것도 비슷하다. 던지기를 대비해 자세는 낮게 잡았고 얼굴을 때릴 땐 종권을 쓰는 둥 여러 가지로 남권과 비슷했다. 하지만 규칙의 도입과 글러브의 발명으로 서로의 명암은 갈라졌다. 앞 손을 치고 막는데 급급했던 중국권법과 달리 권투는 좀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때리는 데 집중하였다. 던지기는 반칙이었음으로 얼마든지 클린치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세는 점점 높아졌고 스텝은 빨라졌다. 즉, 변수의 제한이 기술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또 유술기와 타격기가 병행되면서 거리는 유술과 타격기가 가능한 애매한 거리, 중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이런 맨손 도수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으면 중국권법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전통 무술에서 상대방을 향해 길게 내민 앞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이다. 상대가 나에게 무작정 다가오면 내 앞 손이 상대를 밀어대고 억지로 들어온다고 해도 대기하고 있는 뒷손이 날라온다. 즉, 앞 손은 상대방을 더 이상 다가오지 않게 하는 견제기이자 방어기인 셈이다. 이런 중-근대 무술의 배경 속에서 중국무술은 해결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 방법은 바로 추수. 상대방이 내민 손을 타고 들어가 손을 묶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원래는 중국의 무기술에서 서로의 검을 맞대 상대의 검을 봉쇄하고 움직임을 예측하는 방법이었다. 무기술의 이론을 바탕으로 격투기를 고안했기 때문에 중국권법이 이렇게 된 것이다.
힘의 강약을 읽는 청경, 힘을 부드럽게 받아치는 화경 등이 중국에서 말하는 개념이 이런 추수 속에서 생긴 것이다. 추수의 발전에 따라 수많은 개념과 기술이 발전하였고 (당랑권의 눈 찌르기, 영춘권의 치사오, 오키나와 테(!)의 토리테까지) 그 방법 또한 다양해졌다. 우리가 비실전이라 느끼는 스탠딩 유술이나 영화에서나 쓴다던 파링(!) 또한 추수를 염두한 기술(아래 영상 참조)이다. 단순히 시범용이 아니다! 중국권법과 중-근대 권법이 쓸데 없이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공통된 인식(앞 손의 견제와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18분 참조
위 영상은 중국권법과 현대 무술이 가진 인식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알려주는 영상이다. 그냥 쳐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극진공수도와 당연히 손과 손을 맞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극권의 인식 차를 보여주고 있다.
공수도의 초창기에는 중국무술처럼 투로(카타)에 얽매여 실질적인 격투훈련은 자제되었다. 현대에도 전통 공수도 계열은 슨도메, 즉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입히지 않는 자유대련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극진공수도를 위시한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현대식 세련된 격투기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극진공수도 역시 맨손을 고수하기 때문에 수기 안면타격을 금지하는 풀컨택트룰을 채택하고 있다.
극진공수도처럼 중-근대 권법은 안전한 도구와 규칙이 발달하면서 변화했다. 복싱은 권투 글러브를 통해 안면타격이 주는 위협성을 절실히 느꼈고, 레슬링은 보다 효율적인 던지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기술 전개 자체를 바꾸었다. 중국권법같은 손을 얽는 추수는 먼 거리에서 주먹을 휘둘르거나(복싱) 아니면 완전히 몸을 밀착시킨 채 던지는(레슬링)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유술 역시 유도로 대표되는 현대식 무술로 탈바꿈되면서 타격기가 삭제되었다. 이렇게 기술을 한정시키자 각 스포츠는 각자의 규칙 내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발전시켰고 타격과 유술기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중국권법과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는 진화를 하게 되었다. 즉, 안정성을 담보로 하는 스포츠의 현저한 발전에 중국권법이 뒤떨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가 뭐냐 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이 만약 무술을 자기 생의 업으로 삼겠다 결심하고 노력할 경우 이렇게 따로따로 발전한 타격기와 유술기에 아직도 꽤 효용성이 있는 병기술까지 함께 배워 준 프로급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도 그 과정이 딱히 어려울 게 없다는 점이다.[2][3] 결국 중국권법은 격투 환경이 바뀜에 따라 몰락하게 된 셈이다.
3 중국권법의 특징과 개념들
3.1 단전, 기, 내공
스포츠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시대에선 무술가들은 자신의 경험과 당대의 주술적인 유사과학에 의존해서 개념을 정립시켜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단전과 기다. 흔히 중국무술 영화를 보면 단전에 집중을 하라는 대사를 들을 수 있다. 이때 단전은 코어 머슬을 의미한다. 중국무술에선 이걸 내공을 기른다고 하는데 이때 말하는 기나 내공은 말 그대로 비유에 불과하다. 옛날 과학이 발전하지 않던 시절 선인들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해야 했지만, 구체적인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고 과학적 방법론이 없던 시절이기에 자신들이 알던 개념, 기나 내공이라는 식으로 전달한 것 뿐이다.
기마자세와 참장공은 이것을 위한 자세다. 적당히 다리를 벌려 척추를 바로 세우는 자세를 취하면 코어머슬 생성에 도움이 된다. 현대 보디빌딩에서도 기마자세에서 벽을 밀면 코어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개념화되지 못한 단전의 개념을 서양에선 코어머슬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한편, 동양에서는 이 코어운동을 정립화하는 신체이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아운카이(Aunkai)이다.
아운카이는 야쿠자와 미노루가 만들어낸 운동으로 가라테와 중국무술 산타를 연마하던 야쿠자와가 고류 무술인에게 패배한 후 그에게서 배운 신체 운용법을 재정립한 것을 의미한다. 골반의 이완과 신체의 정립을 주장하는 그의 신체 운용법은 중국무술의 신체운용을 간소화시켰다는 평을 얻고 있으며 국내외에 많은 무술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동작을 보면 참장이나 마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또한 코어를 꼬았다가 푸는 모습은 흔히들 중국에서 말하는 발경에 가까우며 이를 통해 전근대 무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2 단련 방식
웨이트의 필수 도구인 바벨과 덤벨은 발명된지 200년도 안된다[4]. 과거의 열악한 스포츠과학은 신체단련에서도 한계를 드러낸다. 과거 유럽에선 우수한 전사는 어릴적부터 황소나 바위를 들어올리며 수련했다. 중국에서는 10~20kg짜리 돌을 던지고 받는 석쇄공이란 운동을 개발했다.
오키나와 테 항목 참고.
중국과 유럽은 신체단련의 개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유럽은 돌이나 황소 등을 들어올리는 고립식 운동 중심으로, 중국은 석쇄공같이 신체 반사신경과 순발력 중심으로 훈련했다.
3.3 비밀주의와 실전기피
과거 문파들은 상당한 비밀주의였다. 유럽, 일본, 중국 모두 무술이 전쟁의 도구로서 기능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무술은 밥줄이였고 비밀이 누설된다는 것은 곧 밥줄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야규신음류의 비전은 발바닥에 삼각형을 그려 발중심에 중심을 싣는 방식이었다. 허무한가? 하지만 원래 비전은 허무하다. 소림 72예를 봐도 현대 트레이닝과 비슷한게 많다. 무술의 비급이라는 것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이런게 밥줄이었다.
현대에는 이런 비밀주의, 신비주의가 많이 타파되었다. 현대에서 무술 및 격투기는 스포츠로서 받아들여진다. 영상매체의 발달로 연구하고 분석하여 충분히 연습이 된 상태에서 링에 오른다. 경기에서 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재기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군대나 경찰에서 무술을 사용하기는 하나 냉병기가 주를 이루는 옛날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열병기의 보조나 특수한 상황을 상정하기 때문에 비밀주의가 엄수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비밀주의의 대두
고대 이후 중세의 서양세계는 상당 기간 동안 무인들이 주도하던 난장판시대였던 만큼 군사학 및 병기술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 무술의 진화과정은 상세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맨손무술은 물론 군용무술인 병기술과 마상무예, 군대의 포진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하고 어떤 싸움방법을 택했는지 등에 대한 자료는 무려 고대로까지 추적이 된다. "4천년 역사"운운하는 중국무술이 실제 자료가 거의 남아있는게 없는 것과는 달리, 서양의 무술은 실제로 족히 2천년 전 고전기 그리스, 로마시대까지 사료가 남아있기 때문.
반면, 중국의 전통무술의 경우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전까지는 어떻게 발전해왔고 전승되어왔는지에 대한 기록[6]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19세기 동안 약 100년 전후의 기간 내에 일제히 역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곧 청나라 말에 해당된다.
청나라 말로 접어들어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향촌질서와 경제가 붕괴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지방 호족이나 향리 등 신분으로 큰 어려움없이 생활해올 수 있었던 사회계층, 계급의 수입 및 생활이 불안정해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는데, 소위 "무술가"들이 죄다 그 계층에 속해있었다.
이렇게 수입이 끊긴 무술가들은 달리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보니, 기존에는 엄격한 일자전승의 원칙 아래 비밀리에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내려오던 것을 밑천 삼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대가로 교습비나 재물을 취하게 되었는데, 쉽게 말해 먹고 살길 막막해진 무술인들이 일제히 도장을 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에도 막부 들어와서 먹고 살길 막막해진 사무라이들이 검술도장을 일제히 개업한 것과 동류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기존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무술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이면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당시의 도장/문파 시스템은 오늘날처럼 "돈을 주고 배운다"는 것과는 많이 달랐으며, 하나의 문파의 일원이 되면 사실상 도제관계의 형태로 그 문파의 질서 아래 완전히 종속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장문인, 도장주 및 사범들은 교습만을 하는 전업 무술인이었으며, 그 아래 학생들은 생업과 무술단련을 겸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무술은 말 그대로 밥줄이었다. 이전까지는 가전으로 극소수에만 전승되었던 무술은 이 시대에 이르러 일종의 상업적 도제관계의 일환으로 변하게 된다. 이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어째서 그 시기에 소위 전설적 고수들이 한꺼번에 출몰하였는지 또한 자연히 이해가 된다.
팔극권의 이서문, 형의권의 곽운심과 상운상, 홍가권의 황비홍, 연청권의 곽원갑, 태극권의 양로선, 팔괘장의 동해천, 영춘권의 엽문 등등등... 오늘날 알려진 유명한 유파들은 전부 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고수의 전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고수들이 실제로 강했는지와는 전혀 별개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떠한 경로든 무술을 익힌 후에 먹고 살길을 찾아 자기 두 주먹만 갖고 세상에 나와 떠돌며 이런저런 일화를 남기며 출세를 꿈꿨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먹고 살길 막막해진 혼란한 중국의 사회상에서 무술인들은 무술교습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게 되었고, 그렇게 무술을 배운 사람들은 사회 각지로 퍼져나가 그 무술을 내세워 출세를 꿈꿨다. 일반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면 부유한 신흥계급에게 고용되어 후원을 받으며 개인 교습자가 되거나, 야심찬 군벌들에게 고용되어 훈련교관이 되거나, 특출한 재주를 높이 사서 황궁의 관리가 되는 등의 출세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 문파의 도장을 세우게 되든, 아니면 부유한 후원자를 얻든, 일단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주된 수입원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자신과 똑같은 출세를 노리는 다른 쟁쟁한 무술가와 대결하여 패하는 것"이다. 즉, 혼란한 사회상에서 도장 깨기는 부와 명성을 노리는 무술가에게는 입신의 길이었으며, 이미 그러한 것을 얻은 무술가들에게는 패망의 길이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19세기 전후로 일제히 출몰했으니 그만큼 상호교류의 기회가 늘어 중국무술의 실전성이 서로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절절히 깨닫고 오히려 강화되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생계의 수단으로 도장/문파 시스템 아래 놓이게 된 만큼 기존보다 대량의 인원에 교습을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정예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던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열화되었다. 투로와 형에만 집중하는 교습법은 여러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 2. 오래 동안 가르칠수록 수입이 오래 동안 보장되는 셈이니 기술의 습득 속도는 점점 느려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고의적으로 매우 한정된 기술을 매우 천천히 가르치는 교습자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 4. 전통무술이라고 해도 무술인 만큼 당연히 본래는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술간의 상호교류와 공개적인 대련에서의 승패는 해당 문파의 체면에 크게 관계되어 있으며, 이렇게 체면이 손상되는 경우 그것이 생계곤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상호간의 우열을 가리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는 것이 무술가들 사이의 암묵적 협약이 되어갔다. 어떤 식으로든 공개적 대결과 교류는 엄격히 금하며,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경우 철저하게 비공개의 합의로 이루어졌으며, 혹시나 체면이 손상되거나 악소문이 퍼지는 경우 대상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식으로 운영되었는데, 딱 듣기만 해도 알겠지만 그야말로 조폭과 크게 다를 바 없다.
- 5. 이런 상황에서 신비주의와 허풍이 하나의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자기 문파의 권사들의 활약은 크게 부풀려져 풍문으로 떠돌게 되었고, 그렇게 동시대에 수 많은 고수들의 이야기가 나돌게 되었음에도 정작 그 고수들은 서로 우열을 가린 경우가 한 번도 없다. 유명한 전설적 권사들끼리의 대결의 사례는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드물며, 대체로 전해지는 얘기들도 "서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우열을 가린 후 헤어졌다"는 식으로만 전해진다. 소위
네임드'전설적인 권사'들로 전해지는 사람들이 직접 맞붙은 거의 유일한 케이스가 바로 태극권의 양로선과 팔괘장의 동해천 사이의 결투인데,당연하게도그 전말은 알려진 바 없다. "몇일을 싸워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라고만 서술될 뿐.
- 5. 이런 상황에서 신비주의와 허풍이 하나의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자기 문파의 권사들의 활약은 크게 부풀려져 풍문으로 떠돌게 되었고, 그렇게 동시대에 수 많은 고수들의 이야기가 나돌게 되었음에도 정작 그 고수들은 서로 우열을 가린 경우가 한 번도 없다. 유명한 전설적 권사들끼리의 대결의 사례는 실제로 어마어마하게 드물며, 대체로 전해지는 얘기들도 "서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우열을 가린 후 헤어졌다"는 식으로만 전해진다. 소위
■ 실전성의 상실 과정
결국 어떤 무술이든 그 실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 실전을 많이 뛰는 것이다. 그러한 실전 속에서 어떤 요결이 통하고, 어떤 것은 이상에 불과한지, 어떤 것이 맘먹은대로 되고, 어떤 것은 안되는지를 검증해볼 수 있으며, 상호간의 교류와 대련, 대결을 통해서만 그것이 드러난다.
오늘날 종합격투기는 공개적인 이종격투기를 통해 실제로 각 무술가들이 서로 맞붙어서 우열을 가린 위에서 성립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보자. 자존심을 건 실전 속에서 우열을 가린 결과 어떤 것이 실전에서 정말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었고, 맨손격투의 보편적 진실에 관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출발한 이종격투도 점차 서로 닮아가면서 종합격투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룰을 도입하고 가능한한 실전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는 프로격투시합이 등장하면서 무술가들은 그야말로 수 많은 실전 경험을 쌓게 되었으니 강할 수 밖에 없다. 전통무술을 가르치는 사범이나, 심지어는 그 문파의 장문인에 해당하는 사람 보다도 평범한 프로격투선수가 훨씬 더 많은 실전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배운 무술을 가르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과, "배운 무술을 시합에 써서 계속 이겨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애초에 경험치의 측면에서 비교가 안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중국무술의 비밀주의는 결국 무술이 생계의 수단이 되면서 발생한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스포츠화'된 무술도 비슷하게 받는 비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무술의 대표적인 예인 태권도의 경우에는 적어도 시합의 빈도와 규모가 소위 '전통무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실전성에서는 유리되었으나, "태권도 고유의 룰 아래 뛰는 실전" (= 태권도 시합)이라는 측면에서는 엄청나게 전문적으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비교하여 "해당 무술 고유의 룰 아래 뛰는 실전"이라고 가정한다쳐도 중국무술은 대체로 해당 교육시스템 내에 실전 대련의 빈도가 여전히 매우 낮은 편이 큰 문제다.
"실전에서 강하다"라는 것이 최고의 세일즈포인트인 상품에 있어서는 그 사실을 매 순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러한 상품의 판매자에게 있어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길 수 있는 강자는 없다. 그러나 결국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패배하는 순간 '최강'을 내세운 상품은 그대로 붕괴한다. 결국 무술의 실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검증의 절차"를 폐기하는데 여러 중국무술인들이 암묵적 합의를 한 순간 중국 무술에서 실전성이 거세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대충 17세기 말에 이미 그런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말이면 이미 세간에 자리잡은 유명 문파 사이에서 공개적인 시합 및 상호교류가 거의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간주 된다.
■ 형(形)과 투로(鬪路)에 대한 의문
이것은 중국무술 연구자들에게도 큰 딜레마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오늘날 중국무술의 "실전용법"이라는 것을 정확히 해설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부분 전통무술에서 특징적인 각 문파의 고유의 투로나 형은 하나의 기초훈련으로써의 모습이 매우 명백하다. 실전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비실용적인 자세 및 기법이 많은데, 오히려 훈련용으로 보자면 오늘날처럼 매뉴얼이나 교범이 없었던 시절에 무술을 하기 위한 '몸만들기'로서는 매우 훌륭한 방법이라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 즉, 중국권법의 각종 기묘한 형과 투로를 정확하고 이상적으로 깔끔하게 표연할 실력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 무술을 익히기 위한 기초적인 근력, 체력, 머슬메모리(muscle memory), 기법의 숙련 등을 갖추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럭저럭 교육의 일환으로서 형과 투로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형과 투로 이외에 실전을 위해 어떤 방식의 교육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무하다. 해당 문파의 일부만이 습득하여 비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절초니 오의니 하는 것들이 있겠으나, 실전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가 훨씬 중요한데, 그러한 예시로 등장하는 각종 시연이나 표연에 등장하는 중국무술의 용법은 실전적이라기 보다는 그 무술 고유 형태의 이상화된 표현이라고 보는게 더 적절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 대부분의 실전지향 무술에서는 스탠딩 유술은 퇴출되었다. 선 상태에서의 몸싸움은 매우 간단하고,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발휘되어 효율이 높다고 평가되는 레슬링 및 유도 기법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묘한 보법을 취한 자세에서 상대의 이쪽 손을 어떻게 붙잡고 저쪽 손은 이렇게 붙잡아 무슨 방향으로 기를 흘려넣으며 메친다... 느니 하는 용법은 실전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거의 반 세기는 넘었다. 그러나, 실전용법을 시연하는 중국무술 관련 영상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리 중국무술과 현대무술의 사상이 다르다고 할지언정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는 속도가 요즘이 예전보다 더 빨랐을리도 없지 않은가? 이리저리 공격하고 피하기 위해서는 투로나 형에서나 쓰는 신체단련용(= 과장되리만치 하체에 부담을 크게 주는 자세) 보법을 쓰는 것은 말도 안되고, 보고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주먹과 발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걸 잡아내어 이리 꺾고 저리 젖히는 식의 스탠딩 유술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과연 중국의 옛 무술가들은 몰랐을까?
과연, 각종 일화에서 실제로도 매우 강했다고 일컬어지는 각 문파의 고수들은 우리가 만화나 게임에서 보는 것처럼, 그 무술의 단련에서 사용하는 투로나 형의 동작을 그대로 사용하며 무술을 했을까, 아니면 실제로 싸울 때에는 (요즘 우슈, 산타가 보이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자세를 좀 더 높게 잡고 움직이며 싸웠을까? 당랑권의 고수는 실제로 땅바닥에 붙을만큼 낮은 허보를 취하며 당랑수를 취하여 싸웠을까? 투로와 형은 그 무술이 지향하는 이상의 표현 및 신체단련의 방법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실제로 그 안에 맨손격투의 요령이 담겨 있는 것일까?[7]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정확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지금은 없는 무술잡지 <마르스>의 한병기씨가 투고한 "중국무술 고유의 간합"에 대한 이론을 한국의 수련자들과 연구자, 매니아들은 정설로 여기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중국무술은 입식타격기가 아니라 중거리에서의 타격기-유술기 하이브리드형 무술이라는 이 이론도 사실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즉, 전문 연구자들도 "대체 중국무술로 어떻게 실전을 뛰어야 하며, 정말로 강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옛 무술가들은 어떤 식으로 실제로 싸웠나?"라는 질문은 지금도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각 무술이 역사에 등장하고, 나름의 일화를 남긴 이후에 오늘날까지의 전승의 과정에서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게 누락되어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4 현대의 중국무술
4.1 도장 등록 가격
도장에서 수련하는데 당연히 돈이 든다.
예전에 한국의 무술계는 온갖 사기꾼들과 별종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전통이 있는 것이라곤 택견 정도 밖에 없었고 이 마저도 전통을 세우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작무술을 전통무술이라고 하거나 다른 무술을 배워 자기가 만들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중국무술도 별반 다른게 아니라서 온갖 권법들이 판치던 세상이었다. 특히, 중국권법의 신비감을 이용해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식의 사기를 치곤 했고 이는 사이비 무술가를 양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번에 몇 십만원을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사기가 통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술의 기틀을 잡기 위해 많은 무술인들이 노력했고 이제는 이런 것도 거의 사라졌다. 해외로 나가 직접 중국무술을 배우는 한편 해외에 사범들을 초청해 무술을 시사받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대부분의 사이비 무술은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 가격은 대부분 십 만원에서 이십 만원 정도다. 물론 싸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격이지만 왠만한 격투기 도장도 10만원에서 15만원 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당한 수치다. 영 비싸게 느껴지면 문화센터를 알아보자. 4~5만원 정도다.
중요한 것은 절대 비싸게 받는 곳은 가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자부심을 느껴서 그렇게 받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장삿속에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으니 제대로 점검해 보고 여기저기 알아본 다음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지는 성인반 운영하는 타 무술 도장 가는 것도 괜찮다. 타 무술 도장 역시 사이비도 존재하니 점검할 필요가 있다.
4.2 현대무술과의 비교
위에서도 서술된 바와 같이, 종합격투기로 대표되는 현대무술은 그 자체가 여러 무술 사이의 상호교류 및 대립, 우열의 가림 속에서 새로이 진화된 형태이다. 낡은 패러다임과 한정된 상황을 상정하고 수련된 전통무술에 비해 거의 모든 경우에 숱한 다른 형태의 무술을 상대로도 싸울 수 있도록 발전했기 때문에 전통무술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다만, '전통무술'이 정확히 어떠한 형태로 싸웠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나 증거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통무술에 대한 현대무술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몇 가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앞서 본문 중 서술된 바와 같이, 19세기 즈음에 들어와 수 많은 중국 전통무술이 세상에 등장했고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카더라 통신, 필담, 무용담 식으로만 전래되고 있고 막상 기록영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20세기 초중반에 들어오면 이미 무술의 시대가 종식되고 문화혁명으로 대표되는 오랜 암흑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측면에서는 이 점이야말로 전통무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무술의 진화와 발전사는 정말로 연구하기가 편하다. 이종격투의 시대에 들어오면 적잖이 기록영상들이 남겨져있고, 그 이후로는 프로격투스포츠로써 이종격투와 종합격투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대무술은 기록영상, 시합기록 등의 형태로 공개적인 연구와 검증이 가능하다.
예컨대, 어느 시점에서 BJJ로 대표되던 이종격투의 기술이 어떤 시합에 즈음하여 어떤 한계가 노출되었고, 어떤 부분에서 타격기의 중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는지, 어떻게 '종합적인 무술의 형태'가 떠올랐으며, 이것이 "올라운드 파이터"의 원형인 '프로토타입' 프랭크 샴락 같은 사람을 거쳐가며 발전했는지, 이러한 경향성이 한 동안 우세하다가 또 다시 어떤 형태로 변했는지... 그 변화의 시점, 변화의 원인, 변화의 결과, 그리고 어떤 부분들이 어떻게 실전성이 강화되어 나갔는지가 모두 알려져있다.
반면, 중국무술의 경우 일제히 세상에 나와 고수들이 각지에서 활약하며 전설적 일화를 남기던 시절은 기록영상매체가 등장하기 직전의 시점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손을 맞대고 시작하는 중국식 대련"이 아니라, 실제로 치루었다는 숱한 실전이 어떤 식의 싸움이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다보니, 그러한 '전설적 고수들의 시대'가 저물고 한 두 세대 아래로 내려가면 벌써 20세기 초가 되는데, 이 시점에서 겨우겨우 기록영상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기록들에 남겨진 실전이 모습은 보통 상상하는 '중국무술의 실전'과 매우 다르다.
예컨대, 그러한 기록들 중 가장 유명한 것 중하나가 백학문의 진극부[8]와 오가태극권의 오공의 사이에서 벌어진 자선목적의 무술대결이며, 한국에서도 애들처럼 막싸운다는 조롱의 의미에서 꽤 유명해진 영상이다.
확실히 상상한 것과는 다른 점이 많지만, 무술이나 격투기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실 그냥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는 막싸움은 분명 아니다. 현대무술과 같은 정립된 실전적 격투패턴과는 달리 좀 많이 어눌하고 어설픈 모양새는 분명하다. 실전에서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이나 발을 만화나 영화에서 보이는 중국무술처럼 죄다 화경으로 흘린다는 둥 하는게 어째서 불가능한지는 영상만 봐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두 무술가가 싸우는 양상도 마구잽이 애들싸움처럼 보이지만 질이 낮은 영상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자기 문파가 특기로 삼는다는 수기나 이론을 간간히 시도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문외한이 상상하듯 만화나 영화처럼 '중국무술 자세'를 잡고 앞손 내밀고 싸우는게 아닌 것은 분명하고, 영상이 기록된 1954년은 이미 중국에서 무술의 시대가 종식된지 두 세대 가량이 지났음을 감안한다면, 본문에서 서술된 것처럼 각 문파에서 타무술과의 공개적인 대련이나 교류를 금하고 폐쇄적인 교습시스템이 정착된지 100년 가까운 시점이다.
즉, 혼란했던 청나라 말기 사회상에서 야심에 찬 권사가 불알 두짝과 두 주먹만 갖고 여기저기서 싸움판과 결투판을 벌이며 그 전적을 통해 자신의 실력과 강함을 증명하여 그걸로 입신출세하던 시절이 끝나도 한 참 전에 끝났으며, 한 문파의 지도자나 사범 정도가 되는 사람조차 어지간해서는 실전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살아서 한 두 차례도 경험하지 않은 그런 시대라는 것이다. 즉, 이미 도장주, 장문인, 종사쯤 되는 사람조차도 실전을 겪어본 일이 거의 없고, 실전을 위주로 가르치는 방법을 상실한지 1~2세대가 넘는 시점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태권도를 생각해보자. 자기 동네 도장 관장님이 정말로 태권도를 사용하여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사투를 벌인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 관장님이 동네 양아치와 깡패를 만나면 정말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태권도도 혼란한 해방기에 자리잡은 극초기에는 태권도라는 이름조차 없었던 시절 도장주들이 각종 싸움에 휘말려 정말로 주먹으로 자기 체면과 권리를 지키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태권도와 오늘날 현대 태권도의 모습은 물론 많이 다르다. 어느 정도냐 하면 50대 이상 나이대 사람들이 젊은 시절엔 태권도나 합기도, 유도의 검은띠라면 정말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띠의 색깔을 드러내는것 만으로도 실력을 인정받던 시대이다[9]. 유치원생들도 검은띠를 메고 피카츄 돈까스를 먹고다니는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즉, 중국 무술에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무력을 사용한 실전이 발생할 여지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세대가 거듭 내려가면 그 무술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조차 정작 실전에서는 그 무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꽤 실전적이며 무서운 무술로 알려져있는 가라데도 실전성 및 풀콘택트를 주장한 오야마 마쓰다쓰(최배달)를 중심으로 실전가라데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또라이'들로 간주되었음을 생각해보자. 역시 실전에서도 꽤나 무서운 무술로 알려진 오늘날 유도도, 과거의 전통무술적 면모를 걷어내고 엄청난 신체단련을 통해 폭발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단기접전을 골자로 하는 체계적 교육시스템을 세운 가노 지고로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코토칸 유도가 성립되는데 일조한 지고로를 비롯한 많은 유도가들이 전적이 증명된 실전결투를 숱하게 겪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유도가 브라질로 건너가서 'BJJ'가 된 것은 물론이고. [10]
이것은 현대무술의 진화상에 전통무술이 미치지 못하는 구조적, 시스템적 문제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실전에 강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실전을 많이 겪은 사람이 실전에 그 무술을 사용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르쳐야 한다라는 매우 간단하지만 절대적인 원칙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고수로 불리우는 중국 무술가들이 오늘날 최고의 무술가들에 비해 이미 시스템적인 측면에서 낡은 무슬을 사용할 것이니 만약 서로 대결을 한다면 약한 모습을 보일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종격투기가 퍼지기 시작하던 초창기 시절에 중국무술 익혔다는 사람들이 개패듯 얻어맞는 정도로 아예 비교가 안될 정도인지는 조금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앞서 본문 중 서술된 바와 같이 중국 무술의 실전이 어떤 것인지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종격투의 초창기에 등장했다가 그야말로 복날 개패듯 얻어맞고 떡실신 당한 중국무술의 현실을 보면 정말로 참담한데, 이미 20세기 중반 부터 수 십년 동안 실전대결을 펼쳐오며 발전해온 현대 무술가들 앞에서 만화나 게임에서 등장할 듯한 투로, 형의 자세를 취하고 덤벼들었다가 실전의 기본 중 기본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만 보이고 초살, 순살, 압살, 박살, 멸살(...) 당하는 모습에서 '경험부족'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옛날이라고 해서 오늘날 보다 사람의 주먹이 느렸을리 만무하고, 아이들 싸움만 봐도 격투가 이상화된 이미지처럼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첨부된 1954년의 백학권 vs 오가태극권의 싸움만 봐도 분명하다. (영상에 등장한 오공의는 오가태극문의 3대 장문인이다!!) 즉, 실전 비슷한 것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중국무술의 실전용법 영상이라든지, 책에 나오는 투로나 형이라든지, 이런게 안 통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직접 그걸 갖고 실전뛰려고 했던 사람이면 얼굴에 들어오는 주먹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실전을 벌였다는 중국무술가들이 출몰했던 그 시대에, 그 무술가들은 이런 중국무술인들과 마찬가지로 투로와 형과 비슷한 자세와 공격법을 취하며 싸웠는가?라는 의문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중국 무술은 현대 무술에 비하여 얼마만큼 실전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이 판이하게 다르게 나온다.
1. 과거의 중국 무술가들은 실제로 투로와 형과 같은 움직임, 스탠딩 유술을 중점으로 하는 식으로 싸웠으며, 이는 실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한된 대타나 산타와 비슷한 식의 형식화된 결투만을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 과거의 중국 무술가들은, 아무래도 최신의 종합무술에 비해서 부족한 점이 많이 있지만, 그 무술의 형이나 투로 보다는 오히려 오늘날 실전격투와 더 비슷해 보이는 식으로 싸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팔극권에서 팔굽공격은 이문정주니 외문정주니 하는 식으로 수련 중에나 나오는 '각'을 잡기 보다는, 실제로는 무에타이 비슷하게 근거리에서 실전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몸을 부딛히는 고법의 실제 용법은 철산고 같은 식으로 일격필살의 기술이 아니라, 단순히 근거리에서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일 때 사용된 스탠딩 레슬링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각 문파에서 배우는 형과 투로는 그 문파의 이상을 대변하는 표현 및 훈련방식이지, 실전격투의 요령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실전격투를 펼치면서 이름을 날린 사람들 이후 세대로 가면서, 정기적으로 싸우거나 대결을 펼치는 일이 극도로 줄어들면서 오늘날 종합격투와는 달리 '실전을 위한 노하우'들이 별도로 정리되어 전승 및 교습되지 모하고 상실되엇을 것이다.
오늘날 1을 지지하는 사람도, 2를 지지하는 사람도 똑같이 존재한다. 즉,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중국권법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가라테는 중국권법에서 유래했기 때문
- ↑ 중국무술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전한 오키나와 테를 보면, 그들의 형 안에는 단순한 타격기부터 스탠드 그래플링, 무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법들이 망라되어있고 아예 분카이라고 해서 용법 설명까지 마련되어있다. 하지만 오키나와 테의 주력이 타격기인 것은 마찬가지라 분카이 뜯어가며 그래플링과 무기술 배울 바에는 아예 그쪽 전문 도장을 함께 다니는 편이 훨씬 쉽다.
- ↑ 물론 하나만 죽자고 파는 것보다야 분명 어렵겠지만, 무술 하나 배우자고 이역만리 타향에 있을지도 모르는 스승 찾아가서 몇년씩 수발 들어가며 내제자가 되어도 전근대적 커리큘럼과 영양공급에 의한 비효율적인 실력 발전과 주먹 한대만 잘못 맞아도 무술가 인생 접어야 하는 의료 및 위생 관련 부담 속에서 단련해야 했던 과거의 무술가들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 ↑ 1860년대 최초 생산
- ↑ 아래 비판 항목에는 이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더 좋은 단련법이 나온 상황에서 굳이 옛날 단련법을 물고 늘어지는 것과 이런 방법 밖에 없었던 시절에 그나마라도 열심히 수련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우다.
- ↑ 단, 중국무술 역시 사료가 남아있는 것들은 추적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유행하고 있는 중국무술들은 옛날 서적에 나온 무술들이 아니다.
- ↑ 한가지 예를 들자면 형을 수련할 때는 중심선 유지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중국무술과 별 다를 것도 없이 앞굽이 뒷굽이 기마자세 다하는 가라테만 해도 서로 대련을 할때는 어설프게나마 스텝을 밟으며(태평양 전쟁 전후로 찍은 오키나와 테, 가라테 흑백 영상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대련 시 취하는 자세도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자세는 가드가 좀 낮다는 것을 빼면 현대의 입식 타격기와 큰 차이가 없다. 중국무술이라고 이런 경우가 아예 없었을 것이라 보긴 힘들다. 교습 과정에서 익힐 수 있는 자세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수련자 개개인이 융통성 있게 중심을 올리고 스텝도 좀 밟고 가드도 올리고 할 수 있기 때문.
- ↑ 이 사람은 미국에 있던 이소룡과의 결투로 유명해진 사람이기도 하다. 풍문에 따르면 이소룡에게 도전했다가 얻어 터졌고, 이 때 영춘권으로는 생각만큼 효율적 패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소룡이 이윽고 절권도를 창시하게 되었다는 말. 물론 이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이소룡 항목 참조
- ↑ 이 때 무술 도장들의 분위기는 반쯤 조폭같았다고 보면 된다. 무술 유단자는 시비를 붙어 싸우던 일이 잦았고, 어디서 두들겨 맞고 왔다고 하면 도장 인원들이 출동해 복수를 해야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다만 정정당당한 결투의 형식에서 지거나 맞았다고 하면 수련생은 사범에게 줘 터지는 시절이었다.
- ↑ 이때 그레이시 가문에 주짓수를 전수해주 마에다 미츠요는 일설에는 무려 2천번을 싸웠다고 하며, 이걸 물려받은 그레이시 가문도 밥먹듯 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