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사에서 황제보다도 높은 권력을 쥐었던 여인 3명을 칭하는 말.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의 권력을 쥔 것도 있지만, 많은 수의 대신들을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쳤고 나라를 크게 흔들었기에 악녀로 불린다.
2 멤버
측천무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가남풍이 그녀를 대신하기도 한다.[2] 여후 또한 슬쩍 비끼는 면도 있다.
3 평가
측천무후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말로가 별로 좋지 못 했다. 여후는 사기와 전설에 의하면 그 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원한이 실체화된 거대한 개에 겨드랑이를 물려 얼마 가지 않아 숨졌고, 그의 일족은 왕릉, 주발, 하후영 등이 일으킨 쿠데타에 몰살당했다. 왕릉 일당의 쿠데타로 황제가 된 문제는 한고제의 아들이지만 여후의 아들은 아니어서 '건국의 어머니'라는 고황후의 칭호를 여후에게서 박탈, 자신의 어머니인 박씨에게 바쳤다. 게다가 한이 멸망할 때 적미군이 여후의 무덤을 도굴하고 시신을 능욕했다.
서태후의 무덤 또한 청나라의 멸망 후 군벌 손전영의 군대의 의해 도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시신의 옷을 벗기고 몸을 난도질했으며 발로 밟기까지 했다고 한다. 공식 멤버는 아니지만 가남풍은 조왕 사마륜에 의해 유폐됐다가 독살되었고 일족은 몰살당했다.
반면 측천무후는 자신의 일족을 잃었지만,[3] 그의 손자 현종과 그의 자손이 당나라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깎이지 않았고, 남편 당고종과 합장된 건릉 또한 당나라 황릉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았다.
측천무후가 비교적 좋은 결말은 맞은 건 정권 이양 과정에서 피를 덜 봤기 때문일 수 있다. 측천무후는 남편에게 정치적 실권을 이양받았기 때문에 권력을 넘겨받느라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리지 않았다. 반면 여후와 서태후는 집안 싸움의 여파로 나라가 들썩일 정도였다. 또한 측천무후는 상기한 재평가에 통치 기간 동안 백성들의 삶이 윤택했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비교적 원활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4 재평가
현대 들어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서 여성이 남성을 휘어잡는 게 안 좋게 보여서 일부러 악녀라는 이름을 붙이며 매도한다고 보기도 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여후는 무위의 치를 통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평화를 이룩한 것으로 통일 후 혼란스러웠던 중화세계를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편. 무위의 치라는 게 아무 것도 안 하는 거라 평가절하되는 면이 있지만, 사마씨의 진나라를 보자. 최고권력자들의 사치와 과도한 토목공사를 자제한 건 정말 대단한 자제력을 보이는 동시에 시대적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소하와 같은 신하들의 의견을 따랐다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의 최고권력자이자 조정의 최고결정권자는 엄연히 여후였으니 그녀는 적어도 백성들을 위해서는 선정을 베푼 셈이다.
측천무후는 해당 항목에 자세히 작성되어있듯이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는 등 내치와 외치에서 일정한 업적을 쌓았고, 물러날 때 곱게 물러나 훗날 당나라의 태평성대에 일조했다는 평. 세 악녀 중 두 명은 '쉴드칠 만한 측면도 있다' 정도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악녀라는 평이 아주 부당하지는 않다는 평가인 데 반해 측천무후는 좋은 쪽으로 재조명[4]되고 있는 인물이다.
서태후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청나라 조정의 중심을 잡고 있었기에 그나마 청나라가 그 정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5] 사실이라 보기 어려우나 이웃의 명성황후의 사치액이 서태후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정보가 떠돌아다녀 오히려 서태후는 검소한 편이 아니었던가 하는 드립 평도 나오고 있다(…).[6] 그래봤자 사치는 사치다 다만 여후, 측천무후와는 달리 서태후는 사후 얼마 못 가 나라가 아예 망해버리고 그 후 찾아오는 게 일본의 침략으로 대표되는 중국사의 암흑기이다 보니 아무리 그래도 평가가 나아지기 어렵다.
종합해보면 재평가측은 중국 3대 악녀로 꼽히는 인물들은 당대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 국가의 대권을 휘어잡은 여성들이며 당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선입견에 의해 평가절하·비하된 인물들이라는 주장. 물론 개개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사료의 발견, 해석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측면을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교훈적 결말
전통적인 중국의 사관(史觀)에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유독 여자로 인해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식의 논조가 보인다. 이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부부유별 등 가정내 질서 유지와 이를 위한 가장의 집안 내부단속을 강조하는 특유의 유교적 세계관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도 있고,[7] 왕권을 약화시키는 외척세력을 경계하기 위해 특별히 악녀들을 강조한 탓이기도 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얘기도 일국과 가정을 규모만 다를 뿐 사실상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던 유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결국 왕비, 외척이 나서면 나라에 망조가 든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 항목에서 언급하는 여후, 측천무 때 외척들이 유달리 설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악녀로 평가할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3대 악녀라고 하지만 유달리 악녀론에 집착하는 현대 이전 중국의 역사관에 따라 중국사에는 이 셋 외에도 유명한 다른 악녀들이 많다. 역사책이 막장 드라마
5 관련 항목
- ↑ 서씨가 아니라 서쪽 궁에 머무는 태후라는 뜻이다. 동궁에 사는 동태후도 있었다. 서태후 항목 참조.
- ↑ 다른 재평가받을 여지가 있는 여인들에 비해 가남풍은 빼도박도 못 할 막장이다. 거의 원톱.
- ↑ 막내딸 태평공주가 당현종과 손을 잡고 위씨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무씨 일족도 덩달아 숙청당했다.
- ↑ 당의 3번의 전성기 중 2번째 전성기(첫 번째는 '정관의 치')인 '무주의 치'를 이끈 인물이며 이후의 전성기인 당현종의 '개원의 치'의 초석을 깔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 ↑ 이는 펄 벅의 소설을 통해 널리 퍼진 설이고, 작가가 페미니스트 성향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기반이 되는 근거가 거짓까지는 아니지만 미화가 심하다.
- ↑ 다만 이 이야기는 마땅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다만 대원군 이후 왕실의 지출이 는 것은 사실.
- ↑ 공자가 주장한 유교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이 정명사상이다. 쉽게 말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제 자리(임금과 신하, 지아비와 부인, 부모와 자식 등)에서 제 할 일을 다하며 분수에 넘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오륜의 하나로 부부간의 관계와 역할을 규정하는 '부부유별'이 있는데, 이에 따라 망한 왕조들을 설명할 때 유교의 오륜 중 하나인 부부유별을 지키지 않고 부인을 단속 못 해 망했다고 설명하는 식으로 활용된다.
- ↑ 현대 이전 중국사관에서는 나라가 망한 이유 중 하나로 거의 반드시 여자를 꼽았으니 그 시대의 세계관으로는 경국지색이라 함은 곧 악녀라는 평가로 연결되기 쉬웠다. 악행을 저지르면 당연히 나쁘니까 악녀라지만, 딱히 악녀짓을 안 했어도 군왕이 푹 빠져 정신 못 차릴 만큼 예뻤으니 그 자체로 요부이고, 아무 것도 안 하면 그것대로 지아비를 현명하게 모신 현모양처가 못 되었다고 까는 식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라서 경국지색이란 말 자체는 미인에 대한 찬사를 뜻하지, 자동으로 악녀의 의미를 포함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 ↑ 사료가 워낙 부족한 시대의 인물들이라서 그렇지, 모든 중국식 악녀의 모티브, 표본이 되는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