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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벌어진 중화민국군과 중국 인민해방군 간의 국지전. 하지만 실제로는 1979년의 미-중공 국교수립까지 쌍방 포격은 간헐적으로 발생하여, 무려 21년간 대치한 사건이다.
진먼은 중화민국의 실효지배에 있지만 타이완 성 관할이 아니므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문서에서는 중화민국의 통칭인 '대만' 대신 공식 국명인 '중화민국'만을 사용한다. 역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도 통칭인 '중국'을 사용하지 않고 공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사용한다.
2 배경
지도에서 보듯 진먼 섬(金門島: 금문도)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매우 가까운 섬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땅과는 겨우 2km 정도만 떨어져 있다. 남북한의 서해 접경 지대에 있는 서해 5도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서해 5도 역시 일제강점기 때에는 황해도에 속하였던 곳이다.
국공내전 말기 진먼 섬은 중화민국의 최전선 역할을 맡기도 하였으며, 산발적인 교전이 발생하곤 하였다.
3 전개
1954년 중화민국군이 진먼 섬에 군대를 증파하면서 쌍방에 포격전이 발생,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암시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압력을 가했다. 1년 뒤인 1955년에는 쌍방은 포격 중지를 합의하였고, 미국은 중화민국과 방어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불과 3년 뒤에 포격전이 터져버렸고, 미국은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함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의 해상 보급로를 어느 정도 확보해주었다. 중화민국군 해군은 진먼 섬에 보급을 위해 돌입하다가 인민해방군 해군과 격돌하여 9.2 해전이 발생하였다.
1차 위기와는 다르게 이번엔 전투기까지 동원되었다. 인민해방군 공군의 MiG-15와 MiG-17, 그리고 중화민국군 공군의 F-86이 서로 맞붙었는데, 미그17의 비행성능이 더 뛰어났으므로 중화민국군의 F-86은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미군이 중화민국 공군의 F-86에 단거리 공대공미사일 사이드와인더 를 장착할 수 있게 개조를 도와줌으로 전세는 역전, 중화민국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공중전의 결과로 중국인민해방군은 20여 대의 미그기를 격추당했으나 중화민국군은 겨우 2~3대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또한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은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버리게 되었고 이후 F-4 팬텀기에 기관총을 제거했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너무 끔찍하니 이하생략.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위에 언급한 것 같이 대규모의 충돌만 2번 이상 있었고, 21년 동안 간헐적이지만 포격을 당했기 때문에 현재 진먼 섬의 상당부분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철갑판으로 된 벙커와 역시 중장갑인 포탑, 포대 투성이다. 그래서인지 포격의 양에 비해서는 사망자나 부상자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연평도 포격 사태이후 국내 밀리터리 커뮤니티에서는 진먼을 연평도의 롤모델(...)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가 그럭저럭 좋아져서 벙커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쏘아댄 수십 만 발의 포탄 파편들은 요즘 식칼로 재생되어 역시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여행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
진먼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지만 깊은 관련이 있는 물건이 또 있는데, '금문고량주'라 불리는 술이다. 일반 고량주보다 훨씬 독하게 만든 고량주인데, 진먼에 투입되는 군인들에게 지급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포격전이 격화되는 시점에는 포격만 시작되면 모두 벙커나 지하로 틀어박혀야 했는데, 수없이 떨어지는 포탄에 의한 셀쇼크나 폭음 등으로 병사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끼다보니 사기를 고양하고 기분도 전환할 겸 빨리 취할 게 필요해서 이 금문고량주를 마시게 했다고 한다.
4 이야기거리
- 계속된 포격으로 진먼 섬의 전체적인 높이가 2M 정도 낮아졌다. 흠좀무
- 한국일보의 최병우 기자는 금문 포격전에서 특파취재 중 1958년 9월 26일 조난, 순직하였다. 이후 중화민국의 충렬사[1]에 안치되었는데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안치된 인물이다.
- ↑ 타이베이 충렬사가 아니라 진먼에 있는 태무산 충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