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heson line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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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치슨 라인의 개략적인 모습. 다만 쿠릴 열도는 포함되지 않는다.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일본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라고 선언한 셈. 허나 진짜로 니들끼리 알아서 한 탓에 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시밤쾅
애치슨 자신은 이 선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여겼으며,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의 연설 장소나 제목을 혼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후 제대로 까이게 되었고 일부 세력에게는 평생까임권마저 얻게 되었다. 반면에 북한과 나라를 세운 독재 시조에게는 오랜 숙원을 풀어내고 비극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놓게 한 수혜자격으로 칭송받을 수준.
덤으로 패전의 멍에를 쓰고 끝없이 침체해 가던 일본을 살려낸 구원투수도 되시겠다. 전쟁특수로 쏟아져 들어온 달러가 일본이 비상하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 당시 총리 요시다 시게루의 망언이 이를 증명해주는데..."이제 일본은 살았다!" 더불어 국부천대도 모자라 완전히 사라질 뻔 했던 장제스와 중화민국을 살려냈다[1].
2 진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방위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사실인즉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시 미 육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2차대전 직후 미국 정부는 "세계대전을 2번이나 연짱으로 치렀으니 당분간 큰 전쟁은 안 일어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는 바람에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2][3]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니......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되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어찌됐건 미국이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다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방위선으로 책정한 것이 애치슨 라인이었고, 애치슨 라인 밖의 지역은 안 지켜도 되는 지역이 아니라 막강한 공군력으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한 지역 혹은 포기할 수도 있지만 가급적 지켜야 하는 지역으로 간주한 것이다. 당장 제독의 반란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에는 항공모함도 필요없다고 간주하고 핵무기와 거대 폭격기만으로도 충분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군부 역시도 비슷한 안건을 주장한 바 있지만 애치슨 라인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지,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설사 보수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NATO 밖의 우크라이나처럼 전력을 다해 반드시 사수하는 지역이 아니지, 공산권에서 침공했을 때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하는 등 실제로 한국측에서는 한국방위를 책임진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일반에서는 "그때 막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기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선언을 접하고는 한국을 공격해도 미국의 무력개입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1950년 6월 25일, 희대의 병크인 한국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즉 애치슨 라인을 이용해 스탈린과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는 인식이 파다하지만, 한국측과 소련측 자료를 연구한 결과 사실상 남침에는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이미 남침에 대해선 애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논의가 오가고 있었으며 오히려 김일성은 미국의 북침을 걱정하며 신중하던 스탈린을 재촉했으며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정보를 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과장했던게 결정적.
뭐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 라는 인상을 주어 남한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까이기엔 충분하다.
2.1 남침유도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으나 이는 무시해도 좋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 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고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사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종북 혹은 친북 성향 학자들의 주장은 북침설 혹은 미군기습설이었다. 남침유도설은 오히려 우익학자들이 단골로 들고 나오는 메뉴였다.
게다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 봐 두려워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침을 유도했다면 정작 남침을 유도한 미군은 왜 박살이 날까?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급한 나머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미군의 일부 부대인 일명 '스미스 부대'(미 24사단의 1개 보병대대+포병 1개포대로 이루어진 대대급부대)를 먼저 파병했는데, 얘네들은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너무 편하게 지낸 데다가, 국공내전 및 일본군과의 치열한 게릴라전까지 치른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조선인민군을[4]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치기도 했다. 첫타자인 스미스 부대는 그렇다 쳐도 그다음에 도착한 미24'사단은 사단 전체가 대전 전투에서 역시 개발살나다 못해 무려 사단장[5]까지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6] 만약 미국의 음모론 운운하는 일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군은 왜 한국전쟁 초반에 이리 허술하게 대처했을까? 백선엽도 회고록에서 북한군을 너무 깔본다고 초기에 참전한 미군들에게 얕보지 마라고 충고했지만 그 충고를 무시하고 실전 치룬 미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비아냥거리자 미군 장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오해는 지금도 이어져 70의 작가 김재희가 직접 애치슨 라인은 한국에서 미국이 철수하여 일본을 방위선으로 삼는 계획이라고 말했을 정도.
3 결과
그러나 의도야 어쨌든 딘 애치슨은 방위선 하나 잘못 긋는 바람에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음은 물론 미국 내 보수파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사망할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애치슨 자신이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평판이 좋았다는 점에서 애치슨 선언은 아시아 정세에 어두운 유능한 정치가가 당장 눈앞에 닥친 국내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설프게 분쟁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다가 피 터지는 진짜 전쟁에 말려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작자는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7] 이렇게 유럽에만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일본을 빼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북한 및 공산 세력의 위력에 놀란 이승만 대통령은 서둘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국군 지휘권을 (한국 주둔 유엔군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된)주한미군에 넘겨주게 된다. 이후 평시작전권은 돌려받았지만, 핵심인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유엔군 겸 미군이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4 대중매체
대체역사소설인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8]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죽은 뒤에도 자꾸 까인다(...).- ↑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은 현재 대만의 영역까지 흡수하려고 준비해 왔다. 그러다 6.25 터지고 그 군대가
총알받이북한을 지키는데 투입되면서 대만은 소멸 위기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자유진영의 대표주자(UN 안보리 상임이사국)로 활약할 수 있었다.정작 국민당 독재에 원주민 탄압이라는, 대륙 못지 않은 막장을 달렸다는 건 함정 - ↑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
- ↑ 미국은 아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UN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체를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한국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 ↑ 당시 인민군에는 홍군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 무려 3개사단이었다! 이들은 인민군 선봉으로 전쟁 초기 경험이 일천한 국군을 완전히 개발살내버렸다.
- ↑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자세한 내용은 수색 및 구출 작전 중 순직한 기관사인 김재현(철도 기관사)항목 참고
- ↑ 이때가 되어서야 맥아더를 비롯한 본국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단순한 경찰활동'이 아니라 실제 전쟁임을 인식하고 가용가능한 군사력을 한국에 빨리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
- ↑ 사실 애치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미국 정부나 미국 의회, 미국 정보부에서도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 ↑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