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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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신라의 푸른 하늘 태극기 아래

이몸을 함께 바친 젊은 용사들
조국을 사랑하는 일편단심
불이여 바위여라 태산이여라
싸우며 무찌르는 상승7사단
장병이 기만인가 하나의 마음
 
2절 창공에 길이빛날 북두와 같이
천만대 이어받은 민족의 터전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업
무궁화 가지마다 아로 새겨져
벅차고 눈물겨운 투지의 피가
한송이 꽃잎마다 향기로워라
 
-7사단가

1 개요


제7 보병사단 본부 정문(출처)

대한민국 육군보병사단. 총 13회의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한 메이커 사단의 일원으로 일명 칠성부대. 이를 반쯤 놀리듯 칠성파, 사이다 부대란 별명이 있다.[1] 사단 정식 명칭은 상승칠성부대다. 일곱 개의 죄악을 저지르면 오는 부대

칠성부대의 상징은 북두칠성으로, 북두칠성은 예로부터 우주를 다스리는 별, 동이족의 나라를 다스리는 별로 우리 민족이 숭상해온 별자리. 그 중에서도 7번째 별은 하늘의 법을 집행하는 ` 요광성'(瑤光星)이라 해 파군검봉(破軍劍棒), 즉 어떠한 적군도 격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같은 의미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선봉'의 군대 기(旗)와 지휘관의 칼·봉 등에 북두칠성을 그리거나 새겨넣었다. 조선시대 때 북두칠성이 그려진 깃발은 지휘관의 지휘기로서 `초요기'(招搖旗)라고 불렀고, 북두칠성이 금이나 은으로 상감된 칼(寅劍)을 쓰는 장수는 곧 하늘 칠성님의 장수로 여겼다.

푸른 바탕에 북두칠성이 그려진 휘장을 사용하고 있는 칠성부대 장병들은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을 지켜온 군의 정통성을 정신적으로 가장 정확히 계승하고 있는 `상승'의 부대원임을 자부하고 있다.

1949년 6월 10일에 창설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총 28회의 전투에 참전하여 사살 2만3천명, 포로 6400여명, 장비노획 2만9천여점의 전과를 올렸다. 특히 낙동강방어전을 수행하던 중, 영천대회전에서 적 2개사단을 섬멸하여 6사단과 함께 전군최초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45회의 대침투작전을 수행, 무장공비 31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였으며, 1963년부터 강원도 화천군과 철원군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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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원래 마크.

1949년 6월 10일 용산에서 1, 9, 19연대를 근간[2]으로 창설된 한국군의 초기사단.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전쟁 직전 의정부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북한군의 성난 파도와 같은 진격 앞에 그야말로 비참하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당시 사단장은 후일 영천 전투와 현리 전투로 좋은 쪽과 안 좋은 쪽 양극단의 유명세(…)를 날리게 된 유재흥 장군.

결국 1/3도 안 남은 부대는 해산되었다가 전주에서 잔류병력을 기간으로 학도의용군,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재편 중 북한군이 전라도에 진입하자 목총으로 제식훈련 중이었던 보충병들을 대구로 보내고, 한강 북쪽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서해안을 통해 기적적으로 귀환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중심으로 민부대를 만들어서 지연전을 담당한다. 왜 하필 '민부대'였냐면 당시 재편성을 맡은 지휘관이 민기식 대령이었기 때문. [3]

이후 서울 수복 후 북진하는 과정에서 1사단과 7사단 양측이 각각 자신들이 평양을 최선두로 입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평양 선두입성에 관한 입장은 칠성부대전진부대의 주장이 정 반대이며, 각각 나름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참고로 육군 공간사에는 제1보병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명기하고 있다.)

  • 7사단측 주장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 1군단에 배속된 국군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평양 돌입을 다투고는 있었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에 가장 근접한 황해도 수안까지 진격해있던 7사단에 평양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특명을 하달 작전지경선을 함부로 침범하는 이승만의 위엄, 예하 8연대 1개 중대가 18일 오후 대동강을 도하하여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7사단측의 주장은 다음 링크에 정리되어 있다 # ##
  • 1사단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미군과 연합으로 평양탈환 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1사단 15연대가 19일 오전 미 1기병사단보다 앞서 평양을 최선봉으로 입성,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표창과 함께 <전진>이라는 구호를 하사함과 아울러 사단 전 장병에게 일계급 특진을 시켜줬다.

현재 두 부대 모두 자신이 평양에 최선두 입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7사단은 18일, 1사단은 19일에 각자 평양 최선두입성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줄곧 휴전선에서 치열한 고지전을 반복하다가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425고지전투를 승리하고 휴전선을 35km나 끌어올렸다. 425고지 전투의 중요성은 다음 링크에 정리되어 있다 425고지전투.

한국전쟁 중 7사단이 참전한 전투는 다음과 같다.

휴전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동부 GOP를 담당하고 있으며, GOP 작전환경은 21사단과 함께 국내에서 손꼽히는 험지로 이루어진 환경이다. 7사단 우선에서 21사단 좌선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특히 마의 코스인데, 7사단쪽이 지형이 좀 더 험하지만 짧다라고 한다면 21사단쪽의 섹터는 7사단보다 섹터 난이도는 조금 덜하지만 엄청난 길이를 자랑한다. 어디가 더 힘드냐구요? 직접 가보시면 명확한 정답이 나와요 참고로 원빈이 7사단 우선 중에서도 최우선 구역에서 섹터 돌다가 무릎이 아작나서 의병 제대했다.

칠성부대는 155마일 휴전선 경계부대 중 가장 좁은 방어정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험준하고, 가장 중요한 축선에 부대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또한 부대 전투력에 대한 신뢰의 증표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사단장을 역임한 부대이라는 점에서 5. 16 쿠데타 당시 동원되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이었으며, 동원된 부대는 해병여단[4]과 공수특전단 및 수도권의 예비사단 중에서도 소수병력 약 3,000명이었다. 당시 제7보병사단은 한국전쟁 휴전 후부터 계속하여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로서, 물리적으로 쿠데타에 동원될 수 없었다.

현재 주둔지역은 모든 부대가 강원도 화천군 지역, 또는 옛 철원군중 금성지역으로 사실상 화천권인 3개면[5]에 소재하고 있다.[6]

2.1 기타

좋은 이야기만 써주었지만 역사가 오랜 만큼 흑역사도 있는 사단이다. 6.25전쟁 당시의 유명한 패배인 현리전투때 7사단은 원래 국군 3군단 소속이다가 미10군단 소속으로 바뀌어 국군 3군단과 이웃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국군 3군단 패주의 원인이 된 오미재고개 피탈과 3군단 보급로 상실은 모두 7사단 담당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7사단장 김형일은 적 정보와 패배 사실, 중공군의 배후 침투를 3군단에게 전파하지 않아 3군단 와해의 단초를 제공했다. 국군 전사에도 이 7사단장 김형일의 무능이 기록돼있을 정도다. 당시 미10군단장이 장진호때의 알몬드, 7사단장이 김형일, 7사단 옆에 9사단장이 최석이란 걸 고려하면 3군단장 유재흥은 평범해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무질서한 패주[7]에 책임을 지고 3군단장이 경질되었고, 전투 전에 보급로에 목줄이 걸린 3군단을 "나와바리타령"하며 오미재고개에서 쫒아내고도 요지를 방치했다 하여 10군단장 알몬드가 워낙에 튀었고 7사단은 미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7사단장 김형일은 현리전투의 패배를 다룬 글에서 별 욕을 먹지 않거나 아예 그 이름이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3 출신 유명인물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7사단상승칠성 이란 별칭을 붙였다.
대령 시절 연승 연대장을 맡았었다.
사단장 전용차량 운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상승연대에서 소총수로 복무... 중에 무릎 부상으로 의병 전역.[8]
대령시절 독수리연대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17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 37대 육군참모총장, 제 40대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전역 후 국회의원, 국가안보실장 이후 현재는 주중한국대사로 내정되었다. 아울러 아들인 김용우 또한 칠성부대에 있으며, 부자(父子)가 모두 칠성부대에 있었던 기록이 있다.
중위시절 독수리연대에 임관하여 중령시절 연대장을 맡았었다. 이후 초대 제1야전군사령관, 제10대 육군참모총장, 제4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다.
대령시절 독수리연대장을 맡았었다. 이후 파월 한국군 지휘관, 제12대 제2작전사령관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아 금성 전투를 지휘했다. 이후 제7대 제2작전사령관,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소장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26대 제2작전사령관을 역임했다.
준장시절 사단장을 맡아 의정부 방어전을 지휘했다. 이후 제3대 제1야전군사령관, 제3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18대 제2작전사령관, 예편이후 비상기획위원장, 교통부장관을 역임했다.
준장시절 작전부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40대 제2작전사령관, 2015년 10월에 합동참모의장으로 임명되어 재직 중이다..
3연대 정훈병 출신이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10대 합동참모의장, 제 17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20대 육군참모총장, 제 14대 합동참모의장, 제 21대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14대 제1야전군사령관, 제 22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대령 시절 연대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6보병사단장,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제 15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제 36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전역 이후 박근혜의 안보특별보좌관, 제 31대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17대 제3야전군사령관, 제 30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이후 제 31대 합동참모의장, 제 30대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했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맡았었다. 현재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다.
조리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포병 연대 충무포병대대 출신.
  • 미노 (최민호)
하하친구로 잘 알려진 힙합가수. 진짜사나이 중년특집에서 7사단을 제대했다고 말했다.
네이버 베스트도전 마지막 휴가의 작가. 작가가 직접 7사단 직할부대인 화기중대 출신이라고 밝혔다.

4 예하 연대들

  • 육군 연대급 이하 부대는 고유명칭(예: 육군 제1보병연대)을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통상명칭(예: 육군 제3260부대)이나 애칭(예: 한라산 부대)을 사용해야 합니다. 또 주둔지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 또한 작성할 수 없습니다. 내용 작성에 주의해 주세요.[9]

특이하게도 예하 보병 연대들 숫자가 "전군 중 유일"하게 한 자릿수 연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밌는 점은 각 연대별로 악명 별명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단의 GOP는 손에 꼽을 정도로 험준하고 경사진 곳으로 유명하다.[10] 게다가 서로가 나름대로 힘든 걸 잘 아는 탓인지 전역자들끼리 예비군으로 만나도 왠지 반갑고, 동지의식도 굉장히 투철하다.

4.1 연승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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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승연대가 아니라 상승연대 사진임

짐승같은 체력을 요구하는 곳.[11] GOP에 투입되지 않고[12] 후방에서 훈련만 (X나게) 실컷 뛰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13] 자대 전입부터 전역할 때까지 자잘한 것을 싹 다 합쳐 20여개 이상의 훈련을 뛴다고 하며 심지어 작계지 상당 부분도 같은 군단 소속 이기자 부대와 겹쳐 이들과 자주 마주치며, 이 연대 명물(?)인 연승로는 연대의 성격을 대변하듯 고개가 무한에 가깝게 연속되는 것으로 유명하다.[14]

그리고 신병교육대인 3대대에 이어 2010년에 1대대까지 제2신병교육대대로 지정됨에 따라 2012년에 1대대가 야전 부대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유일한 야전 보병 대대였던 2대대에 연대에 부과된 훈련을 모조리 몰아넣었는데, 덕분에 이 시절의 2대대 별명이 이른바 물 없는 해병대(...)였다.[15][16] 그 덕분인지 사단 내에서 가장 전투교육이 잘 된 부대로 선정되는 영광(?)도 맛보기도 했었다. 덧붙여 2012년에 1대대가 야전으로 돌아왔어도 결국 2대대의 숙련도에 비할 바가 못 되었기에 이후 몇 년간은 결국 계속 2대대에 훈련을 몰아줬다고 한다. 영원히 고통받는 짐승들 여담으로 이 때 3대대 교장은 기존에 쓰던 근처 화랑 포병대대 포대 인근에 조성된 훈련장에서 사격 및 수류탄 투척, 각개전투 등을 실시했으며, 나머지 교육훈련인 제식, 화생방 등은 대대 연병장에서 실시했다. 다만 이와는 달리 훈련 시설이 충분치 않았던 1대대 교장에선 내부 부지를 변경해 실시 혹은 일부 특이 보직의 경우 1대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해 실시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1대대의 사격장 밑에는 을지 포병대대 본부가, 대대 밖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보면 독수리 연대 본부로 통하는 길이 있다.

여담으로 SG워너비이석훈연예병사 폐지로 이 연대 2대대(!)로 전출당해 근무하다가 2014년 10월에 전역했다. 이석훈과 함께 근무한 위키러에 의하면 부대행사 때 그대를 사랑하는 10가지 이유, 연애의 시작 등을 사열대에서 라이브로 열창하는가 하면 취침전 일일 정신교육시간에는 전우들 사연을 받아 라디오 방송을 진행해서 인기가 좋았다고 하나 대대장이 바뀌면서 폐지되었다고 한다. [17]

현재 유일한 신교대인 3대대 역시 취사시설 제외한 막사건물은 신막사화되어 있고 상당히 깔끔하고 온수도 잘 나오지만 밥맛은 예나저나 크게 바뀐 게 없다. [2014년 중순~말경에 신 취사식당이 건설되었다. 크기가 2배 정도 커졌고, 취사장 시설은 최신식으로 교체되었다. 깔끔한 것은 덤. 2013년 군단 선봉연대로 선정되었다.

4.2 독수리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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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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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도 낙오하는 곳. 상대적으로 상승 연대보다는 쉬운 섹터를 가지고 있지만 [18] 역시 무척 험난한 GOP의 지형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M자형[19]으로 계속해서 오르락 내리락 반복되는 섹터는 그야말로 지옥. 게다가 2013년 봄 해당 연대가 맡고 있는 칠성전망대가 새롭게 개장해 민간인들과 높으신 분들이 더 자주 찾아오는데[20] 담당 병사들로선 근무에, 전망대와 소초를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기에 그저 죽을 맛. 열심히 병사를 갈아넣은 덕분인지 전망대 자체는 매우 깔끔하고 좋은 시설을 자랑하지만 병사들의 생활관은 매우 시설이 낙후되어 있다. 안습... 게다가 2016년 무렵부터는 대남방송에 대항하여 대북방송까지 틀어대는 바람에 일의 양은 더더욱 늘어나 병사들만 죽어나게 생겼다. 또 안습...

게다가 짐승급 훈련량과 신조차 버릴 정도로 힘든 연승, 상승 연대는 우선적으로 관심을 받아 대부분 신막사로 대체된 반면, 이 연대는 별로 힘든 게 없다는 이미지가 박혔는지 GOP 쪽을 빼면 지금도 8,90년대에 지어진 시설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 물론 최근 뒤늦게나마(?) 신막사 공사와 더불어 추가적인 도로포장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 안습...

참고로 GOP 부대 중 군사분계선에 가장 가까운 초소를 가지고 있다.[21]

가곡 '비목'의 작사가인 한명희 작사가(서울시립대 교수)가 독수리 연대에 백암산 계곡 인근 GOP에서 군복무중이었는데, 어느 날 양지쪽 산모퉁이에 한국전쟁 당시 녹슨 철모와 썩은 나무등걸 등을 바라보며 '비목'의 가사를 작사하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연승연대 3대대만 신병교육을 담당할 당시엔 독수리연대는 미지의 연대(?) 같은 인상이 있었다. 상승, 연승연대는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나 독수리 연대만 건너편에 뚝 떨어져 있어 서로 마주칠 일이 적었던 게 이유인듯 하다.

연대 명물(?)로는 장고봉과 주파리 삼거리에서 시작,수색대 앞을 거쳐 경사로를 끝없이 올라가는 단결로 등이 있다.

4.3 상승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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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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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버린 땅. 이 한 문장으로 모든 설명이 끝났다.

휴전전 155마일 중에 최고로 험준하고 가파른 섹터를 담당하고 있는 연대이다. 전군(옆 동네 양구 21사단 섹터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최고로 험준한 섹터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7사단 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7가지 죄를 지으면 7사단으로 오고 여기에 엄청나게 악질적인 죄 하나를 더 저지르면 상승 연대로 가게 된다고 하는 얘기가 있을 정도. 독수리 연대에서 상승 연대의 접경 지역을 '신조차도 버릴 것 같은 땅'이라고 한다. 상승 연대는 이미 버린 땅이고 접경 지역은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땅이라는 뜻. 지못미.

참고로 배우 원빈도 이 연대 GOP에서 근무하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의병 제대를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복무가 싫어 엄살부려 제대했다고 까기 쉬운데, 원빈이 근무하던 곳은 진짜 GOP 전 구간에서 마의 네발 계단[22]코스로 불리는 소초다. 심지어 이곳은 병은 물론 간부들조차 오르내리다 무릎이 몇 번씩 나가 외과수술이나 제대를 하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11소초가 철계단으로 보수가 많이 이루어져 편해졌다고는 한다.

특히 OP 까지 가는 길에는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안전상의 이유로 K311(5/4TON), K511(2.5TON)에 병력을 태울수 없는 병력 승하차 구간이 존재하며, 병력 승하차 구간에서는 내려서 걷는다음 먼저가서 기다리는 차량에 탑승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구간이 한 곳이 아님으로 전방 휴가자는 전날에 휴가를 출발하는데, 차량을 타고도 엄청걸어서 연대본부 도착한다음 하루를 묵고 휴가를 간다. (여름철 휴가복은 연대본부 가면서 땀복이 된다).[23] 그 구간 중에서도 일곱굽이로 굽어져 있다는 '칠성로' 라는 구간은 비석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으며, 이 구간에서 전방부식차량은 2단 기어에 데후를 쳐야 (4륜구동) 간신히 올라간다 따라서 수송부에서는 전방운행가능자를 따로 분류하며, 엄청나게 험한 환경인 만큼 이를 위해서 자체 운전교육 및 시험을 거친다.

그리고 독수리 연대의 칠성전망대에 뒤질세라, 백암전망대를 신축 중이라고 한다. 병사 죽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흑역사한국 전쟁 발발 이전인 1949년 해당 연대의 두 대대장표무원강태무가 훈련 명분으로 휘하 대대원들을 이끌고 나란히 월북한 사례가 있다.[24]

연대 명물(?)로는 수리봉과 칠성로, 백암소초가 있지만, 난이도는 해당 연대 전역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나뉜다. 이유인 즉슨, 신이 버린 땅답게 이것조차 쉬워보일 정도로 다른 험난한 길도 많기 때문. (...)

4.4 포병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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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병연대 답게 연대하에 105mm 3개 대대(충무 포병대대, 을지 포병대대, 화랑 포병대대)와 155mm 1개 대대(왕자(王者다. 王子가 아니다) 포병대대)로 구성되어있다.

전군에서 전투부대로는 거의 드물게 인명사고 20년이상 무사고 부대인 을지 포병대대가 있다.[25] 물론 군 부대인 이상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없을 리는 없고, 2010년에 차량 전복 사고라든지, 구급차가 절벽쪽으로 굴러떨어진다던지, 화재가 발생한 적도 있고, 105mm 견인포 가신에 찍힌다든지(!) 해서 부상을 입는 사람들은 있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게 레알 기적.

그 덕분인지 2006년 경에는 포병 부대임에도 사단선봉 부대로 지명되기도 했다. 2011년 지금도 대대본부 정문에 28년 무사고 전통 수립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것도 대대본부에서 나가는 방향에서 보이지만... 또한 을지포병대대는 다른 포병부대와 달리 구 막사가 아닌 신형 막사, 그것도 1층 침대로 된 생활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며 실제로 생활하기에는 2층 침대보다 1층 침대가 더 좋다. 그리고 최초창설 6개 포병대대 중 한곳이자 춘천지구 전투에 참가했던 충무 포병대대도 이곳 소속이다.[26]

사단 주요화력이라 할 수 있는 왕자 포병대대는 으레 155mm 견인포 부대가 그렇듯 연중 훈련수는 적지만 한번 훈련에 들어가면 살인적인 훈련강도를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최전방의 155mm 대대가 그렇듯 훈련이 적은 대신, 상시 대응사격준비를 갖추고 비사격훈련을 해대기때문에 복무중에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특히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도발과 같은 북한측의 도발이 발생한다면 당분간 막사생활은 포기하는게 좋을 정도.

연평도 당시 복무한 병사에 의하면 두 달간 생활관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다시피 하며 포상에서 실사격 및 진지이동준비를 갖춘 채, 먹고 자며 생활했다고. [27]여담이지만 같은 시기 같은 포병부대 소속 최전방 보병연대 지원 담당 105mm 견인포 부대들은 제일 최전선에 배치한 포대들을 제외하고는 1달도 안 되서 포상대기 태세를 풀어버렸다는 걸 감안하면 이들의 압박감이 얼마나 심한 지를 잘 알 수 있다.

현재는 155mm 자주포 1개 대대와 155mm 견인곡사포 3개 대대로 개편되었다.

4.5 기타 사단 산하 직할대들

  • 본부대
  • 수색대대
  • 헌병대
화천군에 소재한 모든 부대를 통틀어서 읍내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이다.
  • 정보통신대대
사단 사령부와 30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직할대. 매년 7사단 출신 전역자들과 그 가족이 부대를 방문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때마다 병사들은 내무반에서 쫒겨난다. 가끔씩 부대견학을 하러 오는 학생들이 항상 점심을 먹으러 몰려오는 부대이기도 하다.
  • 보충중대
  • 의무대
밥이 맛없기로 정평이 나있는 부대이다. 이유인 즉슨, 아무래도 환자 + 외진환자들 때문에 식수인원을 맞추기 원체 힘들어서 대량으로 만들다 보니 조미료가 부족해서 그렇다. 게다가 늦게 가면 밥조차도 먹을 수 없다. 그렇다고 'PX 가면 되지!' 라고 하면 곤란한게, 국군병원이랑은 달라서 PX가 없고 이동식 PX인 황금마차를 이용해야 한다. 만약 밥을 먹으러 왔는데 밥이 없다면 민간조리원[28]에게 밥이 없다고 어떻게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해보자. 만약 인원이 별로 없다면 부식으로 나오는 라면을 줄 수도 있다.
외진이 정말 고역인게 PX도 없지, 사지방은 이용 못 하고 오락실도 제약이 심해서 외진환자에게는 너무나도 지루해서 지옥이 따로 없다. 실제로 의무대를 방문하면 정자등에서 베게나 심지어 모포까지 가져와서 누워있는 병사들을 볼 수 있는데, 죄다 진료받으러 오는 타 부대 병사들이다. 만약 자신이 칠성부대 소속이고, 외진을 갈 일이 있다면 미리 PX를 방문해서 주전부리랑 읽을 책이라도 가져오자. 그런데도 지루한 건 함정
  • 방공중대
주둔지 인원들은 본부대와 막사를 같이쓴다. 방공진지가 따로 있다. 로테이션으로 방공진지에서 방공작전을 한다. 훈련할때 발칸포나 신궁이 보인다면 방공중대 인원들이다.
  • 화생방지원대
화학대는 신막사가 아니지만 중대 이하급인 주제에 PX, 사지방, 목욕탕에 급수탑도 있어서 물이 진짜 잘 나온다. 게다가 사단내 내무실 분위기가 좋기로 2위[29]고 여타 부대보다 널널한 편이다. 물론 단점도 있는데 대대급 규모의 부대 토지와 2군단 창설기념비와 활주로다. 덕분에 사단시찰이나 군단기념행사 때 이곳으로 별들이 헬기를 타고 내려온다. 만약 대통령이라도 내려온다면? 국무총리가 온 적은 있다. 물론 국방부 장관 밑으로 좌르르...
  • 보수대대
  • 정비대대
7사단 전체를 통틀어서 시설 좋기로 손꼽히는 부대이다. 읍내에서도 택시로 3분정도면 갈 정도로 비교적 가깝다.
  • 공병대대
  • 전차중대

5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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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사단 사건사고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문단입니다.

5.1 허원근 일병 사건

허원근 일병 사건은 군 의문사 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현재까지도 자살이냐 타살이냐 옥신각신하고 있다. 해당 항목 참조.

5.2 그 외

  • 화천 할머니 피살 사건 - 부대 내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나, 피해자의 거주지가 7사단 예하 모 연대본부 바로 옆이었고, 피해자의 아들 및 가해자가 이 사단 출신 육군 퇴역 장교하사관이었다.
  • 2013년 8월 12일, 육군 7사단 하사가 최전방 일반전초(GOP)에서 자신의 K2 소총을 장전해 일병에게 겨누는 장난을 치다 실탄 1발이 발사돼 일병의 오른쪽 어깨에 경상을 입힌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
  • 2015년 12월 30일 새벽 3시 경, 육군 7사단에서 DMZ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정모 이병(21)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에 관통상을 입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총알은 사망 병사가 갖고 있던 총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정확한 사망 경위 및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
  • 2016년 5월16일 새벽 3시 경 육군 7사단 모 연대에서 A 상병(22)등 4명이 부대 PX에서 양주를 나눠 마신 후 A 상병이 술에 취한 상태로 연대장 차를 몰고 탈영했다가 같은 날 오전 4시쯤 춘천시 소양 2교 인근에서 차를 세워두고 흡연을 하던 중 추적하고 있던 같은 부대 소속 간부에게 붙잡혀 구속되었다. 위병소 검문 당시 당연히 연대장인줄 알고 검문을 하지 않고 위병소를 통과했으며, 다행히 운전을 하면서 차량사고 등 인명피해는 없다고 한다. 정작 애꿎은 불침번들만 모가지 날아갔다.

6 기타

전생의 7번의 큰죄를 지으면 온다는 농담이 있다.

경례구호"단결! 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대충 들으면 단!결!쑤!슴다!위병소에서 지휘관 급이 나갈 시에는 ... 딴↗껼↗~할쑤~있숨↗~두아↗!!!(...) 이전 서술에는 평소에 간략하게 '단결'만 하고 엄중한 제식이 요구될 때만 '단결! 할 수 있습니다!'한다고 쓰여져있었으나 현재는 신교대 때부터 모든 경례 대상에게는 해당 구호를 무조건 하도록 교육하고 있고 자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추가바람.

그리고 맥심에서 명품 부대 목록에 해당 사단이 누락되어 항의한 사람이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DC인사이드에서도 2군단 하위 갤러리 위치가 27사단보다 앞에 있다. 또한 군수지원부대인 육군군수사령부의 애칭이 '칠성대'라 '칠성부대'란 별명을 가진 해당 사단과 혼동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도 하다. 전방칠성부대, 후방엔 칠성대(...) 게다가 칠성부대 7사단은 전방 전투부대, 칠성대 군수사는 후방 기행부대라는 엄청난 갭(...)이 있다.

가수 박효신이 군복무시절 부른 '나를 넘는다'란 군가가 있는데 이 노래에 맞춰 추는 춤이 있다.안무영상 이걸 신병 수료식 때 군무로 추고 대대마다 다르지만 아침 점호 시간에 도수체조와 함께 이 춤을 춘다.따라부를수는없다! 심지어 구보중에 이 노래를 부르라고 했었다.

어느 연대의 인트라넷상에는 일반 커뮤니티 사이트를 방불케 하는 공간이 있었다. 각종 주제별 게시판들이 많이 있었으며, 누구나 들어가 내용물을 열람할 수 있었다. 그 중 모 게시판캐치마인드 게시판이라고는 말 못 한다의 경우, 병맛스런 개드립들이 넘쳐나는 등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외부인은 열람할 수 없게 바뀌었다. 야간 상황 근무 때 심심함을 달래 주던 곳
  1. 실제로 2005년경 롯데칠성과 결연을 맺은 적이 있다.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지 추가바람.
  2. 현재 해당 연대들은 전부 타 사단 산하 부대이다. 1, 9연대는 기보사단 산하라 기보여단으로 개편된 상태.
  3. 대충 지은 이름인 것 같지만 지휘관의 이름을 붙여서 부대이름을 정하는 것은 구 일본군에서 쓰던 관습. 6·25 초전 당시 정식계통이 아닌 지휘관이 임시적으로 편성한 부대에도 이런 식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4. 김포에 주둔하던 해병대의 반란 가담은 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해봐서 위험을 알고 관리한 것인지 박정희 집권 중에 해병대는 격하되었다.
  5.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6. 현재 저 세 곳은 주소상으론 철원이나, 통일 전까지 굳이 꼭 들어가고 싶으면(...) 화천의 군부대를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7. 불행 중 하나 건졌다는 식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래서 결과적으로 살았다는 평도 있다. 현리전투 항목 참고. 후에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은 3군단을 '지워버리기' 위해 철저한 포위망을 짰는데 이렇게 흘러가는 바람에 실제 인명 피해는 군단이 와해되어 쓸린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고.
  8. 참고로 원빈이 있던 곳의 상승연대의 네발계단은 옆 동네 독수리연대에서도 명성악명이 자자한데 실제로 해당 계단 근무자들은 자질구레한 무릎 질환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걸로도 유명하다.
  9. 물론 7사단은 6.25 전쟁 이전에 창설됐던 사단으로서 현재 예하 연대들은 모두 6.25 전쟁 중 예속받은 연대들이라 당시 기록을 뒤져보기만 해도 소속 연대들의 고유 명칭을 다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언급을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10. 때문에 GOP 담당 사단들 중 가장 좁은 범위를 담당하고 있다. 대신 나머지 섹터는 이웃 사단에게 다 몰아줬다
  11. 후술할 내용 때문에 일부에선 자조 겸 직설(!)적으로 연승에서 한글자만 바꿔 짐승 연대라고도 불렀다.
  12. 원래는 이 연대도 맡았었는데, 78년 철책을 넘어 남하한 무장공비 몇몇에게 농락당한 이후 제외되었다고 한다. #
  13. 후술하겠지만 이것의 유래는 대부분 2대대에서 유래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 다른 연대들도 특히 유격 시즌에 나름 지름길인 이 길로 행군을 하는데, 여길 지나면서 거의 기진맥진하기도 한다. 실제 고개가 엄청나게 가파르지는 않은데, 몇시간을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을 계속 걷는다고 보면 된다.
  15. 오죽하면 전역자들이 2대대 배치받은 후임에게 아직도 행군 많냐?라고 물어볼 정도이고 2대대 배치받았다고 하면 조교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거기 내 동기 있는데 잘해줄거야라고 위로를 해줄까(...)
  16. 사실 사단 유격훈련장의 관리역시 2대대에서 맡고있기때문에 1대대가 제2신교대 역할을 맡은 당시, 한때는 연대 전체가 교육훈련연대라고도 불린 적이 있었다.
  17. 대대장이 바뀐 이후 이석훈을 간접적으로 디스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일과 종료 이후 정신 교육을 한다면서 전병력을 모아서 개인 정비 시간을 없애는 경우가 많았다.
  18. 상승 연대는 네발 계단을 지나 소초 몇개 지난 뒤에 나머지 섹터는 완만한 편이나, 이 동네는 전망대 외 1개 소초를 제외한 전체섹터가 M, V, W형 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19. 이와 같은 지형을 근무자들 은어죽음의 맥도날드(다만 이는 비슷한 섹터를 가진 옆동네 제15보병사단에서 자주 불린다.) 등으로도 부른다.
  20. 여담으로 소초 부지가 좁은 탓에 대형 버스는 진입로 중간까지만 올 수 있다.
  21. 왠만한 타 GP위치 쯤 되는 거리에 대공초소를 갖는 소초들이...
  22. 두 발로는 오르기 힘들어 네발로 기어 올라간다는 계단.
  23. 2003년 경부터 전방휴가자 차량 운영 (칠성로 구간은 제외)
  24. 다만 북한군에게 투항하기 전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챈 중대장을 포함한 몇몇이 저항하거나 3개 중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까스로 탈출한 사례는 있었다.
  25. 정확하게는 '자살과 사망사고가 없다'는 것이지만, 저 기간동안 이걸 지켜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26. 춘천-홍천지구 전투 당시에는 제6보병사단소속.
  27. 이는 이 부대만이 아니라 전방사단 155mm 운용부대의 공통적인 상황인데, 각자 지정된 보병연대의 작전중 지원사격을 주로 맡는 105mm와는 달리,155mm는 최장 18~20km라는 사거리와 강한 화력을 가지고 상시 GP의 지원사격 및 적 도발원점 타격을 주임무로 맡기 때문에 105mm보다 임무도 많고 이런 임무들을 빠르게 소화해내야 하기 때문에 언제든 실사격이 가능해야 하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 연평도사건 이후로 조금만 대응사격이 늦어도 거센 비난을 면치 못하게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뒤로는 더욱 부대 내 긴장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28. 보통 '이모님' 이라고 부름.
  29. 원래는 3위. 1위는 보충대, 2위는 항공대였으나 항공대가 다른곳에 통합되어 등수가 상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