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뵘

Karl Böhm

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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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지휘자. 1894년 8월 28일 오스트리아 남부 그라츠에서 출생 ~ 1981년 8월 14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

아버지 레오폴트 뵘은 변호사였고 높으신 집안 덕에 각종 교육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 음악도 있었는데 피아노로 시작해서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등을 배웠다. 다만 실제로 그가 만든 곡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바람 대로 음악과 법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군인이신 숙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도 했는데, 자신의 이상과 다름을 갈등하다 낙마사고를 당한 뒤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귀향했다.

1918년 패전 이후 뵘은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법률 공부를 계속하였고 1919년 법학박사 취득[1] 후, 의무는 다했다는 생각으로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

1920년대 즈음 리허설만 70번을 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는 바그너로엔그린이 성공적으로 마치자 칼 무크의 후원 그리고 브루노 발터의 초청으로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4석 카펠마이스터직에 취임하게 된다. 낮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라츠 가극장 총감독 제의마저 거절하면서 까지 뮌헨의 무대에 열정적으로 임했다고 한다.[2]

그가 뮌헨에 있을 때[3], 당시 음악감독이었던 브루노 발터에게 모차르트와 바그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음악적 영향을 크게 주었다고 한다.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헤센 주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31년부터 3년간 짧은 기간동안 함부르크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있었으며 이는 그로서는 중요한 시기가 된다. 당시 작곡가 R.슈트라우스에게 호의를 보여 음악적 교류가 있었으며, 이 때 모차르트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됐다고 한다.

1934년에 프리츠 부쉬의 후임으로 드레스덴의 작센 국립가극장(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의 오페라 지휘자로서는 원숙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일화를 하나 꼽자면 그가 드레스덴을 떠나던 마지막 날에 수백명의 인파가 역까지 배웅을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휘자들이 다 그렇듯이 그도 나치 협력문제가 꼬여서 지휘금지를 당했는데, 당시 나치의 협력여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몇며칠화를 통해 당시 뵘이 나치에 대해서 좋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연주회 전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발적으로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경의를 표했다는 일화가 있다(...).[4] 하지만 전범 재판에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보다 몇 달 빨리 사면받았다는 사실로 보아 나치와의 연관은 경미했다고 보여진다.

1947년도 부터 지휘를 재개하는데 1954년 생애 두 번째로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고, 1955년 11월 5일 재건된 국립가극장 건물에서 역사적인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지휘했다. 그러나 극장 안팎에서 갈등으로 인해 1956년 3월에 거의 감정적으로 사의를 표했다. 뵘은 직후에 사의를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지만, 빈 국립가극장은 즉각 뵘의 사표를 수리하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후임자로 내정했다.

빈 국립가극장을 사임한 이후에는 더이상 특정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휘하고 싶다'는 본인의 말대로 평생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다. 애초에 빈 국립가극장에서 갈등이 생긴 이유가 뵘의 해외 객원지휘 횟수가 너무 많다는 불만이 극장 경영진뿐만 아니라 빈의 음악애호가들에게도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1957년 10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다. 1960년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여 두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미국 활동을 이어나갔다.

1962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이후 바이로이트와의 파트너쉽은 70년대초까지 이어졌다. 1964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국가 음악감독(General Music Director of Austria)이라는 명예직에 임명되었다.

여러 곳에서 상임지휘자 제의가 들어왔지만 모두 사양했다. 특히 1970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37년만에 상임지휘자직을 부활하여 뵘에게 제안했다고 하는데 빈 필이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면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에는 빈 필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 칭호를 수여받았다.

1970년대에는 빈 필 이외에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교류가 눈에 띄었다. 런던 심포니는 기량에 비해 저평가받는 측면이 있었는데, 1973년 런던 심포니를 처음 객원지휘했던 뵘은 악단의 실력이 의외로 훌륭한 것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다. 영화음악 등에 치중하느라 고전음악에 취약하는 인식이 강했던 런던 심포니의 경영진들은 마에스트로 뵘을 포섭하기 위해 적극 노력했는데, 뵘에게 당시 다른 일급지휘자의 세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개런티를 지불했다. 1977년에는 런던 심포니의 명예지휘자가 되었다.

1981년 여름, 뵘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잘츠부르크 교외의 별장에 머물렀지만 8월 5일 뇌졸중로 쓰러졌고, 87회 생일을 2주 앞둔 그해 8월 14일에 사망한다.[5]

2 그의 음악에 대한 평가

베토벤 교향곡 제5번 4악장, 1977년 일본에서.


뵘의 지휘 스타일은 상당히 양면적이다. 고전주의인 모차르트, 베토벤을 지휘할 때와 후기낭만주의, 특히 바그너와 R.슈트라우스를 지휘할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파 작품을 지휘할 때는 느리고 진중한 해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후기낭만파 음악을 지휘할 때는 빠르고 격렬한 해석을 보여준다. 음악에 처음 입문하여 모차르트, 베토벤 위주로 음악을 듣는 이들은 뵘을 느리고 중후하고 절제된 스타일로 오해하기는 경우가 많다. 뵘에 대한 이런 편견은 아직 클래식의 저변이 넓어지기 전인 80년대 이전에는 보편적이어서 전문 음악평론가들 조차 그런 오해를 가지고 글을 쓰기도 했다. 또 뵘 본인이 모차르트를 대단히 존경했고, 베토벤을 모차르트 다음으로 존경했다는 일화 등이 뵘의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제5번[6]의 성음음반 내지에 실려 널리 퍼지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뵘의 레퍼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식을 고착화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뵘이 가장 많이 지휘한 레퍼토리는 후기낭만주의였다. 젊은 시절 바그너의 제자들과의 인적교류, 특히 R.슈트라우스의 교류가 그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빈 고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고전주의 작품에서는 탄탄한 구조미를 자랑하며 규범적인 연주를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베토벤 등 고전주의 작품을 지휘할 때 그의 지휘는 주로 다른 지휘자들보다 다소 느리게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지만 사실 별로 느린 것도 아니다. 베토벤 5번이 다소 느리게 연주되었지만 다른 베토벤 교향곡들은 그다지 느리다고 하기 힘든 경우가 더 많다. 만년으로 갈수록 더 느려진다는 평도 있는데 이것도 온전히 타당한 평은 아니다. 최만년을 제외하면 활동기간 동안 비교적 일관된 템포를 계속 고수했다. 뵘이 본격적으로 음반녹음을 시작한 53년부터 사망시점까지 볼때 77년 이전까지는 비슷한 템포를 유지했다. 물론 실황에서 필을 받아서 스튜디오 녹음과는 다른 템포로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등의 정규음반을 보면 5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템포 측면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 다만 70년대 후반부터는 다소 느려지는 경향이 있고 최만년인 80년, 81년 연주는 확실히 이전보다 느려졌다고 말할 수 있다.

후기낭만주의 음악을 지휘할 때는 자의적 해석을 많이 하는데, 이는 경험의 산물로서 가수로 하여금 한 번의 호흡으로 많은 프레이즈를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와 더불어 무한선율이 강조되는 효과까지도 얻기 위함이다.[7] 덤으로 독일 후기낭만주의 음악의 정통적 적자라고 판단되는 지휘자에게 계승되는 '아르투르 니키쉬 링 (Arthur Nikisch Ring)'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후기 낭만주의 작품에서는 고전주의와는 사뭇 다르게 빠르고 격정적이고 폭발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뵘이 지휘한 바그너 악극들, 특히 니벨룽겐의 반지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슈트라우스의 여러 교향시들에서 뵘의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뵘의 바그너, 슈트라우스 연주들을 폭력적이라고 묘사하는 이들도 있다. 뵘의 이런 경향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바이로이트 페스트벌 오케스트라 등 남부 독일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때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베토벤의 경우에도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연주한 피델리오 서곡을 들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스피디한 질주을 하고 있다. 뵘의 과격함은 실황에서 더 두드러지는 편이다. 단원들에게 "리허설 때 연습한 것은 잊어도 좋다."[8]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많은 음반을 남겼는데, 녹음 작업시 음악을 부분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싫어하여 악장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몇차례(보통 다섯번이었다고 한다) 통째로 연주하고 프로듀서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리허설도 굉장히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적어도 악단에서 설 때는 연습시간을 줄이는 등의 편의도 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요구가 너무 논리적이어서 반박할 여지가 없는 데다 실제로 단원들은 그를 존경한다고 한다. 특히 뵘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빈 필 단원들은 그가 지휘대에 있을 때와 지휘대에서 내려왔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증언한다. 지휘대에서 내려오면 아버지와 같이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지휘대에 오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평소에 말수도 적었지만[9] 유머감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일식집에서 젓가락질이 잘 안되자 "막대기 하나로는 돈을 잘 버는데 두 개로는 굶어죽겠군." 하고 말했다고 한다.[10]전형적인 부장님 개그 맞네 사실 지휘 전에 단원들에게 조크 한두 마디를 건네는 습관이 있었는데, 조크 자체는 썰렁했지만 사투리 때문에 다들 웃었다고 한다.

단원 하나가 씩씩거리면서 '아니 카라얀 같은 사람은 눈도 감으면서 간지폭풍으로 지휘하는데 당신은 왜 눈도 뜨고 그렇게 얌전 빼는 겁니까?'라고 하자 나는 악보를 읽을 줄 알거든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크나퍼츠부쉬가 했다는 설도 있다.

뵘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모차르트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있다. 시대연주(원전연주)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브루노 발터와 더불어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평가받기도 했다. 뵘의 모짜르트 연주는 발터와는 또 다른데, 지나친 감상을 배격한 해석을 보이고 있다. 뵘은 60년대 그가 세계최초로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녹음을 하기도했다. [11] 사실 뵘 스스로는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 녹음에는 상당히 회의적이었고, 음반사인 DG의 한스 히르쉬 등의 계속된 설득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뵘은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 녹음을 진행하면서 녹음 전에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은 누그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초중기 모차르트 교향곡들의 대부분은 이 전곡녹음이 뵘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연주였다. 다만 교향곡 1번에 대해서는 다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졌으며, 나중에 영상물을 재녹음하기도 했다. 시대연주(원전연주)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는 당연히 뵘의 모차르트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레퀴엠의 진중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베토벤브람스 연주에 대해서도 많은 호평을 듣고 있다. 특히 빈 필과 남긴 베토벤 6번 연주는 아직도 최고의 명연주로서의 입지가 단단하다.

바그너를 비롯하여 후기낭만파 곡들을 연주할 때에는 고전주의 곡들을 연주하던 스타일과 180도 변해버려서 그야말로 게르만 파워가 작렬한다. 특히 바이로이트에서 실황으로 연주한 일련의 녹음들은 대단한 호평을 받아왔고 지금도 명반으로 입지가 확고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또다른 명연인 푸르트벵글러나 카라얀의 다소 탐미적인 해석과는 궤를 달리하는 충동적 격정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데, 뵘 스스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할 때 통제력을 잃어버린 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했바 있을 정도였다.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연주도 전설적이다. 특히 발퀴레 연주는 바이로이트 사운드를 대표하는 연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념비적이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서주 부분부터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함이 쫙 펼쳐진다. 원래 귀신 나오는 이야기지만. 또 카라얀과 더불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주의 초전문가로 익히 알려졌는데, 사실 슈트라우스 본인의 성향이나 인격을 볼 때 카라얀과 더 잘 통할 듯. 다만 드보르자크슈베르트를 연주할 때에는 매우 단아하고 깔끔한 연주로 회귀한다.

뵘은 당대 기준으로도 꽤 많은 녹음을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음원들은 나중에 EMI에 인수되어 재발매되었다. 50년대 초부터 본격으로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53년부터 55년 사이에 DG, DECCA, Phillips와 차례로 음반 녹음을 남겼으나 결국 DG와 전속계약을 맺었다. DG와 독점 계약을 맺은 덕분에 많은 음반을 남겼다. 뵘은 빈 필을 가장 선호하였지만, 빈 필은 60년대까지 DECCA와 독점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녹음이 불가능했다. 이 시기의 뵘의 녹음 대부분 베를린 필을 기용했다. 빈 필과 DECCA의 전속계약이 종료된 1970년부터는 주로 빈 필과 음반녹음을 남긴다. 칼 뵘은 "베를린 필 외 여러 악단은 악보에 보이는 대로의 소리를 내지만, 빈 필은 그 이상의 소리를 낼 줄 안다."는 말로 빈 필에 대한 애정을 나타냈다.

  1. 이것은 엄밀히 요즘 말하는 박사학위와는 다르다. 즉 대학원에서 수여하는 박사학위(Ph.D)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뵘이 취득했던 자격은 당시 독일에 관례적으로 Doctor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의사를 doctor라고 하지만, 이것이 대학원에서 수여하는 학문적 의미의 박사(Ph.D)와는 상관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2. 4석 카펠마이스터지만,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은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최고의 가극장 중 하나였다. 특히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을 받아 바그너파들의 집결해 있었던 본산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3. 이 때 뵘이 33때 쯤이었는데 17세의 소프라노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영록의 음악페이지 발췌.
  4. 이영록의 음악페이지에서 인용.
  5. 이상의 내용 중 일부는 고클래식 웹진/이영록의 음악페이지에서 인용하였다.
  6. 80년대 우리나라 클래식 음반의 절대 다수를 발매했던 성음음반에서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의 음반으로 뵘의 연주를 택해 양산했다, 카라얀, 클라이버, 번스타인의 베토벤 5번도 뵘에 비하면 레어 아이템이었을 정도
  7. 고클래식 웹진에서.
  8. 고클래식 웹진 발췌.
  9. 그러나 뵘의 리허설 동영상을 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번스타인에 비하면 말수가 적은 것 같긴 하다.
  10. 이영록의 음악페이지 발췌.
  11. 지휘자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1955년부터 1956년에 로열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교향곡 전집을 녹음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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