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o von Habs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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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주걱턱의 피는 끊기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장남이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태자.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1 마지막 황태자
1912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여섯 살 때인 1918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스위스와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젊은 시절에는 호르티 미클로시와 협상하여 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구성국 중에서 유일하게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변의 조언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의 제위를 노린 까닭인지 이를 거부했다. 그 뒤에 일시 귀국하였으나 나치를 싫어하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가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에 병합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나치 치하에서는 탄압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잘해야 꼭두각시 선전물로 이용되는 정도였을 것이다.[1]
부모 대관식 때의 기록화. 가운데 소년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이다.
황제 부부와의 사진. 오오 황족 오오
망명 후에는 미국 정부의 협력을 받아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오스트리아 제국 복원을 건의했지만 루스벨트가 반대함으로 제정 복고는 여기서 완전히 무산되었고 그도 그 이후 다시는 제위에 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선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그가 오스트리아에 머물면 공화국이 위험해질 것이라 판단, 그에게 큰 제약을 가했고 이에 실망한 그는 1950년에 서독 바이에른 남부의 푀킹(Pöcking)에 정착한 뒤로는 사회 활동에 전념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이슬람, 유대교 등과의 화해를 주장하며,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어 유럽 정계에서 "과연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손답다"며 존경받았다.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만큼 유럽의 다른 왕실에서도 그만한 예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66년 자신의 제위 계승 주장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공화국의 충성스러운 시민을 자처했다.
196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스페인의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스페인이 유럽의 천민으로 괄시받던 처지이기도 했고, 군사 독재자 프랑코에게서 정권을 이양받는 것은 민주적이지도 않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1989년 헝가리 공산당이 무너진 후에 헝가리 정치가들의 초청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지만 자신의 인기를 바탕으로 왕정 복고를 시도하진 않았다.
정치적 성향은 중도 우파에 가까웠으며, 기독교사회연합에 당적을 두고 유럽의회의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 공산주의를 싫어해 전후 냉전 시기에는 반공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도 했고,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민주화 열풍에도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된 지 70주년이 되던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 국회에서 '유럽에서 오스트리아보다 나치의 희생물이 된 나라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이 동네들은 뭐가 되냐, 좌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우파 계열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에서 급히 실드를 치는 등 떠들썩한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2004년에는 푸틴이 보통사람들의 정신상태로는 생각할 수 없는 미친인간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푸틴이 장차 유럽의 안보에 지대한 위협을 끼칠 것이라 경고했는데 그의 경고는 10년 후에 사실로 드러났다.
1988년 유럽 의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연설을 하는 중 북아일랜드 출신의 골수 반가톨릭 친영파 개신교 매파 출신 의원이었던 이언 패이즐리 의원이 중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는 팻말을 들고 16세기 종교 개혁 시기의 반 가톨릭 선언문을 외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교황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걸 보고 빡친 나머지 뒷자리에서 책상을 벌떡 뛰어넘어 팻말을 빼앗고 패이즐리의 얼굴에 원펀치 쓰리 강냉이 한방을 날려준 전적도 있다.[2]천주신권의 계승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팻말을 찢어발기자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나왔고 의장이 패이즐리의 퇴거를 명하자 다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후 패이즐리 의원은 회의의 보안 담당자에게 내가 맞을 동안 뭐 했냐고 항의하여 사과를 받아내긴 했다.
2 사망
2010년에 아내 레기나 대공비가 사망한 뒤에는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자택에 칩거했고, 2011년 7월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해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카푸친 수도원에서 관리하는 황실 묘지에, 심장은 헝가리의 퍼논헐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가도 역사가 되었다.[3] 그의 장례식에는 스웨덴 국왕 카를 16세, 리히텐슈타인 대공 한스 아담 2세, 불가리아의 전 차르인 시메온 2세, 성 요한 기사단장, 요르단 왕자, 보헤미아 공작, 오스트리아 전 총리를 비롯한 유럽의 왕족과 명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 ↑ 히틀러는 고향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다. 애초에 문화적, 정치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유대인도 엄청나게 많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발해 독일로 간 것. 반대로 합스부르크 황실은 제국 후기로 갈수록 자국 내 독일인, 헝가리인 우월주의를 포기하고 제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니 합스부르크 황실 입장에서도 히틀러를 멀리 하는게 당연했으며, 실제로 몇 안되는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는 유럽 다른 국가와 달리 근왕주의자 보수파가 좌익 못지 않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 ↑ 당시 비디오. 뒷자리에서 날아와 손에 들고 있는 삐라를 빼앗는 사람이 오토 폰 합스부르크 공이다. [1]
- ↑ 오해하지 말자, 합스부르크 가 자체는 오토옹의 아들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이었다. 공식적인 지위만 잃었지, 물려받은 재산으로 잘나가는 일부 독일 공작, 왕가 자손들처럼 이 사람도 잘나가는 정치인이고 부자다. 게다가 이 사람 어머님도 작센-마이닝겐 공주님이였기 때문에 혈통만 보면 100% 황족이다(...) 상기 표현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누리던 시절을 경험한 마지막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