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체르넨코

역대 소련 최고권력자
1대2대3대4대5대6대7대8대
레닌스탈린말렌코프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역대 소련 서기장
1대2대3대4대5대6대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전전(前前)임 서기장전임 서기장과 함께 있는 사진. 가장 오른쪽에서 서 있는 사람이 체르넨코이다.


콘스탄틴 우스티노비치 체르넨코(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1911년 9월 24일 ~ 1985년 3월 10일

1 개요

소비에트 연방의 5대 서기장으로 안드로포프-체르넨코 라인을 잇는 듣보잡 라인 멤버의 둘 중 하나인데, 안드로포프의 경우에는 우선 과거 KGB의 수장이었다는 경력에서 오는 위엄과 정체 상태에 빠진 소련을 개혁하려고 한 것 때문에 그나마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체르넨코의 경우에는 정말로 존재감이 없다. 게다가 유리 안드로포프와 같이 건강이 좋지 못해서 고작 1년밖에 통치를 못하고 죽었다.

2 생애

2.1 출생부터 군 입대까지

1911년 9월 24일 러시아 제국 시베리아의 도시 크라스노야르스크의 노보쇼보로 지구 보리샤야-테시에 살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부농에게 고용되어 일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주의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가입했고, 1929년에 노보쇼보로 지구 선전 및 선동부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30년소련군에 지원하여 국경경비대에 배속된다.

2.2 공산당 활동

체르넨코는 193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전역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당 선전부 부부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당 서기를 맡았고, 몰다비아의 키시네프 교육대학을 졸업했다.[1] 전쟁이 끝난 1945년에 펜자 주 당 서기를 거쳐 1948년 몰다비아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이 되었다. 이때 몰다비아 공산당 서기가 바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였다.

브레즈네프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후대받은 체르넨코는 1956년, 소련 공산당 선전부 대중선동 활동과장에 등용되었다. 이후 그는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뒤부터는 오랫동안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무부장을 맡아 당 관료 조직 내에서 커다란 인맥을 쌓게 된다. 또한 중앙위원회에 투서부를 마련해 하급 관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려고 했다.

1982년에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반(反) 브레즈네프 세력인 유리 안드로포프가 후임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체르넨코는 권력에서 밀려나는 듯했으나, 1984년 2월에 안드로포프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체르넨코는 당 관료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서기장에 취임하여 권력을 획득했다.

2.3 서기장 취임 후

1984년 4월 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의장을 겸직하게 된 체르넨코는 취임 초기부터 병약했고 눈에 띄는 실적은 없었지만, 교육면에서 기술 · 전문 교육을 중시하여 교육개혁에 착수했다.

또한 중요 인사에 관한 정책을 단행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9월 6일 당에 비판적인 언동을 반복하던 소련군 총참모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를 임명하는 등 관료 정치를 개선하기도 했다.

다만 오가르코프의 해임에 대해서는 체르넨코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체르넨코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서기였던 그레고리 로마노프가 각각 여름 휴가와 해외 출장으로 동시에 부재중 상태가 된 다음날 새벽에 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급작스럽게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오가르코프의 해임이 결정되었다. 이 때문에 오가르코프의 해임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비(非)체르넨코파(派)가 체르넨코파(派)의 거대한 인맥에 흠집을 내기 위해 공작한 것이라는게 이 설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거다.

한편, 체르넨코는 노동조합을 지원하고, 중국과 무역협정을 위해 교섭하였다. 그러나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서독 방문을 막는 등, 냉전의 완화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2.4 사망

1985년 3월 10일, 오랜 세월 동안 앓고 있던 폐기종이 악화되어 발생한 심폐기능 부전에 의한 심장마비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유해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취임한 지 불과 1년 만에 죽음을 맞았으며 소련 국민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던 서기장이었지만, 일가족의 가장으로서는 둘도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부인인 안나 드미트레브나 체르넨코는 남편의 장례식 때 오열하면서 죽은 남편의 시신에 계속 키스했다고 한다.
  1. 크라스노야르스크 당 서기를 맡을 당시 재밌는 일화가 존재한다. 스탈린은 1913년 크라스노야르스크 관할이던 쿠레이카라는 북극권의 오지에서 유형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체르넨코가 1942년에 이 때의 스탈린의 일화들을 모아 스탈린 숭배용 책으로 내서 점수를 좀 따보려고 했던 것. 그러나 돌아온 스탈린의 반응은 불 같은 격노였다. 직접 전화해서 아주 혼쭐을 내줬다고.. 전쟁하느라 지금 다들 정신 없어 죽겠는데 뭔 짓 하냐고 갈군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