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Claude Auchinleck. (1884.6.21~ 1981.3. 23)
클로드 오킨레크 혹은 클로드 오친렉으로도 불리운다.
제2차 세계대전 시 영국군 중동 총사령관이자 연합군에서 제일 안습한 장군.
2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 올더숏에서 오킨렉은 전통 있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집안은 매우 가난하였다. 그래서 오킨렉은 어릴 적부터 힘들게 일했고, 노력 끝에 장학생으로 버크셔에 있는 웰링턴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오킨렉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1904년에 졸업하여 제62펀자브연대 장교로 배치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이집트, 이라크와 요르단 지역, 예멘에서 싸웠다.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인도에서 근무했다. 1923년~1924년에 인도 병참부 부장을 맡게되며, 1929년~1930년까지 중령으로 제1펀자브연대 제1대대장, 1930년~1934년까지 인도 퀘타의 참모학교 교관을 하였다. 그 뒤 대령으로 진급되어 1933년~1936년까지는 페샤와르 연대장을 하게되는데, 인도인이 대부분인 인도 주둔군에서 인도인 현지사정을 고려하고 인도인을 대우하여 평판이 좋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 승진은 순조로웠고 1936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인도군 부참모장에 올랐으며 1938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인도 주둔군의 오랜 병영이 있는 메루트 지역 주둔 영국군 사령관이 된다.
3 제2차 세계대전
멀리 인도에 있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진급하며 1940년 영국군의 북노르웨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여기서 그는 직속 지휘부대로 영국, 폴란드,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25000명의 제4군단과 제5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오킨렉은 독일군이 점령한 항구도시 나르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우지만 노르웨이는 독일에게 정복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철군하게 된다. 이후 1941년까지 인도군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다가 윈스턴 처칠의 눈에 띄여 대장으로 진급,중동지역 총사령관에 오른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에르빈 롬멜이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오킨렉의 선임인 아치볼드 웨이블은 상당수의 병력이 그리스로 떠난 상태에서 롬멜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사막전의 대가인 리처드 오코너 중장을 비롯해서 6명의 장군을 포로로 내주었다. 롬멜의 공격은 완벽한 기습이었고 파죽지세로 밀어닥치는 롬멜의 진격은 토브룩에서 저지되었다. 롬멜은 계속해서 공격을 가했으나 토부룩은 롬멜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것을 기회로 웨이블은 반격작전을 감행하지만 롬멜은 두 차례의 영국군의 공세를 모두 막아냈고 롬멜의 드높은 명성은 높아만 갔다.
반격작전의 실패로 아치볼드 웨이블에게 실망한 처칠은 대신 롬멜을 상대할 지휘관을 물색했고 오킨렉이 낙점되었다. 오킨렉은 규모는 작지만 대단히 유능하고 공격적인 장군을 둔 질적으로 우수한 군대를 상대하여야 했다.
전체적인 상황은 오킨렉에게 유리했다. 이미 웨이블이 반격을 가하던 시점부터 그리스에서 영국군이 패퇴한 이후로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지원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스로 갔던 병력도 속속 귀환하였고 보급도 원할했다. 반대로 롬멜은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오는 보급도 영국 공군과 해군에 저지되고 있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을 기회로 오킨렉은 크루세이더 작전을 개시하였다. 크루세이더 작전은 성공하였지만 시디 레제흐 전투에서 롬멜의 공격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오킨렉은 롬멜을 거의 격파한 것처럼 보였다. 오킨렉은 롬멜을 서쪽으로 밀어 붙이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롬멜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롬멜은 군을 추스리고 다시 공세로 나아갔고 다시 한번 승리를 거두며 동진을 개시했다. 롬멜의 신속한 공격앞에 영국군은 무너졌고 롬멜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처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롬멜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원치않게 롬멜 신화의 밑거름이 된 오킨렉은 롬멜의 명성이 아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오킨렉은 승리를 거둘 때도 롬멜의 만만치 않은 공격을 받아야 했고 다시금 밀리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엄청난 적 지휘관의 명성은 아군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걱정할 수 밖에 없던 오친렉은 결국 이 상황을 우려한 특별포고까지 할 수 밖에 없었다.[1]
가잘라 요새에서 영국군은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지만 영국군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롬멜은 이 위기를 넘기고 토브룩으로 진격했다. 롬멜은 이전과 달리 토브룩을 정면공격하는 대신에 토브룩을 지나쳤다가 다음날 바로 회군하여 기습하였고, 토브룩은 함락되었다. 이제 롬멜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처칠은 토브룩 함락을 전쟁 중 가장 놀라운 일로 꼽았을 정도였다. 이집트가 점령되면 영국의 숨줄은 극도로 약해지고 독일군은 중동의 반영세력과 손 잡을 수 있었고 인도까지 진격할 수 있을 터였다.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영국군은 떠나기 시작했고 기밀문서는 불에 태워졌다.
이처럼 위기상황이었지만 오킨렉은 결코 무능한 장군은 아니었다. 오킨렉은 스스로 8군단의 지휘권을 잡았고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엘 알라메인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오친렉은 엘 알라메인에서 8군단을 지휘하며 롬멜의 공격에 대항했다. 롬멜은 보급은 한계였고 오킨렉은 지형상, 보급상의 이점을 살리며 롬멜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상황이 오킨렉에게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지원과 본국의 보급으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점점 증가되고 강화되고 있었다. 반대로 거롬멜은 보급기지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진 상태였고 오는 보급물자조차 중간의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서 손실률이 굉장히 높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롬멜의 공격력은 약해졌고 위기를 넘긴 오킨렉은 영국군의 전력을 강화시켜서 반격을 준비했다. 엘 알라메인의 소모전 상황에서 롬멜에게 한계는 확실했다. 마침내 오킨렉에게 롬멜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그동안 롬멜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동안 당한 것을 되갚아줄 차례였......으나 운명의 신은 끝까지 오친렉을 외면했다. 엘 알라메인에서 롬멜의 공세를 저지한 뒤 북아프리카를 찾아온 처칠은 오킨렉을 인도로 돌려보내고 북아프리카 총사령관에 해롤드 알렉산더를, 제8군 사령관에는 버나드 몽고메리를 임명한다.
이렇게 된 건 처칠과 갈등을 빚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킨렉은 인도인을 대우한 편이었고 인도군으로 오래 주둔한 경험을 통해 인도인을 참전시키고 댓가로 인도에 자치 및 더 많은 우대를 해야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이걸 내키지 않은 처칠과 갈등을 빚었고 오킨렉은 분노해 정치적 간섭으로 정치인들이 전선을 말아먹는다고 따져들었기 때문이었다.
3.1 돌아온 인도군 생활
인도군 총사령관으로 돌아온 오킨렉은 인도군인들을 배려한 정책을 취했고 많은 인도 군인들은 오킨렉을 좋아하였다. 이렇다보니 그에게 충성을 다하며 인도군은 버마 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선,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동하며 특히 북아프리카에선 뛰어난 지뢰 제거로,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용맹한 부대로 활약하게 된다.
3.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이 끝난 뒤 오킨렉은 1946년에 왕의 부관직을 끝낸 후 원수로 진급되고 기사 작위까지 받게되었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정책에 대해서는 불명예스러운 정책이라며 비판했다. 이 와중에 인도 마지막 총독인 루이스 마운트배튼(1900~1979)[2]과 갈등도 커졌다. 마운트배튼은 어디 엿먹어라는 투로 일부러 오킨렉을 파키스탄 쪽 주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인도인을 좋게 대해준다는 소문으로 파키스탄에서는 오킨렉을 껄끄럽게 여겼고 그래도 오킨렉은 중립적으로 파키스탄군을 대했지만 파키스탄 인들에게 차별대우를 한다는 비난과 고발이 이어지며 그는 1947년 사령관직에서 물러난다. 어차피 파키스탄이 독립하면서 오래가지 않은 직위이긴 했다.
오킨렉은 1948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군 행정 분야에서 근무했다가 1968년이 되자 군에서 완전히 퇴역한다. 아내와 같이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조용하게 삶을 보내다가 1981년에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4 평가
전쟁 전에 인도군 총사령관에 오를 정도였고 2년마다 계속 진급할 정도로 확실히 능력이 있었으며 비록 롬멜에 여러 차례 패배했고 승리조차 확고하게 얻어내지 못했지만 롬멜에게 오킨렉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롬멜은 생애 최고의 기회를 잡았지만 엘 알라메인에서 오킨렉의 철저한 대비 때문에 좌절해야 했다. 그러나 능력에 비해서 비중은 공기.
흔히 롬멜의 라이벌로 몽고메리를 기억하지만 롬멜과 오랫동안 제대로 싸운건 오킨렉쪽이다. 그럼에도 몽고메리가 기억되는건 몽고메리가 승리자였기 때문이다. 오킨렉은 능력은 있지만 정치인들과 사이가 무척 나뻐서 공을 세워도 더더욱 정치권에서 나 몰라라 묻히고 작전이 막판에 틀어진다거나 하는 등 운이 안 따라주었다. 엘 알라메인에서도 고비를 넘기자 몽고메리와 교대해야 했다. 덕분에 '패배는 없지만 승리도 없는 어정쩡한 장군'으로 남았다.
몽고메리가 사막의 여우의 승리자로써 유명해졌고, 이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해서 연합군의 베를린 진격을 지휘했고 이 공적으로 원수계급에 작위까지 받고 롬멜의 라이벌인 연합군의 명장으로 길이 기억되는걸 생각하면 오킨렉은 어지간히도 운이 없다. 본인은 몽고메리를 보면서 매우 씁쓸해 했을 듯 하다. 물론 그도 전후에 원수로 진급되었긴 했지만.
성격적으로는 사치함과 화려함을 무척 싫어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일반 사병을 무척 생각해준 덕장이었기에 사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도 버나드 몽고메리와 극과 극. 또한 정치인들과 무척 극과 극이라서 윈스턴 처칠이라든지 왕족인 마운트배튼 경에게 따져들었기에 그의 공이나 존재가 더 묻혀졌던 비운의 장군이다.
5 기타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최후의 신조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다. 1941년, 영국이 나치 독일에 항복한 뒤로도 오킨렉 원수의 인도 주둔 영국군은 추축국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1947년에야 발터 모델 원수가 이끄는 독일군에 항복하게 된다. 항복 절차를 밟으면서 오킨렉은 "본국은 옛날에 항복했는데 니들은 계속 저항했으니 인도 주둔군은 산적떼 아니냐?"라고 도발하는 모델 원수에게 빡쳐서 항의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바 순순히 항복하고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여기서도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