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과달카날 전투
1 개요
1942년 11월 30일에 벌인 미 해군과 연합함대간의 해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역인 과달카날 전투를 구성하는 전투이다. 타사파롱가 해전은 미국측 기록이고 일본측에서는 룽가곶 야전(ルンガ沖夜戰)이라 칭한다. 그 외에 제4차 사보섬 전투라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 미군이 사보섬 해전 못지 않게 망신당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1942년 7월 미군이 과달카날에 상륙하여 일본군이 건설중이던 비행장을 탈취하면서 시작된 과달카날 전투는 초기 일본군이 우세를 지닌 전장이었다. 게다가 초창기 일본 연합함대의 선전으로 미군이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잡지 못하고 빌빌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수뇌부의 병크 대행진 끝에 자멸하고, 10월에는 과달카날 근해에서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가 격침당하는 참패 끝에 제해권마저 내준 시기였다. 이 무렵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이거 글러먹었다고 판단하고 과달카날에 투입한 병력을 빼자는 제안을 했지만, 대본영은 오히려 병력 증강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본영의 의지처럼 과달카날에서 작전을 수행하려면 기존에 투입한 병력들에게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줘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제공권을 장악당한 시점부터 수송선을 이용한 양륙은 포기한 상태였고, 구축함을 바탕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소위 '도쿄 익스프레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해권마저 내준 상황에서 도쿄 익스프레스 역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낮에는 섬의 그늘이나 후미진 곳에 숨어 미군의 눈을 피하고, 밤에 미친듯이 달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다음 드럼통을 내려주고 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간단히 느긋하게 양륙할 시간이 없어서 고안해낸 방법인데 이런 식으로라도 물자가 공급된다는 것은 미군 입장에서도 성가신 일이었다.
이에 어차피 대규모 해전이 벌어질 낌새는 없고, 10척 이내의 구축함이 왔다갔다하면서 깔짝대는 상황이라 미군에서도 중순양함 위주의 수상함 세력을 투입하여 이 수송 시도를 저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3 미군의 준비
윌리엄 홀시 제독의 함대 재편으로 그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토머스 킨케이트 소장은 수상함 전대를 지휘하게 됐다. 더불어 수송 저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야간전술을 고안해냈다. 일단 함대 전방에 대한 감시는 순양함에서 발진시킨 수상기들이 맡게 했고, 만약 적 함대를 발견하면 이를 신호탄으로 알려주도록 했다. 여기에 구축함은 순양함 보다 전방에 배치하여 어뢰 공격을 가하고, 이후 순양함의 주포 사격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회피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순양함은 구축함의 조기경보망을 이용하여 최소 10km 이상의 원거리에서만 포격을 가하도록 하여 소위 혼란에 빠져서 추태를 부리다가 자멸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또한 쓸데없이 적의 포격을 유발하는 탐조등 사용은 엄금했다. 게다가 팀킬을 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즉시 발광 신호를 발산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그동안 벌어졌던 해전 양상을 연구하고 분석한 결과로 난전 속에서 피아가 섞여있다가 서로 팀킬하고, 적을 찾는답시고 탐조등 켰다가 오히려 신나게 얻어터지는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이 작전은 킨케이트 제독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것으로 일본군 수송 작전을 저격함으로써 그 효용 가치를 테스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머스 킨케이트 제독이 애투와 키스카섬 탈환 작전을 위해 북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그 후임으로 칼튼 라이트 소장이 오게 됐다.
문제는 이 부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라이트 제독은 11월 28일날 킨케이트 제독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어받았고, 11월 29일에 작전 수행을 위한 출항을 해야 됐다는 점이다. 게다가 라이트 제독은 과달카날 해역에서 처음으로 작전 지휘를 하게 되어 전장 상황도 어두운데다가 익숙하지도 않은 킨케이드 제독의 작전안대로 함대를 지휘할 판이 된 셈이었다. 마가 끼었습니다.
4 교전
과달카날 증원 임무를 맡고 있던 다나카 라이조 제독은 구축함 나가나미에 사령기를 달고, 타카나미와 함께 호위 임무를 맡도록 했다. 그 외에 6척의 구축함에 각각 200개씩 실어 총합 1,200개의 드럼통을 싣고 수송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 선단은 11월 30일 쇼틀랜드에서 출항하여 과달카날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를 발견한 호주 출신의 해안감시원 폴 메이슨이 즉각 사령부에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사령부는 이를 라이트 제독에게 전달했다. 한편 일본군 정찰기도 비슷한 시간 라이트 제독의 수상함 전대를 발견해 다나카 제독에게 보고를 올렸다.
오후 9시 40분, 다나카 제독의 선단이 사보섬 서쪽으로 접근하여 과달카날로 남하했고 물자 하역작업을 개시했다. 한편 호위임무를 맡은 타카나미는 감시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떨어져 나왔다. 한편 라이트 제독이 지휘하는 67 기동부대는 일본 함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향해 항진중이었고, 교전 돌입을 위해 미리 단종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함열 선두에 위치한 구축함 플레처는 신형 레이더를 장착하고 있어 미군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카나미의 견시가 먼저 미국함대를 발견했다. 당시 레이더 기술이 상당히 후달렸다는 점을 감안하다고 해도 일본군 견시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인에 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데, 이 조기발견이 미국의 이점을 날려버리는 한 가지 요소가 됐다. 다나카 제독은 즉시 하역작업 중지와 미군 함대 요격을 지시했다.
한편 플레처의 레이더는 3분 늦게 타카나미를 발견하고, 구축함 전대를 이끌던 윌리엄 콜 중령은 어뢰 발사 허가를 요청했다. 이는 당초 작전계획에서 상호 거리가 5km 미만일 경우 즉각 공격이 가능하고, 그 이상일 경우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은 라이트 제독이 거리 판단을 잘못하여 4분간 주저하고 있었다! 뒤늦게 라이트 제독이 콜 중령에게 어뢰 발사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미군의 발견이 늦은 3분간 전투기동에 들어간 상태였고, 라이트 제독이 주저하는 동안 어뢰 발사가 가능한 거리까지 접근하고 말았다. 아아 망했어요!
콜 중령 휘하의 구축함 전대가 어뢰 공격을 실시했지만 죄다 빗나갔고, 순양함열에서 전방에 돌출되어 있던 타카나미에 함포사격을 실시했다. 이는 타카나미가 레이더에 또렷하게 잡힌 까닭인데 그 결과 재수없게 걸린 타카나미는 70발의 명중탄을 맞고 전투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타카나미가 본의아닌 탱킹을 하게 되면서 다른 일본 구축함들이 무사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수뢰전 경험치 만렙 찍은 다나카 제독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오며 절묘한 팀워크를 과시하던 일본 구축함들에게 그야말로 농락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 구축함 전대는 손쉽게 미국의 순양함들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주포 발사 때마다 발생하는 섬광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본 측에서 발사한 47발의 산소어뢰는 정확히 순양함을 향해 파고 들었다. 결국 CA-36 미니애폴리스는 함수와 함미 보일러실을 피탄당했고, CA- 32 뉴올리언스는 전방 탄약고에, CA-24 펜사콜라는 후방 기관실에 각각 어뢰가 명중했으며 CA-26 노샘프턴은 후방기관실에 어뢰 2발을 얻어맞았다. CL-48 호놀룰루만이 단 한 발의 어뢰도 맞지 않는 기적을 보여줬다.
일본 함대는 노샘프턴에 대한 공격이 끝난 직후 완전히 철수했고, 라이트 제독은 피해를 입은 순양함들에게 개별적인 조치를 지시했고 살아남은 함대는 호놀룰루의 지휘 아래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끝났다.
5 양측의 피해
일본의 경우 구축함 타카나미의 피해가 심각했던 까닭에 결국 침몰당했다. 197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반면 어뢰를 얻어맞은 미국의 중순양함은 그야말로 안습의 연속이었다.
미니애폴리스는 함수가 너덜거리고, 여러 구획이 침수되고, 기관이 정지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보일러실 하나를 끝까지 지켜내 간신히 항해가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툴라기항에 들러 대충 조치를 취하고,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임시함수를 붙인 다음 제대로 수리를 받기 위해 진주만으로 향했다.
뉴올리언스는 탄약고에 명중당하고 함수가 36m나 날아가버려 침수 상태가 심각하여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으나, 역시 후방 보일러실과 기관실이 작동하고 있어 간신히 복구하고 툴라기항에 기항할 수 있었다. 미니애폴리스와 함께 임시조치를 마친 뉴올리언스는 호주 시드니에서 임시함수를 부착하고 역시 제대로 수리를 받기 위해 미국 본토로 떠났다.
펜사콜라는 다른 배에 비해 침수 상태는 양호했으나 화재가 심각하여 상당히 고전했다. 게다가 탄약고에서 포탄들이 유폭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황천길에 오를 뻔 했는데 재빨리 탄약고를 침수시키는 것으로 대응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툴라기항에 도착한 펜사콜라는 화재를 완전히 정리하고 대충 조치를 취한 다음,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역시 임시조치를 받은 다음 제대로 수리를 받기 위해 진주만으로 향했다.
노샘프턴은 화재로 인해 침수구역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 결국 침수방지를 하지 못했고 승무원들이 모두 퇴함한 후에 침몰했다.
정리하면 1척의 중순양함이 침몰했고 3척이 대파당해서 반 년 이상 수리를 해야될 처지에 놓인 셈이었고 395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6 그 후
미국은 날카롭게 찔린 패배(Sharp defeat)라 평했다. 무엇보다 미국은 순양함을 5척이나 동원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고작 구축함 8척에 그 중에서 6척은 물자수송을 이유로 일부 무장을 포기한 상대에게 개털렸다는 점에서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전투 직후 구축함 전대 지휘관 콜 중령은 너무 일찍 어뢰를 발사했고 순양함열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욕을 바가지로 쳐먹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이 사태에 대한 대책으로 훈련, 훈련, 그리고 더 많은 훈련(training, training, and more training)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이란 표현을 보고서에 기재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 해군, 특히 일본군 구축함의 뇌격능력을 간과한 시각이었다. 이 시점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뇌격능력을 여전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후 연구에서는 콜 중령 보다는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일본군의 어뢰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라이트 소장에게 비난의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
실제 미군 순양함들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미니애폴리스 피격 이후, 멈춰선 순양함들과 충돌을 피하려고 죄다 좌회전을 했는데 그 방향이 하필 일본 함대가 있던 방향이었다. 결국 단체 회식거리(…). 그나마 모두가 좌회전 할 때 혼자 우회전한 호놀룰루만이 한 방도 안맞고 살아남았다.
이 전투를 통해 미군은 단순히 체급이 큰 중순양함이 구축함 상대로 우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배웠다. 무엇보다 8인치 함포의 연사속도가 느려 빠른 구축함을 상대로는 효율이 떨어졌고, 이에 일본군 구축함은 5인치나 6인치 함포를 장착한 경순양함이 상대하도록 전술을 수정했다. 여기에 순양함의 포격섬광이 일본군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즉각 무섬광 포탄으로 교체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 무섬광 포탄은 일본군이 진작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뒤늦은 조치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본의 아니게 사보섬 해전 이후 많은 비중을 할애한 응급수리능력을 입증해냈다. 실제 사보섬에서 순양함들이 입은 피해는 타사파롱가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고, 어떤 면에서는 더 박살났다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순양함들 대부분이 가라앉은 사보섬과는 달리 타사파롱가에서는 1척만 실하고 2척은 함수가 날아가고, 1척은 아예 옆구리에 큰 구멍이 뚫렸음에도 무사히 응급복구를 하여 수리를 받을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이 전투로 발생한 또 하나의 나비효과로 일본군 수상함대의 전투력을 크게 경계하게 되었다. 결국 과달카날 일대에서 일본군의 쥐수송을 저지하는 방법으로 수상함대 대신 어뢰정과 잠수함,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하게 된다.
강력한 뇌격능력을 가진 일본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은 한동안 미 해군에겐 골칫거리이자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훗날 뉴조지아 전역에서 경순양함을 투입하여 블래킷 해협 해전에서는 약간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이후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쿨라만 해전, 콜롬방가라 해전)[1], 항공기와 어뢰정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동안 해상전에서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구축함이 카운터 파트가 되어야 했으며, 이들 구축함이 일본군 구축함에 대한 대응 카드가 된 것은 레이더의 성능이 개선되고, 알레이버크 제독이 새 전술을 개발하고 나서부터이다.(벨라만 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