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다 노부히코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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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uhiko Takada

프로레슬러종합격투기 관련 인물

국적일본
종합격투기 전적10전 2승 6패 2무
2서브미션
1KO, 4서브미션, 1판정
생년월일1962년 4월 12일
신장 / 체중183cm / 96kg

Takada Nobuhiko인데 다카다 노부히코'[1], '다카 노부히코'(...)(잘못된 표기) 등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으나, 일반적으로는 타카다 노부히코 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髙田 延彦. PRIDE의 총괄본부장으로 PRIDE 흥행의 선봉에 섰던 인물. MMA 링에서 프로레슬링을 시도했던 조낸 비범한 남자이기도 하다. 링네임은 광속탭 '평성 최고의 싸움꾼'

1 프로레슬링

1981년 신일본을 통해 프로레슬러로 데뷔하였으나 1984년 마에다 아키라와 사야마 사토루가 UWF를 만들 때 마에다를 따라 신일본을 나왔다. 그러나 UWF는 자금난에 빠져 1986년을 끝으로 해산했고, 타카다는 선배인 마에다를 따라 다시 신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마에다는 언제까지고 신일본 휘하에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었고, 결국 1987년 마에다 안면축격사건을 일으키며 또 다시 신일본과 결별했다. 타카다는 다시 마에다를 따라 짐을 싸들고 신생 UWF로 옮겼다. 신생 UWF는 구UWF보다도 실전 격투기에 가까운 시합을 표방한 단체였는데, 이때문인지 흥행은 성공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신생 UWF도 끝내 자금난에 부딪히게 되고 마에다와 선수들 사이에 대립구도가 형성된다. 특히 선수들의 해고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격해지며 1990년, UWF는 쪼개지게 된다. 후지와라 요시아키의 '신 UWF 후지무라 구미', 후지무라 구미에서 다시 떨어져 나간 후나기 마사카즈와 스즈키 미노루의 'Pancrase', UWF의 간판이었던 다카다 노부히코도 마에다로부터 독립해 설립한 'UWF 인터내셔널', 마에다 역시 1993년 실전 프로레슬링 단체인 Rings로 이렇게 네 갈래로 쪼개진다.

이때 타카다와 함께 활동하던 선수들로 안조 요지, 타무라 키요시 등이 있었고, 좀 더 나중에 사쿠라바 카즈시가 합류한다. 초반에는 그럭저럭 잘나갔던 UWF 인터내셔널이었지만 역시나 돈문제에 직면했고 타카다가 정계진출을 시도하며[2] 1996년 해체크리를 맞는다.

2 종합격투기

1993년 미국에서 UFC 1 토너먼트가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우승자인 호이스 그레이시는 격투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온다. 이에 안조 요지가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에 도전했다가 힉슨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고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부터 UWF 인터내셔널은 그레이시 주짓수를 물고 늘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종합격투기 단체인 PRIDE였다.

2.1 전적

1997년 10월 PRIDE 대회에서 타카다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명예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레이시 일족의 히든 보스인 힉슨과 대결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라운드에서의 관광 끝에 암바에 걸려 참패하고 만다. 암바가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광속으로 탭을 치는 굴욕을 겪고 광속탭[4]이라는 오명을 얻은 비참한 패배였으나 'U계 프로레슬링 vs 브라질리안 주짓수'의 대립구도는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고, 여기서 가능성을 발견한 DSE는 PRIDE를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흥행의 선봉장은 사쿠라바와 타카다였다. 1998년 6월 PRIDE 3에서 타카다는 당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킥복서인 카일 스터젼과 대결했다. 하지만 스터젼의 움직임은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다. 이윽고 스터젼의 하이킥이 타카다의 가드를 강타하자 타카다가 팔을 휘저으며 내동댕이쳐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워크였던 것이다.

당시 북미쪽 영상을 보면 신나게 떠들던 바스 루턴이 순간 엄청나게 당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놔 저새퀴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인가요? 반면 눈치없는 파트너는 "저 친구 왜 저렇게 오도방정을 떨죠? 원래 스타일인가요?"라며 루턴의 속을 긁었다.

타카다는 태클을 허용하여 가드에 몰리지만 2분만에 힐훅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 경기는 스터젼의 유일한 MMA 시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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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PRIDE 4에서는 힉슨과 재대결했으나 역시 암바에 걸려 졌다.

1999년 4월 PRIDE 5에는 UFC 초대 헤비급 챔피언인 마크 콜먼과 대결했다. 'UWF 수장 vs UFC 왕자' 구도의 대결은 일본팬들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으나, 이번에도 타카다는 무기력하게 콜먼의 태클에 유린당하며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하위에 깔린 타카다가 콜먼이 상체를 일으킨 틈을 타[5] 콜먼의 다리를 잡고 힐훅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관중들의 미친듯한 환호에 경기장은 떠나갈 듯 달아올랐고 일본의 해설진은 광란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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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라운드 콜먼의 움직임은 너무 이상했다. 상위를 잡고도 제대로 공격을 하지 않은 채 애매하게 타카다의 허벅지만 두들겨 댔고, 더불어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도 "난 두 아이의 아버지다. 거절할 수 없는 오퍼였다."고 말하며 의혹을 증폭시켰다. 그 뒤 한 기자가 다시한번 마크콜먼에게 이 시합의 워크의혹에 대해 묻자 콜먼은 노코멘트라고 말하며 답변을 회피했다. PRIDE의 브라질 해설가는 중계 중 대놓고 이 시합이 워크라고 말한다. 결국 PRIDE 해체 후 이 시합 역시 워크였음이 드러난다.

이후 마크 커, 호이스 그레이시, 이고르 보브찬친 등과 대결하지만 모두 참패한다. [6]2001년 11월에는 PRIDE 17에서 미르코 크로캅과 대결했는데 이노키알리만 줄창 나온 끝에 무승부(...)로 끝났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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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다의 마지막 MMA 시합은 2002년 11월 PRIDE 23에서 타무라 키요시를 상대로 한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타카다는 타무라의 펀치에 맞아 KO패를 당하게 된다. 타무라는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고 지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2년 동안 꿈과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타카다는 "더 이상 아무 미련도 없다. 타무라 넌 최고의 악역이였다."라고 답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타무라를 부당하게 악역취급했다고 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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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이 시합도 워크 의혹이 있다. 일단 KO 직후 타카다의 표정이 이상했다. 패배를 맞은 선수의 표정이라기보다는 뭔가 충격에 빠진 듯한 어이없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타무라의 마이크웍 또한 의혹의 여지는 충분하다. 훗날 팬들의 의견은 '타카다가 승리하는 각본이었는데 타무라가 실수를 했거나, 일부러 엎어버린 것'으로 모아진다. 하 시발 멋있게 이기고 은퇴하려고 존나 연습했는데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사람 사이에 UWF 시절부터의 알력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무라는 UWF 인터내셔널의 간판이었으나 마에다 아키라의 Rings로 이적하며 타카다의 눈밖에 난다. 타무라 역시 정계 진출 때문에 UWF를 그만둔 타카다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자못 감동적인 은퇴전이었다. 이후 타카다는 현역에서 물러나 PRIDE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2.2 파이팅 스타일

U계 프로레슬링을 베이스로 하고 있다. 실전지향 프로레슬링이었으나 다른 대부분의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MMA에서 경쟁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답이 없다.

하지만 MMA자체의 실력은 저조하기는 하지만 MMA 시합에서 프로레슬링을 해댄다는 쇼맨십 강한 스타일이 일본에서는 인기를 모았기에 스타 선수가 부족했던 초기 시절에 일본의 간판 스타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후에 이러한 쇼맨십을 중시하는 스타일의 대표적인 성공케이스가 쇼맨십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고 저조한 성적에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미노와 이쿠히사, 실패케이스가 지나치게 쇼맨십에 의존하려다가 막장테크를 타버린 타니가와 프로듀서 시절의 K-1이라고 보면 될 듯.

2.3 기타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한 이후로도 PRIDE의 얼굴마담으로 활동하면서 인기몰이에 한몫을 톡톡히 했다. 현역으로 얻어터지던 시절보다 이때가 더 멋있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 사실 미남형 외모에 큰 키, 더불어 프로레슬러로 활동하며 익힌 마이크웍 때문에 이쪽 방면으로는 최적의 인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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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에서 태고를 치던 모습. 많은 외국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일본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워크의혹이 난무하긴 했지만 당시 일본팬들은 타카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MMA의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PRIDE 가 출범하던 시절만 해도 일본에서는 프로레슬링과 실전격투기의 구분이 희미하던 시절이었다. Rings의 마에다 아키라나 Pancrase의 후나기 마사카즈, 스즈키 미노루도 실제로 시합을 뛰었는데 타카다 역시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

결국 PRIDE 해체 후 방송에서 실전에서 거둔 승리는 전부 워크였다며 양심선언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물증이 없다. 그런데 해당 발언의 사실여부를 떠나 팬들은 양심선언이 아니라 확인사살로 간주한다(...). 뭐 이제와서 새삼스레 그런 얘길 하냐고(...). 거기에 무승부 경기에도 여전히 의혹이 따라다니고 있다.

이후 카네코 타츠히코라는 스포츠라이터가 출판한 "울보"라는 책의 인터뷰에서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폭로하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지만, 실제로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일본 프로레슬링계와 격투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무(武)를 숭상하며, 투기 종목에 대해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종합격투기는 당연한 것이며, 프로레슬링도 일종의 투기로 취급하여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구도자"같은 캐릭터가 깔려 있는 상황. 따라서 미국의 프로레슬링 팬들이 프로레슬링을 짜고 치지만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로 받아들이는 대신 일본의 프로레스 팬들은 짜고 치는 건 알지만 짜고치지 않는 또 다른 의미의 격투기로 받아들인다. 이런 묘한 괴리의 사이를 찌르는 이 폭로서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러분이 짜고 치는 거 안다는 걸 나도 아는데 짜고 치는 게 프로레슬링입니다라는 식의, 자신의 악역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 불과했다. 실제로 이후 다카다는 허슬이라는 프로레슬링 단체를 창립하여, 마치 빈슨 장군을 연상시키는 다카다 총통이라는 캐릭터를 스스로 연기하며 등장했다(...).

마에다 아키라가 일본 프로레슬링이 종합격투기로 변모하는 시기에 활동했다면, 타카다는 MMA가 어느정도 정립된 시점에 활동했다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마에다와는 달리 참혹한 전적을 떠안게 되었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PRIDE의 실세는 아니다. 실세는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대표다, 일단은.

이때문에 UFC의 데이나 화이트와 비교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고 지분도 소유하고 있는 화이트에 비교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쪽은 S급이긴 했지만 그냥 얼굴마담.

한때 일본의 까들에 의해 재일교포라는 말이 돌기도 했으나 역시 확인된 바는 없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준거하면 이쪽이 정확한 표기이다.
  2. 실패로 끝났다. 여담이지만 자기 동네에서는 인망도 있고 인기도 많았지만 정작 현지 주민들을 기어이 그를 뽑지 않았다(...).
  3. 둘다 워크다.
  4. 사실 서구적인 관점에서는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으로 비웃더라도 그럭저럭 넘어가겠지만 일본에서는 별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5. 라고는 하지만 2라운드에는 줄곧 서 있었다.
  6. 중간에 PRIDE 7에서 프로레슬러 알렉산더 오츠카를 RNC로 꺾으며 연패의 사슬을 끊긴 했으나 사실 이 경기는 전후 사정으로 보나 경기 내용으로 보나 종합격투기를 표방한 프로레슬링 경기였다(...). 다카다가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프로레슬링스러운 움직임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DVD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애초에 자기가 이긴 시합은 워크라고 밝히기도 했고. 그 때문인지 이 경기는 셔독 전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냥 직접 보자. 너무 티가 나서 경기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셔독에서 괜히 뺀게 아니다
  7.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1라운드에 크로캅의 왼쪽 종아리에 오른발로 로우킥을 시전한 이후 1라운드 종료후에 가진 인터벌타임에서 타카다의 오른발 발등이 야구공 1개의 크기로 심하게 부어있었다. 이후 타카다는 TV인터뷰에서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발이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고, 경기 종료 후 의료진에 의해 전치 2개월의 진단이 떨어졌다. http://youtu.be/-2KP7r4Rag8?t=15m5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