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ce Gracie
국적 | 브라질 |
종합격투기 전적 | 20전 15승 2패 3무 |
승 | 12서브미션, 1 TKO, 2판정 |
패 | 3KO |
생년월일 | 1966년 12월 12일 |
신장 / 체중 | 183cm / 80kg |
주요 타이틀 | UFC 1 토너먼트 우승 |
UFC 2 토너먼트 우승 | |
UFC 4 토너먼트 우승 |
브라질리안 주짓수를 MMA로 전파하여 현대 종합격투기의 서막을 연 전설적인 파이터.
관련항목 : UFC 역대 챔피언 |
1 전적
- 무승부 : 켄 샴락, 요시다 히데히코, 도코로 히데오
1966년 엘리오 그레이시의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난 호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주싯수를 접했고 8세 때부터 토너먼트에 출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수차례 토너먼트에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17세의 호이스는 큰형 호리온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미 1978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밑바닥에서부터 생계를 꾸려오던 호리온은 어느덧 100명 가까운 문하생을 보유하고 있었다. 파이터로서의 재능 뿐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났던 그는 미국에서 인맥을 쌓으며 사업확장에도 열심이었고, 호이스는 이런 호리온을 대신하여 사범대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절, 호이스는 수많은 도장 깨기 도전자들과 대결해 승리했다고 한다. 가라데, 쿵후 등 많은 격투가들이 그에게 패배했고, 이 장면들을 담은 비디오는 고스란히 홍보영상으로 편집되어 호리온의 '그레이시 주짓수' 홍보에 이용되었다.
1993년 호리온은 미국의 지인들과 모종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유수의 격투가들을 불러모아 펼치는 격투 토너먼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UFC의 시작이었다. 호리온의 지명으로 참가 선수들이 결정되었고, 이들과 맞설 그레이시의 대표자를 결정할 차례가 돌아왔다. 부친 엘리오가 브라질에서 거뒀던 승리로 작은 체구로 거한들에게 승리한다라는 컨셉이 가진 매력을 잘 알고 있던 호리온은 켄 샴락, 제라드 고르듀, 타이라 툴리 등의 거구와 맞설 후보자들을 추려 보았다.
힉슨 그레이시는 일족 최강으로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체격이 너무 커서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고, 무엇보다 도장 문제로 호리온과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호일러 그레이시는 체격도 작고 화려하고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작기 때문에 혹여라도 패배할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선수가 바로 호이스였다. 얼핏 보기에는 호리호리하고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인한 육체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부터 늘 곁에 있어준 호이스에 대한 신뢰도 남달랐을 것이다.
1.1 UFC
1993년 11월 펼쳐진 원데이 토너먼트의 1차전 상대는 전직 복서인 아트 짐머슨이었다. 한 손에만 복싱 글러브를 낀 채 등장한 짐머슨은 호이스가 마운트를 빼앗고 박치기를 시전하자마자 탭을 쳐버렸다.
2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일본 Pancrase의 제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인 켄 샴락이었다. 샴락은 호이스의 태클을 막아내며 오히려 겨드랑이를 파 톱 포지션을 잡고 마운트를 시도한다. 호이스는 샴락의 오른쪽 다리를 잡아 마운트를 저지한 후 가드에서 다리로 허리를 감아 일어서려는 샴락을 다시 그라운드로 끌고 내려왔다. 호이스는 가드에서 샴락의 오른팔을 잡고 있었고, 샴락은 호이스의 왼쪽 다리를 잡고 하체관절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오른팔이 잡혀 있던 상황에서 뒤로 누워버렸기 때문에 상위를 호이스에게 빼앗겨 버렸고, 호이스는 몸을 일으키는 샴락에게 리어네이키드 초크를 성공시키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57초.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3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극진공수도의 제라드 고르듀였다. 허나 샴락과 싸우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올라온 호이스와는 달리 고르듀는 1차전에서 스모 선수인 타이라 툴리를 만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1]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고르듀는 2회전에서 자신보다 덩치가 큰 킥복서를 KO시키고 결승전까지 왔다. 호이스는 테이크 다운에 이은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고르듀를 1분 44초만에 제압하며 UFC 초대 대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1994년 3월에 열린 UFC 2 토너먼트에서는 하루에 4번의 대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결승에서 만난 태권도 베이스의 입식 타격가 패트릭 스미스(앤디 훅을 이긴 적도 있다!)를 1분 17초만에 쓰러뜨렸다.
그러나 1994년 9월의 UFC 3 토너먼트에서 호이스는 제대로 임자를 만나게 된다. 막싸움계의 거성으로 일컬어지는 키모 레오폴도와 머리끄덩이를 쥐어뜯는 진흙탕 싸움 끝에 탈진해버린 것이다. 키모와의 대결은 암록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나치게 체력을 소진해버린 호이스는 다음 상대인 헤럴드 하워드와의 경기에서 기권하고 만다.[2]
그레이시도 한물 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으나, 1994년 12월 출전한 UFC 4 토너먼트에서 키스 해크니, 댄 세번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압하며 정상에 오르며 이러한 목소리들을 모두 잠재웠다. 결승에서 만난 세번의 강인한 육체에 눌려 상위를 내주었으나, 15분간 계속된 가드 게임에서 한순간에 트라이앵글 초크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1995년 4월 UFC 5에는 토너먼트가 아닌 원매치 이벤트에 출전, 기다리고 기다리던 켄 샴락과의 2차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지리한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무승부가 선언된다. 특히 장기전 전략을 들고 나왔던 샴락은 관중들의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한편 호이스와 샴락이 불참한 채 진행되었던 토너먼트에서는 4회 준우승자인 세번이 우승을 차지했다.
UFC 토너먼트 3관왕에 오르며, 호이스는 그레이시 주짓수의 이름을 전 미국에 널리 알렸다. 특히 토너먼트 1에서 일본 Pancrase의 켄 샴락을 꺾은 일은 미국을 넘어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UFC 5를 마지막으로 NHB가 막을 내리고 글러브, 판정, 라운드제 등 룰이 도입되면서 그레이시는 UFC를 떠나게 된다.
1.2 PRIDE
한편 판크라스의 제왕이었던 켄 샴락의 패배[3]는 일본에서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타카다 도장의 에이스였던 안조 요지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으로 찾아가 힉슨에게 도전했다가 관광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타카다 노부히코는 일본 U-프로레슬링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레이시를 쓰러뜨릴 것을 결심하고 1997년 힉슨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리벤지에 나선다. 타카다 역시 힉슨에게 관광을 당하지만 이 시합은 엄청난 관중수익을 기록하며 PRIDE의 모태가 되었다. PRIDE는 이후 많은 그레이시 파이터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본의 프로레슬러들과 대전시키며 성장해 간다.
호이스도 2000년 1월 무차별급 그랑프리 오프닝에 출전, 타카다 노부히코에게 1라운드 관광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2000년 5월 그랑프리 결승 토너먼트에서 만난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패하며 생애 첫 패배를 기록하고 만다. 그레이시측이 요구한 무규칙룰로 진행된 1시간 30분의 대결에서 사쿠라바의 장기인 그래플링에서의 변칙적이고 기상천외한 움직임[4]을 보여준 사쿠라바를 상대로 호이스는 거의 탈진한 모습을 보였으며, 결국 코너가 타월을 던지며 TKO패가 선언되었다.
2002년 12월의 PRIDE 남제에서는 일본의 유도 영웅 요시다 히데히코와 대결했다. 요시다의 MMA 데뷔전이기도 했던 이 시합은 요시다에게 다소 유리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마운트를 차지한 요시다가 깃초크를 넣었고 호이스가 기절했다고 심판에게 어필을 했다. 이 어필이 받아들여져서 요시다의 서브미션승이 선언되었는데...호이스가 벌떡 일어나며 항의를 하는 바람에 판정에 크게 논란이 일었다.
호이스는 탭도 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상당히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호이스측에서 맹렬한 항의가 이어졌다. 호이스는 리매치가 아닌 시합을 무효로 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요시다는 '그럼 좋다. 대신 마지막의 그 포지션에서 시작하자.'라고 맞받아쳤다. 더 웃긴 것은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서 이 시합이 무효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5] 그래서 셔독에서는 이 경기를 아예 전적으로 올려놓지도 않았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둘의 재시합은 이듬해인 2003년 12월의 남제에서 열렸다. 그레이시측은 이 시합을 판정이 없는 특별룰로 할 것을 제안했고, 일본인 심판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심판도 미국인이 맡았다. 호이스는 깃초크를 당했던 1차전을 의식한 듯 도복 상의를 벗고 나왔다. 결과는 관광에 가까운 호이스의 우세였다. 비록 제한시간을 모두 써버리면 무승부로 결정하는 룰에 따라 승부를 결정짓지는 못했으나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요시다를 본다면 누가 승자인지는 자명했다. 요시다는 이 전 이후 아직 종합으로 넘어온지 얼마 안된 마크 헌트를 암바로 잡고 재기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강자들에게 얻어맞으며 미르코 크로캅, 제임스 톰슨, 조쉬 바넷에게 차레차례 관광당하고 그저그런 선수로 남게됐다.
1.3 그 이후
2004년 12월에는 K-1 다이나마이트에서 아케보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특이사항은 이 시합이 셔독에서 선정한 '가장 괴상한 경기 베스트 10(10 Great Freak Matches)'에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아케보노가 나와서 괴상하지 않았던 경기가 있었냐마는.
이후에는 2005년 12월 K-1 다이나마이트에서 토코로 히데오와 고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였는데 이게 꽤 이색적인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는 호이스 그레이시가 골리앗이었기 때문이다. 다윗 포지션으로 유명한 호이스지만, 이 경기 상대였던 도코로는 페더급 파이터로서 신장차는 약 15cm차이가 났는데 무체급매치로 펼쳐진 경기였다. 도코로를 신데렐라로 만든 경기였다. 도코로는 청소부를 겸하는 무명의 프리터 파이터였으나 7월 데뷔전에서 제4대 슈토세계라이트급 챔피언 알렉산드레 프란카 노게이라를 화끈한 백스핀블로우 한방으로 실신시키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상태였는데, 12월 31일 연말대회에 호이스라는 초거물과 붙게된 것이다. 사실 미스매치 느낌이 심했는데, 호이스는 일본의 유도영웅 요시다(라헤급~헤비급에서 놀던)에게도 사실상 이긴 경기를 펼쳤을 정도였고 1년전 아케보노 따위는 가볍게 꺾는 등 헤비급과도 붙던 파이터인지라 도코로와 체급 차이가 심하게 났으며, 전적을 봐도 당대 초거물급들과 붙던(켄 샘락,사쿠라바 등 중량급 강자들) 호이스와 도코로는 비교불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그레이시룰로 인해 무승부로 끝났으나, 사실상 도코로가 이긴 경기였다. 경기 자체는 꽤 명승부였다. 타격, 그라운드 가리지 않고 펼쳐졌는데,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맹공을 퍼붓는 도코로와 이에 방어하느라 급급한 호이스의 양상이었다. 그라운드전도 상당히 명승부였는데 지루한 개비기 양상이 아니고 그라운드에서 쉴새없이 엎치락뒷치락하는 공방이 펼쳐졌는데 그라운드전을 싫어하는 사람도 긴장하며 봤다는 댓글이 많았을 정도로 상당히 수준높은 그라운드 공방전을 보여줬다. 경기 후 그레이시측에서 도코로에게 다가와 칭찬하며 인정할 정도로 명승부였다. 그동안 호이스는 라헤급, 헤비급 등 덩치큰 파이터들을 꺾으면서 다윗으로 유명했는데, 이 경기에선 처음으로 자신보다 작은 파이터와 싸우며 골리앗 역할로서 '다윗' 도코로를 빛내주는 역할이었으니 이색적인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5월 12년만에 다시 UFC에 찾았지만 이미 UFC는 이전의 어중이떠중이들의 UFC가 아니었다.
결국 UFC 60에서 맷 휴즈에게 보기좋게 KO로 패배하셨다.
이미 UFC는 과거의 반쪽짜리파이터들의 힘겨루기 대회가 아닌 제대로된 종합격투 메이져단체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2007년 6월에는 왕년에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사쿠라바와 7년만에 재격돌해서 승리하기도 했다. 1라운드 초반 다운을 빼앗기도 했지만 본인 스타일대로 잘 이끌고 나가면서 결국 만장일치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다만 경기가 끝난 다음에 호이스 그레이시가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며 크게 체면을 구겼다.
2010년 셔독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경기를 가질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이미 생각해 놓은 대전상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지나 2016년 2월 19일(한국시간 2월 20일) 벨라토르 149에서 켄 샴락과 경기노인정 매치했다. 결과는 클린치에서 로우블로(...)에 이은 니킥으로 큰 타격을 준 뒤 테이크 다운을 성공한 후 파운딩을 넣어 1라운드 2분 22초만에 TKO승(!)을 거두었다. 호이스에겐 첫 TKO 승리였다.
다만 심판이 로우블로를 보고도 개입하지 않았고, 샴락도 경기 이후동안 한참을 그곳(...)을 잡은채 불만을 표시해서 결과가 영 찝찝해졌다.. 요즘 벨라토르의 행보를 보자면 2차전까지 갈 수도...? 켄 샴락이 경기 이후에 도핑이 적발되면서 노인정 매치 -> 로우 블로우 -> 도핑 적발이라는 막장의 3연타를 달리는 이벤트가 되었다.
2 파이팅 스타일
아직 그라운드와 서브미션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 수준높은 그라운드 기술을 선보이며 넘사벽의 실력을 구축했다. 격투기란 으례 입식타격기를 연상했었고 그래플러들조차도 대개 관절기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깊이를 가진 그레이시 주짓수는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운 전법이었다. 노업 저글링 사이에 뛰어든 다크 템플러랄까.
초창기에 호이스가 보여준 모습은 '닥치고 그라운드'였다. 일단 상대를 넘어뜨린 후, 가드패스, 섭미션으로 가는 주짓떼루의 필승공식을 보여주었다. 그라운드와 스탠딩의 개념은 물론 테이크다운 디펜스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어있지 않던 시절 상대 선수들은 호이스의 태클 한방에 추풍납엽처럼 나가떨어졌고 일단 그라운드로 가면 일사천리였다. 샴락이나 세번 등 파워리프터형 레슬러들에게는 역으로 깔리기도 했으나 가드에서 섭밋시켜버렸다. 이렇듯 상위와 하위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기술을 무력화하며 자유자재로 관절기를 완성시키는 모습은 마치 마술사와도 같았다. 타격에 대처하기 위해 주짓수 이외에도 스스로 복싱등 타격기를 연마하기도 했다. 도복을 정말 잘 활용하기도 했다.[6]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도 점차 그레이시의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하자 그의 연승행진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사쿠라바는 호이스의 움직임과 전략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호이스의 도복을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7] 룰이 도입되고 규정이 바뀌면서 MMA가 스스로 진화했고, 이에 따라 선수들도 세대를 거듭하며 기량이 놀랍도록 향상되면서 예전과 같은 극강의 포스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특히 UFC 60에서 가진 맷 휴즈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클린치에서 오히려 자신이 TD를 당했고 사이드 마운트에서 무리하게 빠져나오려다가 백 마운트를 잡힌 뒤에 파운딩에 떡실신을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MMA 선수들의 TD 디펜스 능력이 향상되었고 주짓수 스킬이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 당시 40세였던 나이를 패인으로 들 수도 있으나 기량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사실 토너먼트 시절의 UFC는 제대로된 프로선수들의 경기보다는 무규칙인데다가 프로레슬링이나 레슬링 복싱등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별다른 대비없이 출전하던 곳이기에 이때와는 레벨자체가 몇수는 아래일때의 상황이었다.
물론 MMA의 역사를 논할때마다 UFC 초창기 대회가 엄청나게 중요한 역사로 인정되고 있는건 부정할수없다.
3 기타
UFC 1 토너먼트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한 후에 "나의 형인 힉슨은 나보다 10배는 강하다."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힉슨이 누구냐', '호이스가 저렇게 강한데 그럼 힉슨은 얼마나 강한거냐'며 혼란에 빠졌고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힉슨이 한순간에 유명세를 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그레이시도.
한편 이 말로 호이스를 2인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헨조 그레이시도 힉슨이 호이스보다 훨씬 뛰어난 파이터라고 말했다. 힉슨이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우는 것을 피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레이시의 MMA용 결전병기는 호이스라고 보는 게 마땅하다는 시각도 있지만, 힉슨이 싸움을 피한 거야 90년대 후반 이후의 이야기이고 그 전까지만 해도 발리 투도 제팬을 두 차례 평정하는 등 활약을 보인 바 있다(발리 투도 제팬은 UFC 탄생 이후에 열린 이벤트이며 UFC 1의 제랄드 고르듀도 참전했었다). 힉슨이 조 로건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UFC에 참전하지 못한 경위를 질문 받자 '호리온이 호이스가 출전하기를 원했고, 난 호이스의 훈련 코치이자 백 업 플랜이었다. 만약에 호이스를 꺾는 상대방이 나온다면 내가 그 다음 타자로 나갈 계획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힉슨은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호리온이 자신의 사업을 통제하기 위해서 더 욕심 없는 호이스를 중용한 거라는 추측도 있다.
비록 순수 주짓수 분야에서의 업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8] MMA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현대 종합격투기 선수들 중에는 어린 시절 호이스에 매료되어 진로를 결정한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UFC 웰터급 챔피언 조르주 생 피에르,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료토 마치다, UFC 헤비급 챔피언 프랭크 미어, PRIDE 2006 웰터급 GP 준우승자 데니스 강 등이 있다. 사실 하나하나 따지자면 끝이 없을 정도. 특히 미국에서는 UFC의 영향으로 힉슨을 능가하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MMA가 아니라 스포츠 주짓수 쪽을 봐도 인터뷰를 보면 십중팔구 '호이스를 보고 주짓수를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UFC 1 토너먼트는 종합격투기의 역사를 논할 때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회이다. 카와하라 마사토시의 만화 수라의 문 또한 이 대회를 오마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토너먼트의 참가선수들은 그레이시측의 지명으로 결정되었고 대진 또한 호리온이 결정했는데 그레이시에게 상당히 유리한 대진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즉, 상성상 불리한 툴리오를 고르듀에게 붙이고 호이스는 듣보잡 복서인 짐머슨과 대결해서 1차전을 거저 먹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짐머슨이 승패와 관련없이 2만달러 상당의 금액을 지급받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9] 더욱 논란이 되었다. 결승에서 만난 고르듀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다시피한 몸으로 싸워 패배하였고 대진의 불합리함을 강하게 어필하기도 했다. 이는 수라의 문에서도 오마쥬도었다.
하지만 이와 관계없이 호이스는 2차전에서 샴락이라는 최강의 난적을 스스로 제압했고, 고르듀전 역시 부상의 덕을 보긴 했으나 애초에 기량 차이가 넘사벽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시 호이스의 기량은 원매치 방식으로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토너먼트의 특성상 보다 확실하게 우승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10] 여담으로 고르듀는 호이스의 귀를 물어뜯으려 했었다.[11]
발리 투도형 무규칙룰의 신봉자로 룰에 의해 스포츠화 되어가는 현대 격투기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다. 또한 격투기들이 실전성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Inside BJJ에서 한 인터뷰에서는 "격투기들을 가장 망치는 건 스포츠화야. 상대를 두들겨 패는 법보단 점수를 얻는 법을 가르치지. 요즘엔 그냥 살짝 톡 치고 점수를 얻는 식이라고. 태권도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닌데 말이지. 태권도는 정권공격으로 상대의 가슴에 구멍을 뚫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술이었어. 이세계 태권도인가 가라테랑 유도도 마찬가지고... 유도는 메치기로 상대의 머리를 바닥에 꽂아 말 그대로 '끝내' 버리는 무술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그러면 안돼요. 부드럽게 메쳐야 해. 이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야. 실전에서는 점수 따위 없다고"라고 대답할 정도. 더불어 주짓수 대회에서도 점차 점수벌기식의 플레이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좀 그렇다고. 근데 그렇게 안하면 망한다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 2004년 UFC 45에서 과거의 숙적이었던 켄 샴락과 함께 시상을 받으며 주위를 훈훈하게 했다.
다른 그레이시 파이터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비공식 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2011년 3월 12일자 기사#에서 UFC 복귀가능성 언급이 나왔다.
UFC 초창기를 빛냈던 전설이었고 계약할 가능성도 있긴하다. 헨조 그레이시도 UFC에서 경기를 치른적이 있고...그냥 떡밥매치였지만 하지만 호이스의 체격을 감안할때 UFC웰터급을 뛰어야 하는데 UFC내에서도 웰터급쪽은 레슬게이 들의 경연장인 체급이다. 전성기에도 레슬링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물론 초창기 땐 그런 개념자체도 없었지만 전성기를 한참 넘긴 호이스가 이런 레슬게이들을 상대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라이트급으로 가기에는 감량의 고통도 크고 호이스의 나이 때문에 그걸 배겨내기 쉽지 않을것이다. 그냥 전설의 귀환이란 컨셉으로 데이나 화이트가 떡밥매치용으로 계약하는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제임스 토니와 비슷한 형태가 될듯
그러나 2016년 실제 복귀한 곳은 UFC가 아닌 Bellator MMA였다. 첫 상대는 켄 섐락(...)
- ↑ 쓰러진 툴리를 걷어찼는데, 툴리의 이빨이 부러지면서 그 중 2개가 고르듀의 발에 박혔다. 그리고 손목에도 골절이 있었다고 한다.
- ↑ 리벤지를 위해 출전했던 샴락도 부상으로 기권했다. 결승에 오른 하워드는 대체선수로 투입된 스티브 제늄에게 패배한다. 제늄은 딱 한 번 싸우고 토너먼트 우승에 오른 셈이다. 리저브 매치에 대한 대비책이 미약했던 초창기 MMA의 병크.
- ↑ 2차전은 기록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호이스가 다소 유리한 공방이었다.
- ↑ 호이스의 가드 포지션에 들어가지 않고, 허리에 멘 주짓수 띠를 잡아당겨 호이스를 끌어온 뒤 파운딩을 쳤다.
- ↑ 요상한 판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 번 내려진 승패선언이 번복된다는 것 또한 레프리의 기량과 단체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PRIDE가 원래 좀 이런 경향이 있었다...
- ↑ 샴락 1차전에서는 샴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그립을 성공시켰다. 도복은 질기고 튼튼하기 때문에 일단 잡기만 하면 초크를 완성시키는 것이 수월하다. 땀을 흡수하여 미끄러움을 없애주는 효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도복을 잡으려고 한다면 그 느낌을 통해서 상대방의 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호이스가 도복을 입고 출전하기로 한 것은 단순히 주짓수의 전통적인 복장을 착용하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
- ↑ 스스로가 초크를 완성시키기에도 좋지만 상대방이 잡기에도 좋다.
- ↑ 호리온의 상표등록건도 있고 해서 주짓수 신봉자들에게는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특히 브라질 내에서는 파란띠 정도의 실력밖에 없다고 까인다.
- ↑ 우승 상금이 5만달러였다.
- ↑ 하지만 확실히 파인 플레이는 아니다.
- ↑ 넘사벽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입식으로만 따진다면 제랄드 고르듀는 전설적인 파이터였다. 유럽의 킥복싱 무대에서 거의 무적의 포스를 자랑했고 일본에서도 고정팬이 많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일본에서 경기할때 나가이 유키라는 일본 선수의 눈을 계속 찔러서 실명시킨 적도 있다. 그런데 정작 경기에선 나가이 유키에게 섭미션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입식으로만 경력을 쌓은탓에 그라운드는 당연히 젬병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그를 저평가할 순 없다. 스모 출신인 테일라 툴리를 잔인하게 걷어차서 이빨 두 개가 그의 발에 박히고 나머지 한 대는 중계석 쪽으로 날라간 끔찍한 동영상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