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터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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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터키는 이웃 국가인 그리스와 이슬람의 서진이 시작된 무렵부터 앙숙이었다. 하자르 칸국, 불가리아, 셀주크 제국, 룸 술탄국, 오스만 제국 등등 동로마 제국과 튀르크계 국가들은 끝없이 반목해 왔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이 참패하고 1204년 제4차 십자군까지 연타당하며 쇠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14세기 이래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점령하면서[1]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트레비존드 제국까지 합병당한 뒤, 헬레니즘의 후예인 '그리스 세계' 전역이 튀르크의 판도에 들어간다. 그야말로 그리스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이후 간헐적인 독립 움직임이 몇 번 있었지만 튀르크에 의해 대부분 쉬이 진압당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한 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끄트머리 일부 때로는 테살로니카 같은 대도시를 를 수십 년 간 영유한 적이 있었다[2]. 해운국이고 도시국가인 베네치아로서는 거대한 영토형 국가인 튀르크처럼 거대한 영역을 그리스에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 1830년 그리스의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19세기 초 쟁쟁한 열강의 동방문제에 의한 지원에 힘입어 그리스는 가까스로 독립한다. 이때부터 양국의 대립은 점점 더 강해졌다. 1850년대부터 양국은 러시아-튀르크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혹은 그 사이사이마다 무력 충돌과 작은 규모의 전쟁을 계속했으며, 1896년 크레타 섬의 정교도 반란으로 일어난 크레타 전쟁 때는[3] 이듬해까지 그리스와 튀르크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96년 전쟁 당시 그리스는 테살로니키 일대의 발칸반도 북부까지 점령하려 북진했지만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혔고, 한편 러시아의 압력으로 전쟁은 오스만 제국이 크레타 섬을 독립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크레타에는 크레타 자치국이라는 사실상 그리스의 괴뢰국가가 들어섰으며 [4] 결국 발칸전쟁 직전인 1911년에 계획대로 그리스에 합병되는 수순을 밟았다.

이런 상태에서 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의 영토를 노리고 튀르크와 전쟁에 돌입하여 튀르크를 몰아붙이자, 그리스는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루마니아와 동맹을 맺고 -발칸 동맹- , 1912년 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니 이것이 제1차 발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동맹군은 열강의 예상을 깨고 튀르크군을 격파해 발칸 반도에서 튀르크를 거의 축출했다. 그리스도 '마케도니아'[5] 남부를 손에 넣고 테살로니키를 장악했는데, 이때의 대성공으로 튀르크와 그리스와 관계는 크게 역전된 것처럼 보였다.

이런 기세를 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국의 힘을 과대평가한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 고토를 회복하고,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을 보호한다며 터키의 본토인 아나톨리아에까지 침공하면서 터키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6]. 그리스 본토에서 벌어진 독립 전쟁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게릴라전으로 터키, 이탈리아 등의 강대국도 물리친 그리스였으나… 터키의 홈그라운드인 소아시아에서는 패배하여 역으로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그리스계 주민이 죄다 쫓겨나 버렸다[7]. 다만 로잔 조약에 따라 에게 해의 섬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것까지 죄다 그리스에게 넘어갔다(...). 같은 전범이었던 독일에 비하면 좋은 대접이었지만... 현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섬들까지 그리스 영토가 된 것은 터키의 해군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현재의 국경선이 설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이며,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연합군의 우두머리인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그리스-터키 전쟁을 지켜보다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져서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스탄불 부근의 땅 아니면 에게 해의 섬들 둘중 하나를 가지라고 제안하자 터키 정부가 이스탄불 주변 땅을 가지겠다고 선택해서 에게 해가 그리스 땅이 된 것이다[8]. 그리스는 제 1차 세계대전 연합국으로 참가해 득본 셈. 터키는 독일편을 든 덕분에 영국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9] 이것 때문에 아직도 싸우고 있다.

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리스가 나치에 의해 털렸을 때 터키는 내심 고소했겠지만(…), 그래도 터키는 세계대전의 마지막 순간 직전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그리고 소련의 대두에 불안해진 두 나라는 미국에 의해 사이좋게(?) NATO에 가맹하기에 이르렀으나…

이제 두 나라 국민감정의 악화가 극에 달한 나머지 터키인은 TV에 그리스인이 나타나기만 해도 토마토를 던지며 괴성을 지른다고 한다.[10]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리스 국대 나올 땐 그야말로 토마토 축제가 열리겠구나[11]

1970년대 이후 오스만 제국과 영국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인 키프로스를 두고 양국간의 전투가 벌어진 뒤에는 키프로스를 남북으로 쪼개져서 각자가 지원하는 정부를 세워버림으로서 비공식 분단국을 만들어 놓았다. 터키가 지지하는 북 키프로스(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에는 터키인을 마구 이주시켜서 인종비율까지 변해버렸다. 그러나 북 키프로스를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오직 터키 뿐이다

심심하면 국경지대에서 군인들이 총격전도 벌인 바 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서《먼 북소리》을 봐도 1980년대 그리스 여행갔더니 터키와 국경분쟁으로 그리스군이 터키군 총에 맞아 죽은 일로 사람들이 터키 욕을 하고 있더란다. 며칠 뒤에 터키 여행갔더니 터키 사람들도 똑같이 터키군도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그리스 욕을 하고 있고(…)

헐리웃에서 대박을 거둔 영화 <나의 그리스 결혼>이란 영화에서는 터키놈들처럼 멍청하게~ 라는 말이 욕으로 나오는 그리스인들이 자주 나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터키와 그리스는 이제 형제에요."라는 드립도 나온다.

4 무기구입

또한 두 나라 전투기끼리 서로 꼬리물기를 하는 (하지만 무장을 발사하지는 않는) 일촉즉발 상황이 발생한다. 심지어 이 와중에 공중충돌 사태가 나서 두 나라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두 나라 모두 미국에서 구매한 F-4F-16을 주력으로 쓰고 있다(터키와 그리스의 경쟁덕에 돈 버는 것은 미국…?)[12]

그리스가 BMP-3 구입계약을 러시아와 체결하면서 터키의 K-21 도입이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 이유는 간단하다. 터키는 만약 그리스가 신무기를 산다면, 터키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무기를 같은 수량으로 산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BMP-3와 동급이면서 터키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서방제 무기는 K21이기 때문.

만약 K21의 구입계약이 진짜 체결된다면, 터키는 세계에서 첫번째로 한국제 기갑무기 패키지(…)를 갖게되는 나라가 된다(K-9 + K-2 + K-21). 어쩌면 한국제 무기들의 첫 실전은 터키군이 치를지도 모르겠다고 예상해 왔지만, K-9의 경우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태에서 대한민국 국군데뷔전을 기록했다. 다만 전면적인 첫 실전은 역시 터키가 시리아에서 치르게 될 듯하다.

대한민국의 K-9 자주포의 엔진은 독일것을 사용중인데, 터키의 숙적인 그리스가 독일에 압력을 넣어서 독일이 한국에 엔진을 못 팔게 하려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리스의 국력상 한계가 명백했고 독일이 그리스 같은 작은데다 막장성까지 짙은[13] 나라를 위해 한국이라는 세계적 선진국과 터키라는 지역강국을 자극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지만.
대한민국이 터키에게 얼마나 호구짓을 했는지 KFX도 황당한 지분요구를 해서 파토났다 하더라

5 터키의 EU 가입

터키는 EU 가맹을 열심히 노리고 있지만 1960년대 EU 준회원국 가입 신청을 통해 준회원국 자격만 얻고, 1987년 신청한 정회원 자격은 지금까지 승인이 나지 않고 있다. 현재 회원국 가입을 위한 협상이 진행중이다. 결렬될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시간이 매우 걸릴 듯하다. 빨라도 가입은 2014~16년 사이에나 가능할 듯하다고.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국력이 딸려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반대는 그렇게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하며 본질적인 문제는 터키의 인구와 국력이 가져올 여파가 현재 독일-프랑스가 주도중인 EU의 세력구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당장이야 독일과 프랑스가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독일은 인구구조의 한계로 인해 한국이나 일본만큼은 아니라도 급격한 인구 감소가 예상된다.

이런 터키 가입문제를 두고 EU 국가들은 매우 난감한 상태.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터키의 국력 때문에 유럽연합 내의 세력구도 자체가 개편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독일과 프랑스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4]그래서 이 EU의 두 거두는 모두 터키 가입에 반대한다.

2011년 이후 이스라엘과 터키 사이가 나뻐져 그리스가 반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정작 그리스는 아랍연맹과도 우호관계가 깊고 이스라엘도 그리스처럼 죽기살기로 터키와 싸워보자는 반응은 아니다.

6 지명 분쟁(?)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이며,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그런데 그리스는 아직까지 이스탄불을 콘스탄디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라고 표기한다. 사실 오스만 제국 시절만 해도 터키인들은 이스탄불을 '콘스탄티니예'(Konstantiniye)라고 불렀으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이 정착된 것은 공화국 이후의 일이다. 1930년대 터키의 우체국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디누폴리… 아무튼 콘스… 뭐시기로 주소를 쓴 소포 및 편지를 일절 받지 않는 초강경수를 두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을 각인시키려 했다.[15]

이는 비단 콘스탄티노플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터키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지명도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이 발음만 살짝 바뀌어서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앙카라(앙기라), 이즈미르(스미르니), 이즈니크(니케아), 부르사(프루사), 코니아(이코니오), 안탈리아(아탈리아), 카이세리(케사리아-마자카), 시바스(세바스티아), 에디르네(아드리아누폴리/하드리아노폴리스), 안타키아(안디오히아), 시놉(시노피), 아마시아(아마시아), 트라브존(트라페준다/트레비존드), 베르가마(페르가모) 등등…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가끔 이런 도시들 이름을 자기들 식으로 쓰곤 한다. 예컨대 이즈미르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이즈미르스포르가 그리스 AEK 아테네와 경기를 벌였을 때 그리스에서는 "스미르니(Σμύρνη)의 이즈미르스포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그리스나 남키프로스 정도나 그렇게 하고, 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세르비아 등은 두나라 모두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 식으로 부르거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을 쓴다. 한 예로 불가리아는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솔룬이라고 부른다. 그리스가 테살로니키! 라고 해도 솔룬이라면서 고칠 생각을 안한다(…).

7 기타

한국전쟁때 터키와 그리스 모두 한국에 파병을 하였다. 어째보면 같이 싸운셈 (...) 이와 관련된 실화도 있는데 중공군 당국이 자기네 포로수용소에 있는 터키군 병사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치려고 했는데, 자기들 중에 터키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보낸다는 것이 하필 그리스군 포로를 보냈다. 효과는 전혀 없었다는듯. 그리스놈한테 배우고 싶겠냐?

우선 그리스는 그리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며, 터키보다 영토와 인구가 다섯 배는 더 작은 소국이면서도, 그리스와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던 한국에게 5000명이나 파병했다. 그리고 그중 192명의 사망자와 543명의 부상자라는 희생을 치뤘다(터키는 15000명 파병, 전사자 721명과 부상자 2,111명.).

오스만 제국의 속지정책은 근대화된 식민제국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애초에 오스만 제국은 전근대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방정책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도 단위쯤에 해당하는 상위 행정단위는 중앙에서 파견한 총독들이 통치하고, 면이나 리 쯤 되는 하위단위는 현지 유력세력들이 자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까지 발칸 지역은 그리스인 군주가 통치하는 지역들도 있었고 현지의 유력가인 그리스인 상인이나 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것이다. 전근대 제국들이 다 그렇지만, 누가 어쨌든 오스만 제국 황제의 신민일뿐. 오스만 제국의 신분은 군인(Askeri)과 양민(Re'aya) 둘로만 구분되어 있었으며 군인이든 양민이든, 그리스인이 아니라 튀르크인이나 아랍인이라 하더라도 술탄이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있는건 다 똑같다(...) 제국 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오스만 제국은 그 반란주체가 누구든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했는데 이는 원나라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각지에 군벌과 향토 유력세력들이 자치하고 있고, 지방의 군사력 및 경제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데 반란을 방치하거나 미적지근하게 처리해버리면 오스만 제국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근대 이슬람 국가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민족적 관점으로 보고 차별한 것이 아닌 종교적 관점으로 지배층, 피지배층을 나누어서 차별하였다. 딤미라고 불리는 기독교, 유대교들에 대한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 딤미들에게 거둬들이는 하라지는 시대가 가면 갈수록 기독교도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이걸 버티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타국으로 빠져나가는 등의 행동이 이어졌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15세기경까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발칸지역의 도시화-상공업화, 예술 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낭트 칙령의 폐지와 일맥상통할 수 있는 부분인데 상당수 정교도 지식인층은 이탈리아로, 농민이나 상공업자들은 헝가리나 독일, 러시아, 폴란드 등으로 유출되는 등 발칸지역은 지속적으로 쇠락, 20세기 초반 오스만 발칸 지역을 여행한 서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임에도 전근대적이며 인구또한 동시대 다른 지역들에 비해 매우 희박한 이 지역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모든 오스만지역에서 교회들은 모스크 이상으로 높게 지을 수 없었으며 황제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울라마들의 압박이나 선동에 의해 이교도 성직자, 특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은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스탄불에서는 이교도들에 대한 증오살인이 밥먹듯이 벌어졌으며 이것은 철저히 이슬람 사회에서 묵인되고 방조되었다. 물론 마찰없이 조화롭게 살던 시기가 없던 건 아니였지만 그것은 지배층인 이슬람교도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었으며 언제든지 이들은 기독교도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화풀이로 자국에 살던 이교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정책은 결과적으론 투르크인들에게 결실을 가져다줬는데,17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의 정교도(그리스인)들은 개종이나 추방등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이슬람교도(튀르크인)들로 대체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이 영향적이 비교적 강했던 시노페와 트라브존등의 폰토스지역도 18세기에 이르면 역시 투르크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20세기 그리스-터키전쟁 시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시노페, 에게해 제도, 카스타모누, 삼순같은 몇몇 해안지역들에 분리된 채 남아있었으며 이것마저도 전쟁 후 인구교환으로 그리스로 넘어간 에게해 지역을 뺀 나머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까지 이상하게 발칸에 집착했는데, 아무래도 가장 인구밀집도가 높기도 하거니와 수입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장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이전까지[16] 중용된 재상이나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 지역 출신 아닌사람 찾기가 더 힘들 정도(...)

민족주의의 시대(19세기) 이전까지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조차도 애매모호한 개념이었다. 앞서 로잔조약 당시 인구교환 문제를 언급했지만, 이 지역에서 민족의 구분은 혈통도, 출신도 아닌 종교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발칸지역에 거주하는 동방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들을 싸그리 '룸'(Rum)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그리스인들도 스스로를 '로메이'(Ρομαίοι)라고 불렀다. 둘다 '로마인'이라는 뜻이다.[17] 이 로마인은 해당되는 사람들의 모국어가 어찌되었든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종교만을 보기 때문에, 루마니아인과 불가리아인 등도 전부 '룸'으로 불렸던 시절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은 튀르크인이든 쿠르드인이든, 알바니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전부 무슬림이라고 불렸다. 근대 루마니아, 불가리아인, 터키인 등의 근대적인 민족개념이 생겨난것은 그리스의 독립 이후 자극받은 각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인해서이다. 그리스의 독립이후 그리스 본토내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 및 정교회를 믿는 튀르크계 주민들의 그리스화 정책도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의 영향아래 이루어졌지만 이건 별개의 항목으로 적어야 할 일이다.

그래도 문화적으로는 꽤 가까운 편이다. 동유럽과 중동에서 인기 많은 터키 드라마의 주요 수입국중 한 곳이 그리스이다. 그리스에서 터키 드라마의 자국 흥행을 분석하는 영화가 나올 정도. 가끔씩 그리스 가수들과 터키 가수들이 양국 간의 화해를 주제로 함께 콘서트를 열고 음반을 같이 내기도 한다.

그리스 경제 위기로 은행들이 뱅크런을 막기 위해 예금 인출을 막자, 어느 그리스군 전투기 조종사가 전투기를 몰고 터키로 날아가서 예금을 인출해 왔다는 루머가 사실로 퍼지는 사건이 터졌다(...).

그러다가 2016년 터키 군부 쿠데타 불발 사태로 쿠데타에 참여했던 터키군 8명이 그리스로 망명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망명 반란군의 처리를 놓고 양국간 외교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8 관련 항목

  1.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소아시아는 헬레니즘 시대 이래로 가장 그리스화가 잘 된, 그리스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지금처럼 발칸 반도 남쪽 끄트머리에서만 사는 게 아니었다. 사실 현대 터키인도 대부분 그리스화된 아나톨리아인이 다시 튀르크화된 경우이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리스인들이 터키인과 사이좋게 잘 살았다.
  2. 다만 테살로니카는 베네치아가 오스만 영토를 함락한 것이 아니라 비잔틴이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베네치아에 건네준 것이므로 애매하다. 다만 테살로니카를 노리던 오스만은 도시의 주인이 비잔틴에서 베네치아로 바뀐 것을 미처 몰랐고 베네치아도 오스만이 자기네를 공격하려 하는 줄로 오해하여 1422년부터 1430년까지 테살로니카를 중심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이후 몇 차례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는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사이의 제 1라운드.
  3. 아이러니컬하게도, 크레타 반란이 일어난 바로 이해에 '평화의 제전'인 제1회 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4. 명목상 군주가 그리스의 왕세자이고 총리로 뽑힌 엘렙세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스스로부터가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통합(에노시스) 지지자였다.
  5. 현대의 마케도니아는 당시의 마케도니아와는 개념부터가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당시의 마케도니아는 현대의 그리스 북부 거의 대부분, 알바니아 동부, 세르비아 남부, 불가리아 서부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지방이었고 지금 상기한 국가들에 의해 찢기고 남은 땅이 현재의 마케도니아이다
  6. 이러한 사상 자체는 그리스 독립 직후부터 있어왔다(이를 '위대한 사상(Megali Idea)' 이라 한다.). 즉 그리스가 독립하기는 했지만 그리스인들을 모두 끌어안은 나라가 되지는 못했으므로, 그리스인들을 모두 끌어안은 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 즉 오늘날까지도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 서해안까지 정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로 부적합하고 콘스탄티노플이야말로 위대한 그리스 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흠좀무스러운 발언까지 나왔다.
  7. 일방적으로 그리스인만 터키 영내에서 쫓겨난 건 아니고, 그리스령에 살던 터키인 또한 터키로 이주했다. 이는 1923년의 로잔 조약의 조항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 이 '그리스인들을 모두 포함한 대제국을 세워야 한다능!' 이라는 논리라는 점을 이용해 '그럼 그리스인들을 다 그리스 땅으로 보내줄게. 그럼 문제 안 일으켜도 되지?' 라는 생각에서 결정된 사항. 이로써 백만 단위의 인구가 양측으로 이주했다. 이때의 기준은 무슬림인가, 동방정교도인가로, 무슬림이면 그리스어를 쓰더라도 터키인 취급을 당해 터키로 이주되었다
  8. 그리고 이는 로잔 조약으로 공식화된다.
  9. 터키가 독일편을 든 것은 빼도 박도 못할 영국 탓이었다. 하지만 국제관계는 냉혹했다.
  10. 터키 가서 그리스가 그리도 싫어요? 하는 질문에 일부 터키인들은 "사실 우리 터키가 그들을 지배했으니까 그들이 싫어할 만하지… 뭐, 땅 문제가지고 양보할 마음은 없지만." 또는 "그리스보단 이스라엘이 더 싫어. 사실 그리스는 우리에게 몇 백 년이나 지배당했으니 이갈릴 만하잖아?" 이런 사람도 있긴 하다. 오오 대인배 오오 키프로스 사태나 독립전쟁을 기억하는 나이 지긋한 분들은 이를 간다. 그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따지고 보면 터키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는 것에 가깝다. 터키어로 그리스인을 뜻하는 'yunan'은 '바보, 멍청이' 정도의 욕으로도 쓰인다. 사실 터키가 1453년부터 따져도 1830년까지 400년 가까이 지배했으니 그럴 근거도 나름대로 없지 않다.
  11. 다만 '터키가 그리스를 지배했으니까' 라는 생각은 민족주의 발흥 이후의 일. 애초에 '오스만 제국' 과 '터키' 는 같지 않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전까지는 투르크인이 지배층의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터키인들이 모두 그 투르크인들의 피를 받은 것도 아니고, 비잔틴 제국 멸망 이후에는 그 비잔틴인들을 비롯해 동유럽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을 이루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항목 참고.
  12. 여담으로 미국은 그리스와 터키 둘 다 한번씩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다. 그리스는 1947~48년의 공산화 저지, 터키는 구소련의 팽창 저지
  13. 경제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전부터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게 그리스의 막장성과 인구구조, 답이 안나오는 산업체계였다.
  14. 대체로 EU 가입과 관련 터키 측 입장을 지지하는 쪽은 미국과 이스라엘 등 외부 세력이며 이미 1999년에 터키는 가입이 미적지근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이라크 및 이란,시리아,수단 같은 반미적 나라들과 관계개선을 밝히는 회담을 열어 미국을 경악시킨 적도 있다. 물론 이들 국가의 막장성을 터키도 잘 알기 때문에 관계를 오래 이어가지는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
  15. 여담으로 이스탄불이란 이름 자체도 그리스어의 eis ten polin, "도시로" 라는 표현에서 왔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도시(i poli)"라고 불렸기 때문에, 초기에 너 어디가냐? 고 물었을 때 그 도시에 간다고 답했던 것이 이름으로 굳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16. 구체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
  17. 제국 내에 거주하던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은 프랑기(Frangi)라고 불렀다. '프랑스인'이라는 뜻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인들도 가톨릭을 믿는 주민들을 프랑기(Φράγκοι)라고 불러 구분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