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미

(통일벼에서 넘어옴)

1 개요

1970년대 한국에서 개발된 품종. 통일벼라고도 한다. 맛이 없다.

60년대 당시 한국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식량사정이 나빴다. 이는 비단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서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를 찾기가 힘들었을 정도다. 그런 연유로 당시 집권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난 해결 + 식량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결국 '잘 자라는 쌀을 만들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 주도하에 홍성호 연구사, 김광호 연구사, 박순직 연구사 3인의 밤낮 없는 연구와 노동을 통해 인디카종 쌀과 자포니카종 쌀을 교배해서 새로이 만들어낸 벼 품종이 바로 통일미이다.

2 배경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베이비붐으로 인구는 매년 3%씩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반해 쌀생산량은 답보를 거듭하면서 쌀부족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따라서 '잘 자라는 을 만들면 된다'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어서 신품종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이집트에서 나다(Nahada)라는 이름의 볍씨를 비공식적으로(…)[1] 가져와 농촌진흥청에 건네주어 1965년 시험지배한 결과, 기존의 벼보다 30% 이상이나 수확이 커서 '기적의 볍씨'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 은 아랫사람들은 대통령의 이름에서 '희'자를 따와 희농 1호라는 이름을 붙인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자신을 제2의 문익점이라고 으쓱이며 다녔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이라는, 곡물 성장에 필요한 환경 통제가 가능한 장소에서 키웠을 때는 저런 결과가 나왔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가 1967년 일반 농가에 보급되고 나니 씨받이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희농 1호는 근본적으로 열대 지방에 맞는 자포니카형[2] 품종이었으므로 당연히 한국 기후와는 맞을리가 없었다.

결국 필리핀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휩쓴 녹색혁명의 일환으로 필리핀에 본부를 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적의 쌀' IR-8을 들여와 연구한 결과 1970년대초 통일벼 계통의 신품종 육성에 성공하여 미곡증산의 커다란 실적을 올렸다.

이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사실 일본에서도 과거 개발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실패하고, 인디카/자포니카 잡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허 교수는 이때 일본에서 만들어진 논문들을 구해다가 읽어보고 연구한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다.

통일벼의 개발은 학문적으로도 세계 벼 육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본 농학자들이 1920년대 벼를 후반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두 갈래로 분류한 이래, 두 아종(亞種)을 교배하면 불임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IRRI에서 개발한 키 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을 한국에 도입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허문회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우선 교배한 뒤 그것을 다시 다른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여 안정된 품종을 만드는 전략을 시도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교배해 얻은 종자는 마치 노새와 같이 씨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중 일부 불임이 아닌 종자를 다시 인디카와 교배하여 번식력을 회복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66년 봄에는 IRRI의 유명 품종들과 비슷하게 키는 작고 이삭이 크지만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통일벼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 허문회가 IRRI에서 난쟁이 자포니카를 교배하고자 했을 때에도 연구소의 일본인 동료들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문회는 포기하지 않고 수백 가지의 서로 다른 교배 조합을 시험한 결과 전 세계의 벼 육종가들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렇게 수백 가지의 교배 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줄기의 길이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벼의 유전 연구에 이정표를 세웠다.

농촌진흥청장에 취임한 김인환은 허문회가 개발한 품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시했고, 그 결과 1970년 말에는 유망 개체들이 엄선되어 통일이라는 품종명을 받고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통일벼는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들과 비교할 때 평균 30% 이상 높은 수확량을 올려 당국자들을 들뜨게 했다. 특히 박정희는 통일벼가 찰기가 없어 인기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무기명으로 이루어진 국무위원 시식회에서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적고 맛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서둘러 보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기도 했지만,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통일벼는 1973년부터 재배 면적을 급속도로 늘려 나갔다. 1970년대 중반이면 통일벼는 물론 통일벼를 바탕으로 그 형질을 개량한 후계 품종들이 여럿 선을 보였다. “유신”,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3호” 등이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맞춰 개발되어 1977년 무렵이면 전국 논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으로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쌀의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여 해외에 수출도 하게 되었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3 반응

그렇게 만들어진 통일미는 인디카종과 자포니카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양새와 성질은 자포니카종이지만 생산량은 인디카종 못지 않게 높았다. 실제로 지금껏 재배하던 쌀을 모두 통일미로 바꾸니까 생산량은 무려 40%나 늘어났다고.

하지만 상기했듯 인디카종의 특성이 섞여 있다보니 미질(米質)에 문제가 있어 맛이 인디카종이었다. 한중일 동북아 지역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종의 맛이 아니었기 떄문에 흔한 일반미 아키바레(秋晴)[3]와는 생판 다른 맛이 나니 인기가 저조할 밖에 없었다.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밥맛이 통일쌀보다 낫다”는 유행어가 돌만큼 통일벼의 미질은 크게 떨어졌다.

그래서 농민들은 통일벼 재배에 냉담했다. 사실 농민들의 통일벼 외면에는 이런 점 외에도 여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험재배를 거쳐 1972년 전국으로 확대 보급된 통일벼가 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에서 심각한 실패를 기록한데다, 오랫동안 속고만 살아온 농민들이 정부 정책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맛 뿐만 아니라 통일벼가 지닌 단점도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통일벼는 면역성이 약해 병충해가 빈발했으며 냉해에 약해 물못자리가 아니라 비닐터널이 필요해 자재비가 상승했고, 생육기간이 긴 만생종인 특성상 일찍 심어야 해서 밀과 보리의 이모작이 불가능했고, 볏짚이 짧고 맥살이 없어 농한기의 부수입원이라 할 가마니나 새끼를 꼴 수도 없었다. 짧고 맥살이 없어 맛이 없다보니 소가 싫어해 여물로도 쓸 수 없었고, 군불을 떼어 재나 받든가 아니면 퇴비로 쌓아 놓고 썩히는 수 밖에 없었다. 그 탓에 소비자에게 외면받아 일반미에 비해 가격도 쌌다. 당시 통일벼의 가격은 심하면 일반미의 절반 가격 정도로, 농민들이 이전과 같은 수익을 얻으려면 일반미의 두 배 이상의 수확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4 정부 정책

정부 입장에서는 미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우선 순위는 질 보다 양(量)이었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통일벼 재배를 둘러싸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힘 겨루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도 초기엔 각종 홍보와 선전으로 통일벼 키우기를 장려했지만 통일벼 자체가 가진 문제로 큰 효과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농민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상황실까지 마련해 놓고 이른바 '통일벼 행정'을 실시했다. 집집마다 할당된 목표치가 정해졌고 각 마을 회관에는 증산 목표량이 큼지막하게 나붙었다. 심지어 책임생산제를 시행해 마을 회관 벽에 목표달성 그래프를 그린 벽보가 붙여지기까지 했다.공산주의..[4]

1973년부터는 다수확농가에 대한 시상이 실시되어. 쌀의 계약증산제도를 시행해 목표를 달성한 마을에 대해서는 30만원부터 1백만원까지 시상금을 주는 등 상금을 걸고 군과 면에서 증산왕을 뽑았다. 가을이 되면 공무원들이 일일이 들판을 누비며 벼 알을 세고 단위 면적당 소출량을 파악했다. 통일벼 행정도 강화하여 공무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농가를 돌며 통일벼를 재배하라고 강요해 들판에서는 공무원들과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놓고 논쟁과 몸싸움을 벌이는 진풍경들이 연출됐다. 심지어 통일벼를 심지 않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을 갈아엎거나, 볍씨 담근 통에 약을 쳐서 싹이 안 나게 하는 일들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5]

이 때문에 재래종 볍씨가 담긴 독을 안방에 앉히고 볍씨를 틔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공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심지어 담당공무원들이 강력한 상부지시를 따르기 위해 재배면적확보에 집착하다 보니 신품종 종자를 외상으로 공급해 수확기에 풍작을 이루지 못한 경우 종자대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는 등 통일벼 보급을 둘러싸고 심한 홍역을 앓았다.

5 결과

1976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급에 성공했다. 수확량은 3,621만석이었다. 자급 달성을 자축하기라도 하듯, 박정희 대통령은 이 해 11월 쌀 소비 억제 정책의 키워드와 다름없었던 무미일을 폐지했다.

이후로도 풍년은 계속돼 1977년엔 쌀 생산량이 4천만석을 돌파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다수확국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대풍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은 이 해 12월 4천만석 돌파 기념탑을 세웠으며, 농업 진흥청을 방문해서는 자급 달성의 기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녹색혁명 성취'라는 휘호를 남겼다.

쌀이 남아돌자 박 대통령은 쌀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 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보릿고개나 혼식/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고,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혀 있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데 소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이 배채우려면 뭐든 먹어야 하는 시대였다 보니까, 통일미는 꾸준하게 재배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주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식량난이 대강 해결된 80년대가 되자 맛이 없어서 통일미는 당연히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했고, 1991년을 마지막으로 정부 수매마저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더 이상 재배되지 않고 있다. 대신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 같은 곳에서 서산벼 등의 이름으로 종자를 따로 보관은 하고 있는 듯 하다.

통일벼가 계속 재배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병 걸렸을 때 무조건 항생제를 써서 슈퍼 바이러스가 출현하였듯이 너무나도 해당 병균에 강하다가 그 병균이 내성이 생겨서, 77년이 망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진짜 이유는 이쪽에 있었다.

비슷한 시기 북한김일성도 통일벼의 증산에 자극받아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 주력하여 80년대 초반 이북도 한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에서 세계최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성공에 지나치게 고취된 나머지 굳이 설명 안해도 그 결과는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햇볕정책 당시에 우리쪽에서 통일벼 종자 지원을 제안하자, 북한측에서 "아...그거 우리도 종자 슬쩍 해서 키워봤는데 우리쪽에선 별로 안 자람."...이라고 해서 취소되었다고 한다(...)어디서 슬쩍했는데? 설마 고정간첩? 어떤 역적놈의 시퀴?

최근에 포스코의 지원으로 마다가스카르에 시험 재배를 했는데, 생산량이 기존에 쓰던 종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6]. 거기다 그 동네 사람들은 입맛이 인디카 계통의 쌀을 좋아해서 밥맛 없다는 소리도 안 나온다고... 시험 재배 이후 종자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메데타시 메데타시?
  1. 이때 이집트에서는 종자 반출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앙정보부가 개입해서 종자를 '밀수' 했다.
  2. 이집트산이라고 꼭 인디카인건 아니다.
  3. 한국 한자음으로 그냥 '추청벼'라고 읽기도 한다.
  4. 정확하게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 일제시대 산미증산계획)이다. 박정희 시기 성공한 정책들은 절대다수가 자본주의적 발상에서는 나올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정치적 부분의 정책들을 보면 박정희라는 이름을 지우고, 고유명사를 제외해놓고 보면 공산권 권력자가 했다고 해도 믿을 정책들이 많다. 통일벼의 개발과, 그 정착과정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5. 소설가 고 이문구 작품 관촌수필에도 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당시 상황은 거의 전쟁에 가까울 정도였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지만 공무원이 농민과 드잡이는 기본이고 주먹질까지 하는 정도였으니(...). 담배와 함께 갑질이 유명했던 것이 통일벼다.
  6. 이뿐만 아니라 한국식 모내기 기법이나 농기구도 전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