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목차
1 소개
성명 | 문익점(文益漸) |
생몰년 | 1329~1398 |
국적 | 고려 |
비고 | 사후 영의정 추존 |
조선의 '의'생활은 물론, '화폐'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사람.
한국사의 가장 중요한 산업 스파이의 모범
금지물품을 숨기려는 중고등학생의 큰 스승님
2 흔히 알려진 사실
고려 말의 문신으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두껑껍[1] 속에 목화씨를 몇 알을 숨겨 가지고 왔다는 일화로 매우 유명하다. 원나라로부터 자주 독립을 꾀하는 공민왕을 옹호하다가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목화를 발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건 밀수를 했고, 온갖 고초 속에서 밀반입에 성공하여 백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사는데 공헌한 인물이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이야기나....
3 '붓두껍 밀수'는 허구
우선 이 이야기는 기초적으로 원나라가 목화씨를 금수물품으로 지정했다는 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실제로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품목은 무기나 화약 등 국방에 있어 매우 중대하거나 희소성이 높은 품목일 뿐, 남쪽에 널리고 널린게 목화인 만큼 희소성 없는 품목을 금수품목으로 지정했을지가 의문이라는 것. 다만 면화가 화기나 화약의 심지를 만드는데 쓰이기 때문에 군수품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2] 설사 금지품목이었다 해도 당시 원나라의 상황을 보면 전혀 금수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문익점은 다년생의 강남산이 아니라 1년생의 강북(화북)산의 목화를 가져왔다는게 주 내용.
게다가 백제 위덕왕 시기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 유적에서 목화에서 뽑은 면사(綿絲)로 짠 직물(면직물)이 발견되어, 문익점이 고려에 처음으로 목화를 들여옴으로서 면직물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통념은 완전히 허구임이 밝혀졌다. 다만, 수입산 면사를 이용했을 수도 있으므로, 면직물 생산이 이뤄졌다고 해서 목화 재배가 이뤄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데다가,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생산성이 높도록 개량된 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문익점 이전에는 재배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등 재래종[3]의 수량이 극히 희소[4]했던 것으로 보이기에 그 공로가 깎인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목화 보급 100년만에 조선 전체로 펴져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시대 서민은 일반적으로 흰 모시옷을 즐겨 입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겨울에는 원시 시대부터 입어 온 갖옷이나 (상류층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생산된 계(罽) 등의 모직물로 만든 옷을 갖춰 입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무명(면포)는 베나 모시에 비해 더 부드럽고 따스해서 추위를 막는 데 효과적이었으며 특히 목화 솜으로 솜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개량종의 도입이 당시 한반도인의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는 붓두껍 얘기가 일언반구도 없다. 실록에는 다만 이렇게 적혔을 뿐이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元)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緜)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다만 이 목화씨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가 관건인데, 당시 원 조정의 유배지였던 강남에서 가져왔다면 사행 중 뭔가 죄를 얻어 강남으로 유배를 가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얘기며, 그냥 양자강 이북이라면 그냥 길거리의 흔한 목화씨를 가져온 셈이기 때문. 이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4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실
공민왕 연간, 중국 본토에서 한족 부흥을 내세운 홍건적이 고려 영토까지 침범해 공민왕이 피난을 가는 사태까지 발생하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원나라와의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들이 하라는 사행은 안하고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왕으로 옹립해버린 것.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문익점과 그 일행들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발한 원나라 조정[5]에서 충선왕의 손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해서 군사를 주어 고려로 보냈다.
이에 원나라 조정에 있던 사신들은 덕흥군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와 공민왕을 왕으로 지지하는 파로 나뉘었고[6] 이중 대부분은 1차 사신단에 합류하였는데[7], 잔류했던 문익점 역시 덕흥군파였다.
고려사절요에는 덕흥군 쪽으로 분류된 자들 중 김첨수, 유인우, 강육연, 황순, 안복종, 기숙윤과 함께 문익점의 이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역적.
아무튼 덕흥군의 군대는 압록강 근교에서 최영과 이성계에게 패배했고, 결국 원나라는 이들에 대한 송환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이 고려로 돌아온 후 문익점은 파직되어서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8]
5 실패한 정치가, 성공한 사업가
파직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목화 재배를 시작한다. 문익점이 목화를 밀수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 목화의 개량과 보급에 있어 일대 혁신을 가져와 민간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 공로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우왕 1년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관직에 올랐다. 어디까지나 목화 포급 공로 때문이었다. 이후 다시 문익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온건파 사대부와 함께하느냐 급진파 사대부와 함께 하느냐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익점은 온건파와 입장을 같이 했다.[9] 매번 줄을 잘못 선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익점은 이후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조선 조정에서는 후에 후손에게 벼슬을 주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6 문익점 통념의 형성
그리고 이후 조선 초기의 권신 권근[10]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시기를 이어가면서 살에 살을 붙여서 문익점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몇 줄 없는 사서 기록으로 소설을 써 버릇 했던 위인적 작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의 문제 등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문익점 스토린 사실상 조선시대에 이미 완성된 것.
줄거리에 들어간 세세한 에피소드는 호탄 왕국 공주의 누에알 훔치기와, 최무선의 화약 개발을 도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완성본은 이렇게 되었다.
6.1 도입부
고려에서 사신으로 파견된 문익점은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는 문제를 접한다.(여기까지는 사실)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여 3년간 강남으로 유배를 간다.
- 조상이 반역자라고 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익점은 충신으로 변경된다. 후손들이 쓴 책 '사실본기'에서는 이 과정에 황제와 맞짱뜨는 장면을 추가해버린다. 정사인 고려사절요에는 자기 조상이 역적으로 되어 있으니 임팩트로 엎어버리려고 한 시도였을지도? 서장관 문익점이 원나라 황제하고 맞짱뜨면서 설전 벌이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200% 구라.
목부터 날아갔겠지
- 이 시기 강남은 홍건적이 득세하고 한족이 난리를 치던 상황이라서 원나라 조정의 힘이 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덕흥군과 함께 원나라 궁궐에서 고려 조정을 꾸리고 있던 상황의 문익점이 강남으로 여행을 떠날 일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목화 하면 강남산이라는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권근이 처음 언급할 때는 그냥 '강남에 가서 가져왔다' 였는데, 그걸 남효온이 쓴 책에서는 강남에 유배간 것으로 고쳐버렸다.[11] 그리고...
6.2 고려로 돌아오다
그리고 유배 기간 동안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을 보고 이를 가져가려고 하지만, 목화는 금수품목이었다.
때문에 붓두껍에 숨겨서 가지고 왔다
- 이것도 처음에는 그냥 가지고 왔다였다가 주머니, 붓대 등 여러차례 변화를 거쳤다. 그 최종본이 붓두껍. 굳이 '붓두껍'이라는 아이템이 된 것은 선비와 문인을 상징하는 붓이 이미지 적으로 적합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사실 '반출을 금지하는 직물의 씨앗을 몰래 가지고 나간다'는 류의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도 있는데, 이 경우 주된 소재는 비단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중국의 공주가 서역의 '호탄 왕국'에 시집을 가면서 누에나방의 알을 왕관 속에 숨겨서 몰래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비단의 경우는 실제로 중국에서 수출품으로써 중요하게 여겨지던 물자였으므로 실제로 금수 조치가 내려졌으며, 호탄 왕국은 서역에서 최초로 비단 생산이 시작된 나라이므로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기사기사 이 '왕관에 숨긴 중국 공주의 누에알'이라는 오래된 소재를 '붓두껍에 숨긴 문익점의 목화씨' 이야기에 만드는데 참조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낙향했다
- 이 부분도 앞서 설명한 이유로 거짓. 이것을 고려 멸망과 엮기도 하는데,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
6.3 목화 산업 개발
목화씨를 심은 것이 문익점의 밭에서는 전멸하고 장인 정천익의 밭에서 겨우 겨우 몇 포기 살려내었다.
- 이 부분은 사실 확인이 안된다. 이후 과정도 당연히 마찬가지. 애초에 이와 관련된 것은 모조리 소설로 일관된 관련 글들에서 퍼져나간 이야기들이지만, 딱히 부정할만한 사료적 증거도 없다. 애초에 이런 것들은 역사서에 남지를 않는다. 문익점이 버려둔 목화를 정천익이 길렀다며 진짜 위인은 정천익이라고 정씨 후손들이 클레임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지만 면에서 씨앗을 제거하여 실을 뽑는 기술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국 승려가 목화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 문익점과 정천익이 국가 기밀이라고 알려줄 수 없다는 승려를 어르고 달래서 결국 씨아와 물레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 이 부분은 200% 거짓말이다. 애초에 목화에서 씨를 빼내고 나머지 원면으로 실 뽑는다는 게 고난이도의 기술일지는 몰라도 국가기밀일 수는 없다. 이게 사실이면 원나라에서 길쌈하던 여자들은 모조리 국가기밀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중국에서 농경 발전을 위해 만들어 유통시켰던 농서들은 목화 가공 관련 정보도 실려 있는 경우가 많으니 원나라는 1급 기밀 정보를 민생을 위해 기밀해제한 나라가 된다.(.....)
- 이 부분은 최무선의 화약 개발 일화를
표절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재탕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최무선의 경우 화약은 분명히 금수품이었다.이래서 스파이보다 공돌이는 안습한 것이다
이 후 이걸 문익점의 후손들이 개량했는데, 특히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 문익점의 아들 문래라서 물레라고 한하고,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 말 그대로 민간어원이다. 물레의 원형은 김해토기까지가 올라가고, 문익점의 후손들이 손을 댄 것은 씨아 정도였다. 무명은 목면(木綿)을 중국어로 발음한 무몐을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문익점의 아들들은 중자 돌림으로 중용, 중성, 중실, 중진, 중계 5명이다.
7 그 외
모카씨를 밀반입해 한국 사람들이 모카라떼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게 해준 위인이라고 하는데 원문을 보면 저 글 바로 아래 드립이라 적혀있다. 웃자고 농담한 게 편집되어 돌아다니고 있는 것. 실제 우리나라에 양탕국(가배)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 고종 때였다.
문익점의 전설은 태조 이성계가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러도 나오지 않았다는 두문동 72현 전설에서 이들이 유일하게 내보낸 생존자가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라는 전설[12]과 조사의의 난이 각색되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함흥차사의 전설, 양녕대군이 호쾌한 대인배였다는 전설과 더불어서 여말선초 4대 구라 전설로 남았다.
경남 지리산 산청군 단성면에 목화 시배지와 문익점 선생 생가라는 유적이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문익점을 모신 사당인 문익점부조묘는 전남 보성군에 있다. 이는 문씨 본가가 전남 보성군에 있기 때문이라 그런것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文來洞)은 '문익점이 왔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13] 문래동이 일제강점기 당시 면직물 공장이 많아 사옥정(絲屋町)이토야마치이라 불리던 곳이기 때문.
목화씨를 가져온 후 "내 솜 씨를 제대로 보여줄 시간"이라고 외쳤다 카더라
- ↑ 의미는 '붓촉에 끼워 두는 뚜껑'이 맞지만, '붓두껍'이 표준어.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 ↑ 일본의 전국시대에 조총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도 조선을 통해 들어온 면화가 심지를 만드는데 요긴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 ↑ 상명대학교 박선희 교수는 이를 초면(草綿)이라고 하는 아프리카 종으로 본다. 위의 링크 참조.
- ↑ 일부 상류층의 기호를 위한 것으로 '추정'
- ↑ 이라기보다는 기황후의 불만이었다. 공민왕은 반원자주정책 과정에서 부원배인 기철 등을 제거하는데, 이게 기황후의 일가인 것이다. 기황후는 자기 친정을 박살낸 것에 불만을 품고 공민왕을 적대한 것이다. 사실 원나라 입장에서는 당장 홍건적 처리가 더 큰 국가적 문제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기황후의 이런 행동은 그야말로 답이 없다.
- ↑ 앞서 언급한 것처럼 1차 사신단은 기황후와 원나라 황실에 설득되어서 덕흥군 지지파로 임시 조정까지 꾸리고 앉아있었고, 2차 사신단에 대해서 포섭이 이뤄졌는데 이들이 갈렸다.
- ↑ 공민왕을 지지했던 홍순, 이자송, 황대두, 김유는 돌아왔고, 이공수는 붙잡혀 있으면서도 협력을 거부하면서 결국 덕흥군 일파의 움직임을 고려조정에 알려서 공민왕이 이를 대처하는데 최대 공로를 세웠다. 그러니 이공수를 제외한 나머지 잔류 2차 사신 일행은, 원래부터 자리잡고 있던 1차 사신 일행과 엮여 덕흥군파가 되었다.
- ↑ 사실 이건 운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익점의 행동은 역모죄로 몰아도 변명 여지없이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사형이나 유배가 아닌, 파직으로 끝난것은 천운이 따른 것.
- ↑ 뒤에 언급되겠지만 문익점이 목은 이색의 문하였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살아생전에는 몰라도 사후에는 크게 이롭게 작용했다. 이 온건파 사대부가 후일의 사림파가 되고 결국 사림파가 조선중기 이후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익점은 그야말로 폭넓은 인맥을 갖추게 되었고, 이는 문익점 신화의 완성에 크게 공헌했다.
- ↑ 왜 권근이 언급되느냐 하면, 권근과 문익점은 목은 이색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익점이 온건파 사대부와 길을 같이했지만, 이처럼 조선 초기 세력 사이에도 인맥이 분명히 존재했다.
- ↑ 생육신 중 한명인 그 남효온이 맞다. 다만 사육신에 대한 전기 소설인 '육신전'도 그렇고, 남효온도 같은 생육신인 김시습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달인이었다. 남효온이 문익점을 띄워준 것은 앞서 언급한 온건파 사대부의 계보 때문이다.
- ↑ 이건 4개나 걸려 있다. 두문동 72현(두문불출), 한식의 유래인 불지르기 설화의 재활용, 황희의 출신성향, 그리고 청백리 황희까지.
- ↑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來)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