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경의 특수작전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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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북파공작부대 | |||||
국 군 정보사 | 육 군 HID | 해 군 UDU | 공 군 AISU | 미 군 KLO | CIA 영도유격대 |
위국헌신 군인본분
김일성 마빡에다 대검을 꽂고유유히 돌아오라 켈로의 용사
적진 속을 마음대로 누비는 우리
남포동의 밤거리는 모두 나의 것
장하다 그 이름 켈로의 용사
-켈로가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위치한 북파공작원 충혼탑 |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 |
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비밀 첩보부대 통칭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현재는 대한민국 국군의 3군 첩보부대가 모두 국군정보사령부에 통합되었기에 정보사령부에 배속되며, 특수정보부사관 육상(HID)으로 모집을 하고 있다.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에 따르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이들은 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이다. 대한민국 정보부대는 최초 1946년 1월 경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8년 8월 경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같은 해 11월 말경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경 육군본부 정보국내에 공작과가 생겨 주로 첩보임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전쟁 중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성에 따라 1951년 3월에 독립된 육군 첩보부대(HID)가 된다. 일명 돼지부대라고 불리는 부대가 바로 여기다.
1961년 7월 첩보 파견대(HID)는 부대명을 육군 첩보대(AIU : Army Intelligence Unit)로 바꾼 뒤, 1972년 육군 정보대(MIG : Military Intelligence Group)를 통합해 육군정보사(AIC :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1990년 각 군 정보부대를 통합한 것이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이다.
2 HID
당시 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여개가 있었다. HID 직할대가 제1교육대였고 36지구대와 18지구대는 각기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맡아 첩보활동을 벌였다. HID 제1교육대는 1952년 10월 말경 서울시 성북구 정능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19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하게 된다. 교육생들은 공수훈련·유격훈련·중요건물 및 교량폭파·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독도법·도둑질 등의 특전유격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 정신교육 등 16주 과정의 공작원양성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훈련시 분대별로 행동했는데, 야간에 북한산 계곡을 누비는 행군을 했으며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영할 때는 동굴에 낙엽을 깔고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덮고 돌멩이나 해골을 베고 잤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제1기생은 1953년 봄 김종벽 소령의 인솔하에 2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원들은 해주 앞 용매도에, 제2중대원들은 진남포 앞 취라도등 서해안으로 침투했다. 제2기생들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낙하하여 침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기상악화에 의해 일부만 투하되었고, 일부는 원산 앞 여도에 합류하였다. 제2기생 일부는 휴전 후 설악대원으로 해상·육지로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제3기생은 김석환대위가 이끌고 원산 앞 여도에 침투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중 HID요원들은 그 당시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장비가 열악해 주로 미군 등 유엔군의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설악대는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 이 전공으로 김동석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3 AIU
육군 첩보대로 개칭한 후에는 공작원 포섭에서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AIU물색조로 켈로부대 출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켈로부대의 출신들을 AIU에 고용하여 첩보원 양성에 켈로부대의 경험을 상당히 많이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AIU본부는 지금 하야트호텔이 있던 지역인 수원지 옆 보광동에 있었는데, 훈련은 강원도 OO군 OO리 첩보대훈련소, 일명 개발단에서 받았다. 정보사 물색조팀에 의해 포섭되어 1주일에 한 번씩 4회 면담한 후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면담은 한 사람씩 앉혀 놓고 하는 일대일 면담이었다.
계약서 쓰고 도장도 찍었다고 하는데,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의하며, 계약서 주요 내용은 6개월 교육을 받은 후 이북에 올라가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사회로 복귀시킨 후 제대증도 주고, 평생 다달이 연금도 주고, 성과에 따라 보상도 주고(개인택시 한 대 분), 사회에 적응할 직장, 북파 후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 준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남산야외음악당, 용산 노동회관 등지에 모여 동북산업사(AIU 가명)버스를 타고 양평동에 소재하고 있던 정보사대기소에 갔다. 거기서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밤새 강릉으로 향했다. 훈련소에서는 파고다, 백담배 등 담배는 3일에 3갑씩 지급되었고, 남산표 속옷, 북한제 계급장·옷·배낭 등이 배급되었다.
무기는 AK소총, 소련제 기관총, 탄알 90발, 세열수류탄 등이 지급되었다. 훈련은 30㎏ 배낭을 거의 매일 메고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후 인천대·문산대·전곡대·양구대·속초대·운천대 등 예하부대에 배치받았다. 인천대와 속초대는 지구대(해상침투)였고, 나머지는 지상대(육로침투)였다. 예하부대에서는 안가(안전가옥)에서 지냈는데, 그 안가에 보통 10여명이 거주했다. 안가에서 통신·살인·폭파·독도법 등을 가르쳤고 일반적으로 작전은 1조(5인에서 6인)를 편성해 했다. 훈련에 있어서는 일명 키퍼(Keeper)가 있어 조교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초반 설악부대 출신들의 경우 제대할 때 상병과 병장 계급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군대에 왔다갔음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 주민등록증 앞면 병역란에 첩보대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악부대와 같은 무장유격대와는 별도로 AIU에서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부대들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작원들 증언에 의하면 청계산(일명 악마산)에 OO부대가 단독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지금 삼팔교가 있는 경기도 OO군 OO리에 있는 부대도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OO리에 있는 부대는 절취반·사진반·납치반으로 나뉘어져 절취반과 사진반은 단독침투, 납치반은 3인 1조로 작전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정보사는 강원도 모처에 이 첩보부대를 유사시에 대비해 당시 1972년 규모로 유지하고 있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4 국군정보사령부
90년대, 각 군마다 만들어져있던 공작부대를 통합하여(육군의 HID, 해군의 UDU) 국직부대인 국군정보사령부를 창설한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본래의 목표를 행하지 않고 있는 부대를 해체할것이냐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결국은 국군이 남겨둘 비장의 와일드카드로 존치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추가바람
5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2002년 9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정부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목숨 걸고 무력시위를 하겠다고 선언한 북파공작원(HID) 설악동지회(회장 정순호)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 양측 모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설악동지회는 이날 오전 10시 40분경 영등포역 앞 롯데백화점 삼거리를 점거하고 시위에 들어갔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가스통과 쇠파이프, 깨진 보도블럭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밑은 해당 시위 영상. 폭력적이므로 재생시 주의 요망
6분 56초부터 한소절 빠진 켈로가를 들을 수 있다. |
이런 시위를 하게 된 원인은 국가가 북파공작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이 알고 싶다 886화 "빵빠레와 빠삐용- 나는 무엇이었나" 편을 통해서 보면 국가가 그들에게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폭력시위를 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시위덕분에 2004년 1월 8일,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재정되었다.
6 여담
6.25 당시에 한국에 살던 화교들로 SC지대라는 소규모 외인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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