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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의 뉴스 동영상. 좌초의 책임을 물어 처형된 11명의 시신이 그대로 나오니 재생하기 전에 주의할 것.
강릉시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 공작 활동을 벌이고 복귀를 시도 하던 중, 잠수함이 좌초되어(해군의 기록에 의하면 꽁치잡이를 목적으로 한 그물에 걸렸다.[1])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상로를 통한 복귀를 위해 해안에 상륙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1996년 9월 18일 경, 강릉시 강동면 안안진리 해상에서 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가 50m 해상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잔존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할 때까지 총 49일 간 이어졌다.
침투 무장공비 26명[2] 중 총 13명 사살, 11명 피살(함께 침투한 공비에 의한 처형), 1명 생포, 1명 도주.북한 무장공비의 내륙 침투,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아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7명에 민간인 피해 4명, 경찰 1명, 예비군 사망 1명.[3]
2 침투 과정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7688 4aeafc10e7dc2.jpg |
좌초된 상어급 잠수함. [4] |
침투한 무장공비는 북한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정찰조 3명과 동 소속 해상처 승조원과 안내조로 총 25명이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하였다. 이들 중 핵심 대남침투요원은 정찰조원으로, 나머지 병력은 작전을 시작한지 빠른 시간내에 진압이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정찰조원들은 2달여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으며, 우리측 전상자들은 이들에 의해서 났다.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카메라에서 해당 지역의 군단 사령부나 비행장 그리고 도로 같은 주요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나온 점으로 볼 때, 이들의 목적이 앞으로의 전쟁을 위하여 한국군의 군사시설들과 지리 따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이들의 행동 중 특이사항으로는 부족한 탄약을 아끼려는 듯 교전시 단발사격을 주로 하였고, 수류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비교적 공격 정확도가 높았다. 산지로 도망칠거라는 예상과 달리 도로를 따라서 이동하기도 하였으며, 비가 온 직후에는 이동을 하지 않았고, 우리 측 감시병력이 코앞에 있음에도 숨어서 기회를 보거나 그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행동도 보였다. 밤과 낮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이동하였을 뿐더러 하루 평균 2,30km를 이동하다. 또한 민가로 가서 식량이나 옷가지 등을 훔쳐가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식당에가서 차려진 음식을 먹고 달아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렇게 식량을 얻기는 쉽지 않아서 우리 군이 버린 전투식량을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도주 중에도 꼼꼼히 기록을 하였으며, 마지막에 기록한 내용은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서 최후의 싸움을 준비한다' 였다.
당시 허약한 해군력으로 인해 해안경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나마 이를 보강해야 할 육군도 대응에 실패했다. 포항급 및 울산급이라는 대잠능력 0의 시대에 뒤떨어진 염가형 함정들이 주력이었던 1990년대 대한민국 해군은 동해 공해상으로 적 잠수함이 휘젓고 다니는 것도 모르고 침투를 허용했으니 해안경계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당연히 해안경계의 최일선은 바다에 떠있는 해군 및 해경함정이다. 얼마나 해군이 허약하면 육군이 바다까지 신경 쓰느라 육군경비정까지 운용해야 했을까? 그렇다고 육군도 잘한 거 없다. 육군은 전술한 거와 같이 초기대응에 완전히 실패, 무장공비의 내륙 침투를 허용해버렸다. 결론은 육해군 공히 빼도박도 못 하는 작전 실패이다.
- 대한민국 해군의 연안함대는 지금도 대잠능력이 취약해 제7기동전단 및 잠수함사령부 그리고 미해군의 지원이 불가피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파동과 함께 허약한 한국 해군력의 현 주소가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포항급 초계함과 울산급 호위함이 주력(둘 다 대잠능력이 전무하다)인 해군의 현실이 도마에 올랐고, 이후 KDX사업이 추진되고 잠수함 건조도 이루어져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세종대왕급 구축함, 손원일급 잠수함 등의 첨단전력을 확보했으며 인천급 호위함 배치 이후에는 연안함대도 제법 전력이 강화되어 이제는 해군력만으로도 해안경계가 커버되고 육군은 보조 역할로 바뀌었다. 물론 아직까지 포항급 초계함과 참수리급 고속정이 더 많은 연안함대의 취약한 대잠능력은 아직도 해군의 숙제로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이어진다. 군은 이 작전을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했으며, 그 이유는 적에 대한 경계 및 현장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장공비 세력들을 조기에 제압하는 활동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전기간 동안 강원도 지역민들이 입은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간첩이 침투하던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996년 9월 14일 5시, 해당 잠수함은 침투 작전을 위하여 함남 퇴조항을 출항 공해로 우회 이동하였다.
- 9월 15일 1시, 대포동 해안가에 도착하여 잠수함을 해저 정박하였다.
- 같은 날 21시, 안내조 2명과 함께 인민무력부 소속 정찰조 3명이 침투 상륙하였고, 안내조는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했으며, 정찰조는 군 비행장 및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를 정찰/촬영하였다.
- 9월 16일 21시, 잠수함은 사전 침투한 정찰조의 복귀를 위해 대포동 해안가에 다시 침투하여 연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공해상 해저에서 대기하였다.
- 9월 17일 23시, 재연결을 시도하다가 좌초되었으며, 함장의 명령으로 보안 물품과 서류 등을 파기한 뒤, 그들은 강릉 안안진리 해안에 상륙하였다.
- 9월 18일 1시 30분, 잠수함 폭파/자침을 시도 이후, 공작원들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에서 이탈, 상륙함으로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잠수함은 근처 68사단 해안 경계 초소에 의해 관측되어 선보고되었다. 이후 택시기사와 경찰에 의해 발견신고가 접수되었으나, 반신반의와 신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진위여부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이는 곧 초동조치 지연으로 이어졌다. 결국 소초장과 택시기사 그리고 경찰이 확인하여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후 연대장과 사단 정보과장까지 출동하여 현장 감수한 후에야 적 잠수함이 침투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단 지역과 1 야전군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 초기에 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비들이 사용하다가 놓고 갔을 것으로 생각되는 물품이나 무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육로를 택하게 되어 공비들도 매우 당황했음을 알수 있다.
- 당시 침투 경위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해안경계 태세의 문제를 지적하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택시기사가 단독 무장공비들을 발견하여 신고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68사단 초소에서도 무장공비들을 이미 발견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다만 무장공비에 의한 잠수함 상륙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믿을 수 없어 현장을 재차 확인하는 과정에서 초동조치가 늦어졌을 뿐이다. 23사단으로 입대한 사람들은 아주 잘 확인할 수 있다. 소대장에서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급까지는 보고가 거의 1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그 위부터는 일사천리로 쭉쭉 보고된다.
- 9월 18일 16시 40분,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명이 정찰국 해상처 소속 이광수를 체포하였다. 비슷한 시각인 17시에는 68사단 수색대대에 의해 항공에서 이루어진 수색 및 정찰 중 정찰조에 의해 처형(청학산 정상에서 잠수함 좌초의 책임을 물음)당한 공비의 시신 11구를 발견했다.
3 진압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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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에 탑승하는 특전사 요원들. 평소와는 달리 검정 베레가 아닌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다. |
36사단을 비롯한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해당 지역 동원예비군은 물론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특전사 병력도 상당수 투입되었으며, 대한민국 해군 역시 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함정 23척 지원은 물론 지상전력으로 제1해병사단에서 출동한 수색대 및 보병 병력을 동원했으며 해군 특수전전단 병력도 진해 및 동해에서 급파해 동원했다. 대한민국 공군에서는 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에서 항공기 76소티 지원 등이 있었다. 일일 지상작전투입병력 평균 43000여명, 연인원 총 150만명에 달하는 육/해/공 대규모 작전. 게다가 경찰도 전투경찰순경들로 구성된 타격대와 기동대 등이 대거 투입되었고 파출소 근무 경찰관도 기동복 입고 M16 자동소총을 휴대했다. 이 때 이광수 체포조 등 일부 경찰들이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을 안 경찰청에서 급히 경찰 내 K2 소총들을 긁어모아 강원지방경찰청 산하에 급히 뿌려 카빈과 16들과 교체해 주었고, 본의 아니게 강원청은 전국 지방청들 중 K2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이후 9월 18일~9월 30일에 걸쳐 차단선을 구축하였고, 곧이어 아군에 의해 남은 북측 공비들에 대한 수색 및 섬멸 작전이 전개되었다.
- 9월 19일 10시 경, 단경골 일대에서 특공연대에 의해 20여분간 교전이 발생했다. 이때 공비 3명 사살되었다.
- 같은 날 14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특전사 3여단 병력이 적 3명과 접촉하였다. 공비들은 투항유도에 불응하였고, 전원 사살되었다. 투항 유도 중 사살에 이르기까지는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나 대체적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설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전사 3여단 모 지역대는 칠성산 9부 능선 일대에서 은신한 3명의 공비를 먼저 발견하여 지근거리까지 포위를 완료하였고, 대대장에게 이에 대해 무전 교신을 한 결과, 지역대장은 공비에 대한 생포/사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곧 지역대장이 "자수하라, 옷을 벗으면 살려주겠다."고 외쳤으나 대답이 없었고 공비 중 한 명이 "지역대장 동지 들어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지역대장이 "상의를 벗으면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상의를 벗고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열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는데, 셋까지 세었을 때 누군가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는 지역대원들의 동시 집중사격으로 이어졌다. 공비 3명 사살.
- 같은 날 16시 경, 오이골 일대에서 X사단 병력과 교전하여 적 1명 사살하였다. 아군 수류탄의 파편에 의한 전사자 1명이 발생했다.
- 9월 21일 9시 30분, 칠성산 정상에 특전사 X여단 X대대의 제 4중대가 헬기레펠로 투입되어 3인 1개조를 이루어 하향식 수색을 실시하던 중에, 그 중 한 수색조의 선두에 있던 대원이 매복하고 있던 적(정찰조 2명)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으나 장전이 안된 상태라서 응사가 제한되자 "적이다!"라 외치며 몸을 굴려서 옆에 절벽 아래로 수 미터 추락하였으며, 뒤이어 오던 이병희 중사가 즉각 응사하는 순간 적에게 두부관통상[5]을 당했고, 맨 뒤에 있던 세번째 대원이 즉각 엄폐하여 응사를 실시했으나 적은 상호 엄호하며 도주하여 사라졌다. 전과 없음. 아군 1명 전사.[6]
- 같은 날 20시 경, X사단 X연대와 예하 수색중대가 적과 접촉하여 수하하자, 적 수류탄 공격으로 1차 교전 시작. 1차 교전 시 아군 1명 전사 1명 부상. 적의 대화소리에 2차 교전, 적을 다시 발견하여 3차 교전 결과 적 1명 사살, 아군 2명 부상, 최종적으로 적 1명 사살. 아군 1명 전사, 3명 부상.
- 9월 22일 6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X사단 X연대가 차단 작전 중, 적 1명을 발견했다. 지근거리까지 유도에 성공했으나, 적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교전을 벌였고 적 1명 을 사살했으며, 아군 1명이 전사했다.
- 9월 28일 6시 30분 경, 보광리 일대 무명고지에서 특전사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매복 중 적 1명을 발견하여 생포를 목적으로 유인하였다. 생포하려는 도중에 적이 권총을 뽑으려고 하자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이 사람은 부함장이었다. 적 1명 사살.
- 9월 30일 16시 경, 목계리 일대에서 공비들을 수색하던 특전사 X여단 X대대 X 중대 병력이 인근 산의 정상에서부터 하향 수색하며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 인근까지 내려와 옥수수밭에 이르자 대원 1명이 옥수수단 속에 손을 집어넣었고 안에 무엇이 있음을 느껴서 옥수수단을 헤치자 은거하고 있던 적이 노출됐다. 순간 대원들은 사격자세를 취하고 투항을 권유했으나 공비가 권총을 빼들자 특전사 대원들이 사격을 실시해서 사살했다.[7] 공비 1명 사살.
- 이 시점까지 육군 특전사, 특공연대, 보병사단 병력과의 교전으로 공비 11명을 사살한다.
한편 적 병력 중 정찰조 2명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 10월 3일~7일까지 용평 스키장과 월정사 일대를 통과했다.
- 10월 8일 14시 경, 평창군 탑동리 일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던 민간인 3명을 살해했다.
- 10월 9일 21시, 오대산 일대에서 아군 매복조와 30여분간 대치 상황을 벌이다 이탈하였다.
- 10월 12일, X군단 사령부를 촬영 및 감시하였다.
- 10월 14일 20시 경, 인제 지역 일대의 민가와 자동차에서 식량 등을 절취해 취식하였다.
- 10월 16일, 신남에서 인제 방면으로 차량 이동 중이던 학교 교사에 의해 그들이 도로를 따라 가던중 발견되었다. 아군 5분대기조가 출동하나 합동신문조는 그들을 인부나 근처에 살던 주민들로 판단하였고 대공 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분석하여 접촉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찰조는 이때 도주로를 바꿔 남쪽으로 도주 후 다시 북상하였다.
- 10월 20일, 소양호를 수영으로 도하하였다.
- 10월 22일, 양구와 인제 일대 모 사격장 근처에서 싸리나무를 벌목하던 표종욱 일병을 살해한 뒤 전투복 등을 절취하였다.
- 10월 25일, X사단 X연대를 촬영했다.
- 아군은 이들과 한동안 접촉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11월 4일 15시 경에 산머리곡산 일대에서 동계작전을 준비 중이던 아군 X사단 X연대 병력에 의해 발견되었다.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3218 50f4f20acd944.jpg |
최후의 공비 두 명을 사살한 특전사의 장선용 원사.(당시 상사)[8] |
- 11월 5일 4시 20분 경, 연화교 매표소 통나무집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군 매복조와 교전하여 적군과 아군 각각 한명씩 상흔을 입었다. 특공연대 소속 매복조 2명이 거수자를 확인하고 수하하였으나, 거수자는 수하에 응답하지 않고 "703이냐? 3대대 선임하사다. 몇 대대냐?"라 대답했고, "3대대 선임하사인데 어두우니 나와서 얘기해라."라고 하면서 계속 접근했다. 매복조는 3대대는 이미 부대가 이동을 마친 후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를 이상하게 여겼으나 분명한 확인을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접근하는 거수자가 방탄모를 착용하지 않았고, M16 소총으로 무장한 것을 보고(703연대는 M16을 사용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공비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노리쇠를 전진시키며 쏘라고 외쳤다. 공비도 동시에 장전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사격은 통나무 집에 있던 아군 매복조에 의해 선 실시 되었으며 공비 2명도 수류탄과 소총 사격으로 맞선다. 교전 과정에서 매복조의 송영홍 상병이 수류탄에 파편상을 입었으나 공비들도 부상을 입어 숲으로 도주했다. 이후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이 보복 공격으로 근접하여 초소 창문을 향해 난사하였으나 뒤에 있던 아군은 중간벽에 의해 무사하였다.
- 같은 날 7시 경, 정보분석조와 합동신문조가 현장 일대에 도착하여 작전을 토의하던 중 직접 현장으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때 부하 장교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9]은 강행하여 올라간다. 현장을 살피던 도중 기무부대장이 적의 예상도주로를 향해 불을 비춘 순간 그곳에 숨어있던 적의 저격이 있었다. 기무대장 오 대령을 포함한 아군 전사 2명, 부상 8명 발생.
- 같은 날 8시 경, 특공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 작전을 펼쳤으나 안갯 속에서 계속 된 적의 조준 사격으로 아군 피해 누적. 1명 전사, 6명 부상.
- 같은 날 10시 경,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접근하여 마지막 무장공비 2명을 사살.
이로써 길었던 대간첩작전은 개시 49일만에 종료된다.
1996년 당시 군에 복무했던 현역 장병이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예비군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찾아볼 수 있다. 체험수기1 체험수기2 체험수기3
첫번째 링크의 이야기는 창작이 가미되었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짜집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기억을 그대로 두서없이 주섬주섬 적어서 일수도 있지만 몇몇 사실 관계에서 오류가 보인다. (가령 출동 일시는 뙤약볕이 내려쬐는 8월이 아니라 9월이었는데 출동한 인원이라면 그 날짜를 잊기가 어렵다. 왜냐면 출동날짜가 추석 바로 전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용으로 봐서 노도 부대 인원일 가능성이 높은데 9월 중순의 양구 날씨는 상당히 쌀쌀한 편이다.노도부대쪽은 덥다. 또한 실제 그 부대 인원의 말로는 도로 검문 같은 임무가 아니라 숙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검문은 통상 그 지역의 부대가 맡는 법이다. 타 주둔지 병력을 그것도 예비사단 병력을 보름씩이나 그 지역 검문을 맡길려고 출동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본문내용의 교전일은 22일로 출동후 4일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전사자의 성이 바뀌는 것도 그러하다. 전사자의 성이 내용 진행중에는 내내 김씨로 나오다가 마지막에 송씨로 바뀐다. 같은 부대에 속해있지 않았던 다른 부대의 병사들도 전사자의 이름까지는 기억을 못해도 성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의 성씨를 오락가락할수도 있다는게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위문품의 경우 개별 중대에 직접 전달하는 경우는 없었다. 언론의 전과 보도에서 '몇대대 몇중대에서 사살' 같이 중대 단위까지 보도하는 경우는 없었고 연대 단위의 'OO부대에서 공비 x명 사살'로 보도하게끔 기무사의 보도관제가 이루어졌으므로 위문품들이 직접 개별 중대로 향할 일은 없었다. 위문품들은 연대에서 전부 취합해서 각 개별 부대로 정기적으로 분배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위문품 불출이 늦어져서 연대 본부 주둔지에 위문품이 쌓인채 썩어가는 일은 있었다고 한다.)
4 국군 전사자
- 사고 개요 - 1996년 9월 18일 강릉 앞바다로 북한 무장간첩 26명이 잠수함을 타고 침투, 약 50일 간의 교전 과정에서 육군 장병 12명 전사
- 오영안 대령은 1996.11.5.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공비와 전투중 피격으로 사망
- 서형원 소령은 1996.11.5. 인제지구 기동타격대장으로 출동하여 전투중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사망
- 우황용 대위는 1996.11.5. 연화동에서 공비와 교전중 수류탄 파편에 의하여 중상을 입음
- 전사자 명단 (아래 표기된 계급은 모두 전사후 1계급씩 특진 추서된 계급임)
- 오영안 준장(제303기무부대 소속, 군단기무부대장, 3사 4기)
- 서형원 소령(3군단 불사조부대 기동타격대장, 703연대 정보참모, ROTC 24기, 1986.3.4. 입대)
- 홍동진 대위(68사단 소속, 10월10일 강릉)
- 이병희 상사(3공수특전여단 소속, 9월 21일 강릉)
- 이동찬 하사(702특공연대 소속, 11월 5일 홍천)
- 강민성 병장(12사단 51연대 수색중대 소속, 11월 5일 인제)
- 강정영 병장(11사단 13연대 소속, 9월 22일 강릉)
- 김대영 병장(27사단 78연대 소속, 9월 25일 강릉)
- 최태웅 병장(36사단 소속, 11월 4일 홍천)
- 한대성 병장(12사단 소속, 9월 29일 인제)
- 송관종 상병(2사단 31연대 소속, 9월 21일 강릉)
- 표종욱 상병(2사단 노도부대 소속, 10월 22일 양구)
- 부상자 명단
- 우황룡 소위(3군단 통신소대장, 12사단 소속, 1974년생, 1996.2.29.입대, 1997.2.28.전역)
- 안장
- 오영안 준장은 1996년 11월 7일 국립서울현충원 제3장군 묘역에 안장(묘비번호 58)
- 한대성 병장은 1996년 10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 사병제1묘역 119묘판에 안장(묘비번호 7925)
- 서형원 소령은 1996년 11월 15일 대전국립묘지 장교제1묘역 206묘판에 안장(묘비번호 2103)
- 홍동진 대위는 1996년 11월 15일 대전국립묘지 장교제1묘역 206묘판에 안장(묘비번호 2104)
- 나머지 장병은 1996년 11월 15일 사병제1묘역 119묘판에 안장
- 이병희 상사 7940
- 이동찬 하사 7941
- 김대영 병장 7942
- 강민성 병장 7943
- 최태웅 병장 7944
- 강정영 병장 7945
- 송관종 상병 7946
- 표종욱 상병 7947
5 표종욱 일병 실종사건
TV를 보고 오늘(11월 6일) 아침까지도 헌병이 전화해서 종욱이한테 무슨 소식온 거 없냐, (북한군이 표종욱 일병을 살해했다는 것을 확인한) 뉴스도 안 듣냐, 테레비 안봤냐 그랬더니 (헌병대가) 뉴스하고 테레비가 장땡이냐. - 표종욱 일병의 누나 표시현 씨.
이 작전에서 국방부는 병크를 벌이며 전 국민의 분노를 샀는데 그 이유는 전사한 표종욱 일병에 대한 대응 때문이다. 국문학과 출신이던 표종욱씨는 당시 2사단 공병부대 소속이였는데, 10월 22일 숙영을 위해 싸리나무를 모으던 표종욱 일병은 하필이면 도주하던 북한군 침투병들과 마주친다. 북한군은 증인을 없애고 한국군 전투복으로 위장하기 위해 표종욱 일병을 습격해서 고문 뒤에 살해했고, 그렇게 안타깝게 전사한 표종욱 일병의 시신은 근처에 숨겨졌다. 그런데 군대는 표종욱 일병이 사라지자 제대로 된 주변 수색 없이 평소 여자관계가 안 좋았다며 애정문제에 따른 탈영으로 처리하였다. 이유? 소지품에서 연애편지가 발견되었다는 게 근거였다. 그러고는 2사단 헌병대 인간들은 표 일병의 집에 가서 "아들 숨겨놓은거 알고 있으니 빨리 내놓으라"며 난리를 쳤다.
그렇게 국방부가 일주일 가까이 지랄발광을 하던 중 2주 가까이 지난 11월 5일 도주하던 북한군이 사살되었는데, 그 사살된 북한군이 표 일병을 공격했던 그 북한군이였고 표종욱 일병의 군복과 인식표를 착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전투 내용을 기록한 노트를 국군이 발견했고 [10], 한국군은 발견한 노트에서 한국군 작전내역에 기록되지 않은 아군 전사자를 확인했다. 거기에 적군의 유류품에서 표 일병의 시계를 확인했고 표 일병의 유가족들도 TV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그제서야 군은 뒤늦게 수첩의 기록을 토대로 수색작업을 개시하였고, 단 하루만인 11월 6일에 숨겨져있던 표 일병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표 일병의 시신은 작업하던 곳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 낙엽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국군의 배치 상황을 캐내기 위해 잔인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11] 적의 공격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고문 끝에 사망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헌병대는 수첩으로 표일병의 살해를 확인했음에도 TV에 표 일병의 전사가 방송되고 있는 시점인데도 헌병대는 아들이 탈영했다고 전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보듯이 뉴스를 못 봐서 그렇게 물어본 것도 아니다.
애당초 표 일병 실종 직후 수색만 제대로 했으면 발견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상식적으로 적군과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 병사가 실종되었다면 적의 공격이 아닐까 예상은 한번 해봐야할 것인데, 그런 거 없이 병사가 사라졌다 = 탈영이라고 바로 보고하는 추태를 벌인 것이다. 이후 군은 유가족들에게 그야말로 무릎을 꿇은 채 싹싹 빌어야 했고, 그와 별개로 군은 당연히 여론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고 국회와 대통령도 추궁했다. 만약 표 일병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표 일병은 어쩌면 영영 작전 중 탈영한 비겁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쓴 채였을 수도 있었고, 유가족들 역시 최악의 경우 평생 표 일병의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대인배스럽게도 표 일병의 유가족은 헌병대의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시범 케이스로 조져서 버르장머리 고쳐놨어야 했는데 아깝다. 이 사건 때문에 야전부대의 싸리비 작업이 사라지고 플라스틱 대빗자루가 보급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시적 조치였다(대비 쓸 일이 많다 보니 현실적으로 플라스틱 대비만 갖고는 감당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빗자루 하나 바꾸는 조치만 내린 것도 문제.
6 후속조치
사건 당시 해당 해안지역을 책임지던 부대는 68동원사단[12] 이었다. 흔히들 파라다이스 사단이라고 하여,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칼퇴근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이 사건후 섹터의 지휘관들은 당연히 보직해임# 되어 버렸고, 해안경비에 사각지대의 문제점, 수색작전의 미비점 개편을 위해 기존 동원사단을 해체하고 상비사단으로 새롭게 창설하였으니 현재의 23사단 철벽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다. 물론 현재는 해군력이 보강되어 연안함대인 1함대에서 충분히 해안경계를 커버 가능하며, 강원도 동해안 철책은 철거 이야기가 오가는 등 사실상 철수 수순을 밟고 있다. 그리고 2014년 부터 강원도에서 철거 계획을 밝혔다. 자세한 내용 추가바람.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오면 사건을 잊지않기 위해 해당지역 군부대인 제23보병사단과 1함대는 침투사건을 재현하는 훈련을 매년 실시한다.
7 북한측의 반응
이 사건이 일어나자 1996년 10월 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비서장 접촉에서 박임수 대좌[13]는"백배 천배 보복하겠다."면서 남한을 협박했다. 어리둥절
8 군의 각종 뻘짓 사례
사건 내내 군은 미숙한 대처와 일처리로 일을 키웠다. 거의 이렇게만 안 하면 된다 정도의 사례가 속출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 대간첩작전 중의 군수지원 문제
- 병사들을 쪼개서 매복지로 보낼 것만 생각했지, 매복지에서 식사와 식수 보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투가 벌어지면 이후 탄약보급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해당 병사들을 교체해야 될 경우 어떻게 교체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취사반에서 만든 식사를 추진 보급을 하려했으나,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차량도 들어가기 힘든 험지에 매복하여 사실상 보급이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 보급하러 들어가다가 아군에게 오사당할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 그런가 하면 식수 부족이 극심했는데 수통 하나에 들어가는 물로는 하루종일 숲과 산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장병들을 충분히 해갈시켜 줄 수 없었다. 당시 예비군들은 전투지역 경계에 배치되면 매일 집에서 물을 넣은 1.5L 페트병 2개씩 들고가서 하나는 자기가 쓰고 하나는 현역들을 줬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에 국군이 정글에서 수통을 2~3개씩 매고 다녔다는걸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문제. 아니 당장 미군은 카멜백 도입 이전인 이 시기에도 단독군장에 수통을 2개 차는 것이 표준이었는데 미군을 항상 보면서도 수통을 1개만 지급했으니 문제. 이에 대해서 이 전투는 단기간 전투-보급-전투를 반복하는 일반적인 전면전 상황이 아님을 고려할 때 군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애시당초 전면전이나 전방에서의 국지전 상황을 주로 상정했고 대규모 공비의 후방침투는 1968년이 마지막이었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 자체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 언론에 작전계획 등의 정보가 대부분 노출됐던 문제
- 예를 들면 우리 군은 현재 얼마만큼의 병력이 어디어디를 수색 중이며 내일은 어디어디를 집중 수색할 계획이다 라는 식으로 작전 현황과 작전계획이 언론에 계속 유출되었고, 라디오 뉴스로 그 내용을 들은 공비들이 그에 맞게 도주경로를 적절하게 변경하며 수색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훗날 삼호 주얼리 구출작전에서도 이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해적들이 방송을 볼 수 없어서 다행이지..
- 아군에 대한 수하 및 오인사격 문제
- 위의 전투 기록에는 생략되었지만, 수 명의 장교를 포함해서 상당수의 아군 병력이 매복이나 수색 도중 다른 아군의 오인사격에 사망하였다. 또한 적 정찰조가 국군 복장을 하고 국군의 수하 방식을 흉내내서 포위망을 벗어난 문제 역시 심각하게 인식되었다. 이것과 비슷한 문제로, 매복작전 중 적과 조우한 상황에서 수하를 하는 바람에 답어 대신에 총격이나 수류탄 공격을 받은 경우, 혹은 코앞에서 도주를 허락한 경우도 있었다.
- 우리 군의 전반적인 훈련 미흡
- 병력 이송시 헬기 레펠 경험이 부족하여 낙상으로 인한 부상자를 여럿 낸 경우도 있었다. 적과 조우시 공포심에 의해 조준사격이 아닌 머리 위 사격을 하는 바람에 아군 사상자를 내거나 적의 도주를 허용한 경우도 있었다. 적과의 조우 순간 장전이 안된 총을 가지고 작전에 투입한 바람에 제대로 응사를 못하여 전사자를 낸 상황도 있었다.
- 작전 중 군기에 대한 문제
- 아무렇게나 놓여진 피복을 보고 적이 매복방향과는 반대로 도주한 경우도 있었으며, GOP지역의 경우, '무장공비가 여기까지 올 리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상부에서 하달된 후방 경계 명령을 대충 이행하거나 씹어드시는 경우도 있었다. 야간 작전중 공비를 열상장비로 추적하는 것 또한 매우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작전 나간 병력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움직이거나 이탈한 경우가 많아서 근처에 있는 공비를 구분하지 못 했기 때문. 예비군의 경우 더욱 심각하여 경계 근무를 하다 이탈하여 동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총기를 분실해 버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현역 지휘관이 '작전은 현역이 할 테니 사고만 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고. (...)
- 지휘관의 작전 지휘 문제
- 봉쇄선 형성이 늦어서 공비의 도주를 허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의 장기화에 따른 유연한 운영이 부족해서 병력 전체에 피로감을 증대시켰다. 작전 말기 기무부대장이 어이없게 전사한 일도 결국 작전 중 상황판단의 미스로 인해 일어난 결과.[14]
- 기존까지는 보병분대의 화력을 소총수의 숫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후 화력강화를 위해 유탄수가 분대당 두명씩 배치된다.
- 화력도 문제였지만, 병사 개개인의 방어구도 문제였다. 실전인데도 불구하고, 방탄조끼를 지급받은 병사는 극히 드물었다.
9 기타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는 등의 도발의 증거가 명백했기 때문에 남측은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였으며 , 북은 계속 뭉기적거렸지만 너무나 많은 증거로 빼도박도 못했기 떄문에 자작극이라는 생떼를 부리지 못하고 세 달 후인 12월 29일 외교부의 유감 표명으로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김일성이 직접 사과한 김신조 일당 사건과 함께 북한 측의 몇안되는 대남도발 사과의 사례로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어쨌든 받아들이고 이후 사살된 북한 공작원들의 유골을 판문점을 통해 북한 측에 전달했다.[15]
유일하게 체포된 공비 출신인 이광수 씨는 전향 후 해군 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정훈교육 강사로 각 부대를 돌기도 했다. 현재 남한에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김신조마냥 술집 화장실에서 오줌싸다 분노한 예비역에게 뒤통수 안 맞고 잘 살고 있다. 기사
이 사건으로 인해 남색 바탕의 것을 쓰는 해군을 제외한 국군의 전투복용 포제 계급장 색이 바뀌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이 사건 이전부터 추진되던 일이었다. 이미 베트남전에서는 미군이 저시인성 계급장을 도입했었고, 몇 십년 후에 한국군이 그것을 따라해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국방색 바탕에 장교는 흰색, 준사관 및 부사관과 병은 노란색(병,부사관 야전상의는 빨간색)이었던 육군과 해병대 전투복 계급장과 명찰(육군만. 해군과 해병대는 각각 흰바탕에 검정글씨와 빨간바탕에 노랑글씨 유지.)이 진록색 바탕에 검은색 지수로, 공군은 같은 바탕색에 파란색 실 자수로 바뀌었다. 다만 이후 진한 녹색 바탕에 검정 및 파란색 실 자수가 잘 보이지 않아 경례받기 힘들다는 이유로 다시 바탕을 연두색으로 바꾸게 된다. 심지어 육군과 해병대 전투모의 간부 계급장을 반짝이는 철제 계급장으로 교체하는 병크도 저질렀는데, 전시에 나사 풀러서 빼고 다닐 수 있다며 강행했다. 비전시나 후방으로 몰래 겨들어온 것들이 저격할 거란 생각은 못 하고 사나보다. 2004년 말부터 육군 부대마크도 전투복과 동일하게 저채도 색상으로 바뀌었고, 공군은 아예 부대 마크 패용을 중단했다. 해군(해병대 포함)은 처음부터 육전복에 부대마크를 달지 않았으므로 상관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온 이 글에서는 이 사건을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사건 직후에 입대한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계급장이 저시인성으로 바뀌었다고 교육받았다 한다. 이전부터의 계획으로 천천히 추진해 나가다가 사건 이후 도마에 오르자 추진 속도가 빨라졌다고 보는 편이 좋다.[16]
당시 모 특공연대의 사진. 명도와 채도에 손을 본 사진인데도 맨 앞에 앉아있는 대위의 철모 계급장이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구형 계급장의 고시인성 문제는 이정도로 심각했었다는 하나의 증거.[17]
바로 전 해(1995)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로 벼락 명소가 된 정동진역의 유행에 오히려 불을 지핀 사건이기도 하다. 안인리/안인진리에서 작전이 집중되었는데 작전 반경에 정동진역이 포함되고 또한 매일같이 공비침투 뉴스에 안인진리와 함께 정동진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정동진역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현 디시인사이드의 대표이사인 김유식은 당시 하이텔에 '잠수함이 수상하다'라는 내용으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이상하다면서 혹시 자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글을 썼다가 경찰 보안분실로 끌려가 38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뇌개조도 당했나 당시의 경험담을 담은 수기 그리고 절대로 심문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랬는데도 불구하고 PC통신에 대공분실 수기를 올렸다가 정체불명의 전화가 자꾸만 오자 겁이 나서 영국으로 도피유학을 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 9월에 경찰은 PC통신 내에 '무장공비 자작극론'을 올린 유저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하여 33명을 불구속 입건한 바 있으며, 특히 천리안 등지에 <그들이 무장공비일까> 등의 게시글들을 올린 윤모씨는 10월 31일에 구속되어 12월 18일에 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윤씨가 항소하여 1997년 4월 25일에 서울지법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찰이 이에 항소하자 1998년 8월 13일에 이를 기각하고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윤씨가 『변증법적 유물론』등 5권의 책을 보관한 점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던 1심 판결을 깨고 유죄를 인정,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어 피고인측이 신청한 국가보안법 제7조 1항 및 5항의 이적표현물 규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도 기각했다.
이 사건이 있던 시기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 일부 매체들은 공익근무요원 전모씨가 천리안에 올린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내용에서 "남한당국이 사건을 조작하여..." 식의 일부 내용만 잘라 발췌하여 PC통신 위험론을 제기했으나 본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오보임이 밝혀져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당시 그가 올린 게시물은 해당 사건을 전후해 PC통신 역사상 최다 조회수인 3천 1백여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국방홍보원에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얼룩진 산하'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전투 진행을 볼 수 있다. 물론 국방홍보원에서 만들었다는건 감안하고 보도록 하자. 링크
작전 당시 강릉은 그야말로 전쟁 분위기였다고 한다. 육/해/공의 거대한 대간첩 작전 수행을 위해 거의 계엄령 수준으로 군/경의 민간 이동 통제가 이루어짐은 물론 시내에는 온갖 군용차량들이 가득했고, 인근 강릉공항[18]에서는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이착륙으로 소음이 심했다 한다. 또한 멀지 않은 서쪽의 산들에서는 5분이 멀다 하고 수류탄 폭음과 사격소리가 끊임없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고…. 사진은 전투경찰과 함께 버스를 검문하는 육군 병사. 허나 이 상황에도 야간자율학습은 계속 했었다고(...).
또 작전이 한창이던 9월 27일이 추석이었는데, 어느 지역까지 성묘를 허용해야 하고, 무장간첩이 성묘객 틈 속에 끼어드는 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결국 명절을 맞아 성묘 가는 사람들에게는 태극기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라는 공지가 내려졌고 강원도 북부 작전지역의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성묘하러 가는 진풍경을 연출해야 했다.(...)
당시 강릉 산골 마을마다 살고있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투입되었는데 지키라고 갔다가 주민들의 동정표로 먹을 것도 받고 집에 전화도 하게 해 줬다 카더라
그런데 그 총탄이 날고 폭탄 터지는 와중에도 노인들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물과 버섯을 캐갰다고 기어이 작전 구역에 들어갔다가 공비들에게 살해되거나 국군의 오인 사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지뢰를 밟아 숨지기도 했다. 위키러 여러분은 공비가 있거나 말거나 군사 구역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자! 송이버섯은 당시 제철로 지역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었다고는 하지만,[19]돈보다야 목숨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북한에선 뻔뻔하기 그지없게도 우리군이 노획한 자기네 잠수함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씹혔다. 무타구치 렌야의 뺨을 갈길 뻔뻔함이다
이 사건에서 무장공비들이 불법복제된 것으로 추정되는 M16A1을 사용했는데, 강릉안보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실총을 보면 근거리 사격에 용이하게 멜빵끈을 특이한 형태로 개조해 놓았다. M16 소총을 사용한 이유는 아군으로 위장하기 위함도 있고 노획한 탄약을 사용하려는 목적도 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탄약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한 발씩 끊어서 점사를 주로 했다고 한다.
작전 진행 중인 1996년 10월 1일 최덕근 러시아 영사가 독극물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신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으며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독극물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었으나 레드 마피아 관련설도 있는 등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2014년 SBS 드라마 쓰리 데이즈에서 극중에 가상으로 묘사된 '1998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사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였다는 개소리가 등장하였다.
일본의 <선전포고>(2번 항목)라는 가공전기 소설 및 영화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려져있다.
2004년 제작된 프리웨어 FPS 쿠마\워(Kuma\War) 의 미션 중에 이 사건을 구현한 미션이 있다. 꽤 된 게임이긴 해도 게임 자체가 실제 군사작전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만큼 고증은 DMZ North Korea 따위(...)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으로, 무장공비들이 사복을 입고 AK만이 아니라 M16을 들고 나오는 것까지 고증했다(!). 단 M16은 제작 영상에만 등장하고 막상 게임에서는 전부 AK를 들고 나온다. 나머지는 무장공비들이 미군 험비(...)를 타고 댕기는 것만 빼고 저 위의 집단처형 현장까지 구현해 놓았다.
사건 당시 북한 잠수함을 신고한 택시기사의 일화는 안보의 중요성을 심어주자는 차원에서 제7차 교육과정 당시인 2001년에 나온 4학년 도덕 교과서에 기재된 바 있다.
- ↑ 그물은 스크루가 달린 배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물이 얽혀 스크루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 게다가 그물은 발견하기도 힘들다.
꽁치대신 상어를 낚았다 - ↑ 26명설과 25명설이 분분하다. 사건 초기에는 무장공비들이 잠수함 승조원 11명을 사살할 때까지 승선인원을 26명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이광수 체포 직후 그의 증언을 토대로 판단한 사안이었는데 그러나 그 이후 잠수정 내 유류품 수색 중에 남은 1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이광수 증언에서도 정확한 이름과 탑승 여부를 지속적으로 혼동하는 양상을 보이고 만약 26명이 맞아서 한 명이 북으로 도주했다면 북한이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을 것인데 안 했고 이런 여러 이유 등으로 25명으로 발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16년 국방부 블로그에 기재된 최종 집계를 보면 총 26명이며 1명으로 도주로 나오고 있다.
- ↑ 경계근무 중 옆에 있던 동료 예비군의 실탄 오발로 숨진 것이라고 한다. 확인바람.
- ↑ 선체 주변의 사람들은 선체 외부 분석을 위해 승선한 9전단 소속 한국해군 잠수함 승조원들과 내부 수색을 위해 투입된 UDT/SEAL 대원들이다.
- ↑ 이후 국군 헬멧도 미국식의 프릿츠 타입으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 ↑ 당시 사건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헬기 레펠 실시 중 2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공작원의 보통 M-16 소총에 저격을 당하여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어 이들의 사격능력이 초인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첫번째로 적의 공격에 의한 전사자가 나온 날이었다. 어떻게 보도가 되었던 간에 최정예 특전사가 전사한 사건이어서 군과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 ↑ 해당 사건보도 mbc뉴스 동영상 [1]
- ↑ 아래의 북한군 시신이 한국군 군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이후 서술할 표종욱 일병을 죽이고 뺏어 입어서다
- ↑ 3사 4기 - 이 사건에서 아군측 최고위 전사자가 되었다. 전사 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 ↑ 남파 무장공비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 상부에 자신들의 활동을 증거하는 한편 후배들의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군에서 차단작전 훈련할 때 "공비들은 옛날에 지나갔던 길로 다시 온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닌 셈이다.
- ↑ 동료였던 승조원들까지 싹 죽여버린 놈들이 설령 고문을 견뎌냈다고 해도 자신들의 행적과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표종욱 일병을 살려줄 리가 없다. 고문으로 죽였는지 그냥 죽였는지의 여부는 아무 의미도 없다.
- ↑ 이전에는 속초에 있었다. 90년대 초반 강릉에 있던 전투여단과 교체했는데 북에서 내려오면 속초 전투여단이 막는 동안 강릉 동원사단에서 완편사단으로 만들어 올라가는 작전인데... 당시 병들의 반응은 "그럼 바다는 어떡할 거야?" 이솝우화가 생각나는 부분..물론 바다는 해군1함대가 있으니 상관없긴 했다. 그리고 해군력이 강화된 현재로서는 육군이 바다를 신경쓸 일도 이유도 없다.
- ↑ 그는 나중에 국방위원회 정책국장을 지내게 된다.
- ↑ 특히 이 사건은 어찌보면 피해를 최소화하는게 목적인 대간첩작전의 실패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군으로 하여금 전장에서 고급 지휘관의 행동이 작전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일깨우게 했다.
- ↑ 사건 초기에는 훈련 중 강릉에 좌초한걸 국군이 적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려든다는
개소리주장을 했다. 이개소리주장은 판문점으로 유골을 반환하는 과정에서 다시 나왔다. - ↑ 실제로 계급장 전환 기간으로 3개월 내지 6개월정도의 시간이 주어졌기에(이 부분 추가한 위키러의 기억에 의존한 것인지라 그 기간이 정확하지는 않다.) 계급장 교체가 불가피한 진급자 위주로 계급장을 교체하고 있었으나, 작전기간 중에 서둘러 저시인성 계급장으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심지어 모 사단에서는 계급장을 저시인성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무장공비로 간주한다는 엄포까지 추가되면서 급히 계급장과 명찰(기존에는 황색 실을 사용하여 이름을 새겼다.)의 실 한올한올을 검은색 매직/싸인펜/볼펜 등으로 칠해 저시인성 계급장처럼 보이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까라면 깐다 - ↑ 이 사진은 후일 영화 '아저씨'에서 정보사 공작원들의 사진으로 둔갑한다.(…)
- ↑ 당시에는 민간항공기가 취항하던 군민 겸용 공항이었으나, 현재는 공군 전용 공항이다.
- ↑ 실제로 송이버섯 제철, 관광 성수기, 고기잡이철에 맞춰 이 사건이 일어난 탓에 당시 강원도 지역 경제는 치명타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