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rl Sydenstricker Buck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
< 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
1937 - 로제 마르탱 뒤 가르 | → | 펄 벅 | → | 1939 - 프란스 에밀 실란페 |
미국의 소설가. 장편 처녀작 《동풍·서풍》을 비롯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을 중심으로 그 처와 아들들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등이 대표 작품이다. 또 미국의 여류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태어나 생후 수개월 만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교활동에만 열중하고 가정에는 무신경한 아버지 때문에 외로운 유년시절을 지냈지만,[1] 오랜 중국 생활은 벅이 자신을 중국 사람으로 생각했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였다.[2] 그녀는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문학 삼국지, 수호지등을 원서로 읽으며 자라났으며 훗날 미국에서 이 소설들이 출판될 때 번역을 맡기도 했다. 1910년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사실 미국에서도 지나치게 중국화된 성격과 사고방식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1917년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과 결혼하면서 벅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난징 대학, 난둥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26년 일시 귀국해 코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이혼 후 출판사 사장과 재혼하게 된다. 1932년 뉴욕에서 했던 강의에서 '중국에는 선교사가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다른 비기독교 국가에서 선교할 때 오만함을 버리길 바랍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장로파 전도위원에게 비난받아 선교사 직위를 사임했다. 옳은 말씀 했는데? [3] 그녀는 미국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을 지적하며 그들 인권에 대해 외쳤고 마찬가지로 그 당시 차별이 심하던 흑인 인권에도 관심을 보여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이 딸은 벅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 되었다. [4]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입양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입양을 주선하는 펄 벅 재단을 1964년에 설립하게 된다. 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들의 미국입양을 알선해주는 대표적 단체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에도 여러 번 와서 정재계 관계자 및 문학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서울대학교 장왕록 교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대지 3부작의 초기 번역을 장교수가 맡았다. 장왕록 교수의 딸인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번역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원제: The Living Reed)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책의 초판본 표지에는 '아리랑' 가사가 쓰여있고, 서문에 한국이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라고 언급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미 언론에서 대지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년)를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와의 교분도 있었는데, 후일 그녀의 작품에 '김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고, 스스로 박진주(펄을 번역한 이름)라는 한국이름을 지어 쓰기도 하는 등 여러 점을 미루어 볼 때 한국에 대한 애착이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한국펄벅재단이 건립되었는데, 부천에 위치해 있으며, 펄벅여사기념관이라고도 칭한다.
그녀는 수십여 년을 중국에서 살아온 만큼 중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의 실정에 대해서도 서양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아시아 전문가였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1962년에 벅을 만난 존 F.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말을 해서 벅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오마이뉴스를 빼고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일화라서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다른 사료를 아시는 위키러가 있으면 추가 바람.
벅은 남은 생 동안 중국에 꼭 다시 가고 싶어했으나 마오쩌둥 정권 하의 공산주의 중국에서 펄벅은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중국을 왜곡시킨 작가로 규정되었기 때문에[5][6] 입국이 불허되었고 죽기 몇년 전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때도 동행이 거절되었다.
이건 사실 어떻게 보면 당대 중국인들이 가진 인종주의적 열등감이나 편협함이 드러나는 평가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사실 소설의 묘사를 들여다보면, 펄 벅은 특별한 사상적 주장이 없이 다만 중국 하층민들의 생활을 핍진할 정도의 현실적인 묘사로(거기다 다분히 동정과 애정을 가진 필체로!) 그려나갔을 뿐인데도 이에 대해서 발끈한 중국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폄하'라는 딱지가 붙었다. 근데 정작 펄 벅을 비난한 루쉰은 작중에서 같은 중국인들을 미개하고 타락한 사람들로 그리며 각성을 촉구하고 있고, 그 중국인을 피해망상에 찌든 미치광이나 정신병자(아Q는 약과다!)로 묘사하며 아주 가차없이 비난했는데도, 마오쩌둥을 비롯한 정치인이나 중국의 지식인이나 문학가들은 그를 다른 부분에 대해서 비판했으면 했지 중국인에 대해서 폄하했다며 까진 않았다. 이런 이중잣대는 펄 벅이 단순히 백인이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화두였던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까도 우리가 까!"라는 식으로 발끈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이것도 사실 중화사상의 일종으로, 현대 중국인들에게도 이런 민족주의적 성향이 보인다. 다른 민족은 우리 중화인을 깔 수 없다는... 어떻게 보면 인종적 역차별의 희생자로 볼 소지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중국에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고 그녀의 작품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지 오래다. 중국 매체가 선정하는 세계명작 추천서나 반드시 읽어야 하는 영미문학 중에 펄벅의 대지는 항상 목록에 오른다.[7]
- ↑ 심지어 펄 벅의 아버지는 딸의 작품 마저 무시했다.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한 '대지'도 죽을때까지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벅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왕따당해 쫓겨난 아버지를 위해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 ↑ 청 말기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어서 물리적 테러도 빈번했는데, 펄 벅은 폭동이 일어나서 목숨을 위협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백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자각했다고 한다. 그 전에는 명백한 구분 없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다는 뜻.
- ↑ 당시 선교사들은 오만하고 위선적인 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구한말 윤치호의 일기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실망과 불평이 등장한다. 한 예로, 레르 목사가 중국인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일본이 중국을 이겨서 대만을 얻었다'는 망언을 하는걸 보고 분통 터져하는등...
- ↑ 그 당시엔 지적 장애나 정신병을 매우 혐오스런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치부여서 벅은 딸의 존재를 감추어야 했는데, 노벨상 수상 때도 기자들에게 이 문제로 시달렸다고 한다. 이 경험을 벅은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책으로 풀어냈다.
- ↑ 이원복도 바로 이런 시각을 고수한다
- ↑ 벅에 대한 이런 평가를 정착시킨 인물 중 하나가 루쉰이다. 그런데, 이게 벅의 작품을 중역판(...)으로 읽어서 생긴 오해라는 평도 있으니 참고할 것. 한편으론 북미의 중국인 작가중에도 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 ↑ 하지만 대체로 대지 이후의 작품들은 펄 벅 본인의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지 않고 취재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된 것이 많은데다, 다작 성향이 너무 지나쳐서 대지만큼의 엄청난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청 말기 - 군벌 난립 - 혁명기를 다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지 3부작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