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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e Dmitry
1 개요
러시아 역사에서 혼란 시대라 부르는 시기에 이반 뇌제의 막내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를 자칭한 3명의 인물을 칭하는 표현이다.
2 배경
러시아 지역은 오랜 기간 초대 노브고로드 공작 류리크의 부계 자손들, 소위 류리크 왕가의 인물들이 다스려온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반 뇌제가 선포한 루스 차르국 시기에 이르러 러시아의 군주 자리를 세습해오던 왕가의 핏줄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은 이반 4세였다!
당초 이반 뇌제에게는 첫 부인 아나스타샤가 낳은 자신의 핏줄을 이은 직계 아들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장남인 이반이 황태자로 공인되어 차기 차르위를 계승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황태자비 옐레나 역시 임신한 상태였기에 계속 왕가를 이어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황태자비 옐레나가 너무 더워서 얇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는 복장이 경박하다는 이유로 빡쳐서 마구 때렸고, 결국 아이까지 유산시키는 사건을 터뜨리고 말았다. 당연히 황태자는 분노하여 왜 죄없는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이냐고 따지면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에 화가 난 이반 4세는 그만 정신줄을 놓으셨고 부지깽이를 집어들어 황태자까지 마구 두들겨패고 말았다. 이반 4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황태자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고,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를 한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고 결국 중상을 입은 이반 황태자는 3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비극으로 인해 황태자를 잃었으나 이반 뇌제에게는 보위를 이을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죽은 이반을 대신하여 차르직을 물려받은 표도르 1세는 얼마 못가 요절했고, 그 외에 2번째, 7번째 아내들이 낳은 바실리와 드미트리도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직계의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이반 뇌제는 자신의 사촌과 그 가족들도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죽여버렸기에 자신의 손으로 류리크 왕조의 대를 끊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인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7번째 아내가 낳은 이반 뇌제의 막내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였다. 드미트리는 1582년에 태어나서 1591년에 죽었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죽음을 놓고 이런저런 뒷이야기가 많았던 까닭에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3 가짜 드미트리들
3.1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 1세(False Dmitry I)라 부른다.
표도르 1세의 사후 공석이 된 차르위에는 외척이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정통 류리크 왕가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인물이 차르가 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보리스에 대한 반발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리스의 통치가 이거 영 아니올시다 수준이었기에 러시아의 대귀족 보야르들이 대놓고 보리스를 디스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드미트리 사건의 시작과 혼란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첫 번째 가짜가 등장했다.
당대 남겨진 기록 등을 통해 현재 이 인물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아니라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란 인물로 밝혀진 상태이다. 진짜 드미트리는 1582년생이고, 드미트리를 자칭한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는 1581년생이었다. 가족들이 그를 성직자가 되라고 수도원에 맡겼는데 정작 당사자는 수도원을 탈출하고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가 됐다. 이 시절 길가에 떠도는 소문을 주워듣고는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 확신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정확히 무엇을 계기로 그렇게 믿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러시아의 분위기에서 진짜가 됐건 가짜가 됐건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은 차르 입장에서 골치아픈 존재였다. 결국 보리스는 명령을 내려 이 가짜를 체포하려 했으나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직감한 가짜 드미트리는 잽싸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망명을 선택했다. 여기서도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이반 뇌제의 막내아들 드미트리이며 류리크 왕조의 정당한 계승자 자격으로 저 괴뢰차르를 몰아내고 자신이 차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원조를 요청했다. 비록 가짜 드미트리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국가적인 레벨의 지원을 약속받지는 못했으나 이러한 러시아의 혼란에 관심을 가진 몇몇 귀족들로부터 사적인 원조를 받아내면서 보리스에게 대항할 세력을 조직할 수 있었다.
가짜 드미트리는 1604년 폴란드인과 카자크인으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리스는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의 숙부를 데려와 진짜 드미트리는 죽었고 저놈은 가짜라는 것을 입증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그 때 죽은 인물은 자신의 카게무샤였다면서 당당하게 맞섰고, 그 결과 보리스에 불만이 많던 세력들이 죄다 가짜 드미트리 쪽으로 붙어버렸다. 이로 인해 차르 보리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아무래도 용병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드미트리가 병력의 양과 질에서 불리했기에 대체로 차르의 군대에게 밀리는 형태로 전개됐다. 하지만 1605년 4월 보리스가 급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애초에 보리스는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차르였고, 류리크 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짜 드미트리가 대세였기에 결국 차르의 군대도 즉시 깃발을 바꿔 가짜 드미트리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보리스 고두노프의 아들이자 그 뒤를 이어 차르가 된 표도르 2세는 1605년 6월 가짜 드미트리의 모스크바 입성과 함께 폐위당한 직후 살해됐다.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의 존재를 인정했고, 심지어 드미트리의 생모까지 그가 진짜 아들임을 선언하면서 마침내 가짜 드미트리가 러시아의 차르에 오름으로 상황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의 차르가 되는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모시는 인물들 중에는 폴란드 출신 인물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필연적으로 폴란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폴란드인들을 중용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보야르들은 가짜 드미트리의 행동을 묵인했으나 정작 가짜 드미트리가 총애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막장이었던 까닭에 민중들이 가짜 드미트리의 통치에 불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러시아 귀족의 딸이 아닌 폴란드 귀족의 딸 마리나 므니제치를 왕비로 맞이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전통적인 앙숙관계였으며 종교적인 문제로도 대립하는 사이였다. 결국 묵인하고 있던 보야르들도 가짜 드미트리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보야르들의 실세였던 바실리 슈이스키가 기존의 태도를 번복하고 지금 차르로 있는 드미트리는 짭퉁가짜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짜 드미트리는 자신이 진짜 드미트리라 믿고 있었기에 일고의 대응가치도 없는 헛소문으로 치부했고, 바실리 슈이스키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처벌이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가짜 드미트리의 큰 실책이 되고 말았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1606년 5월 가짜 드미트리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규합하여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저 더러운 폴란드 앞잡이와 그 똘마니들을 몰아내고 러시아를 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반기를 들었다. 게다가 드미트리의 생모마저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종전의 태도를 번복하고 "저 놈은 내 아들이 아닌 가짜"라 선언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의 10개월에 불과한 짧은 치세가 막을 내렸다.
폴란드로 도망가려던 가짜 드미트리는 성에서 도망치다 추락하는 바람에 두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는데 이 상태로 근위병에게 발각되어 끔살당했다. 그리고 분노한 러시아인들은 그의 시체에 온갖 모욕을 가하여 훼손시킨 다음에 대포에 집어넣고는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해버렸다(…). 러시아에서는 대포가 사람을 쏩니다!!
3.2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 2세(False Dmitry II)라 부른다.
바실리 슈이스크가 반란을 일으켜 가짜 드미트리 1세를 몰아내고 러시아의 차르 바실리 4세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실리 4세도 예전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비슷한 이유로 정적들에게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사실 바실리 4세도 남계 혈통으로 따지고 들면 류리크 왕조의 후손이긴 했다. 다만 슈이스키란 귀족가문이 류리크 직계와 따지면 촌수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계 혈통까지 따지고 들면 직계에 훨씬 가까운 귀족들도 많았기 때문에 결국 정통 왕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정통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던 것. 그 결과 바실리 4세 역시 그에게 반발하는 세력의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607년 자신이 이반 뇌제의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또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는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돌아와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고 러시아를 다스릴 것이란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사태이기도 했다. 다만 가짜 드미트리 1세와는 달리 이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저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경지대에 수감됐다가 탈옥한 죄수였던 것 정도로만 추측하고 있다.
어쨌든 갑툭튀한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자신이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죽은 것으로 알려진 가짜 드미트리 1세 역시 자신이었다란 골때리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튈 수밖에 없었으나 간신히 사태가 진정되어 복귀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된(...) 그 인물은 자신을 모시고 같이 도망치던 시종이라 떠벌리기 시작했다.
일단 상단에 첨부된 두 그림을 참고하면 어떤 관점에서 봐도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목소리는 물론 체형까지도 완전히 달랐으므로 제정신으로 판단하면 '믿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란 소리가 나올 수준의 허언이었다. 그런데 드미트리의 생모가 "너야 말로 진짜 내 아들"이라 인증까지 했고, 마리나 므니제치도 "당신이야 말로 진짜 내 남편"이라 공표하면서 혼인관계임을 천명하는 막장 드라마를 한 편 집필해버렸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드미트리가 나타났다고 믿은 러시아 민중들은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열렬하게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민중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가짜 드미트리는 반란군 잔당을 규합하여 모스크바를 공격했다. 이 때 바실리 4세의 동생 이반이 개털리는 바람에 모스크바가 함락당할 뻔 했으나 조카 미하일 스코핀-슈이스키가 이들을 저지하면서 모스크바는 사수해낼 수 있었다.
모스크바 입성에 좌절한 가짜 드미트리 세력은 근교 투시노로 물러났으며 여기에다가 아예 살림을 차려버렸다. 이에 가짜 드미트리에 복속된 세력은 세금까지 갖다 바쳤고, 이를 바탕으로 가짜 드미트리는 병력을 조련하고 성을 쌓는 등 러시아의 차르나 다름없는 수준의 대우와 활동을 했다. 이를 계기로 가짜 드미트리는 "투시노의 악인"이라 별칭이 붙게 됐다.
상황이 이 지경에 처하자 바실리 4세는 스웨덴의 칼 9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1609년 2월 스웨덴이 본격적으로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실리의 조카 미하일은 병력을 이끌고 차례차례 가짜 드미트리의 세력을 분쇄해나갔고 세력을 잃은 가짜 드미트리는 칼루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웨덴의 개입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좋은 빌미거리를 제공하고 말았고,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부아디스와프를 내세워 역시 러시아의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몰아세우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폴란드군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고, 그 덕분에 기회를 얻은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 근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폴란드 군대를 막기 위해 이동중이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총사령관 미하일이 바실리 4세의 동생에게 암살당했고, 용병료를 지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바람에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의 반목마저 격화해 그야말로 분위기는 막장 일보 직전으로 흘러갔다. 결국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은 쿠쉰 전투에서 폴란드의 원수 스타니슬라브 주키에브스키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에게 탈탈 털리고 말았다. 이 참패로 인해 바실리 4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임에 끌려가 절을 하면서 폐위당했다.
가짜 드미트리는 이를 기회삼아 자신이 러시아의 정당한 차르임을 역설하며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귀족들은 이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기스문트 3세와 협상을 마친 상태였고, 그의 아들인 블라지슬라브를 차르로 선출했다.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맞섰지만 결국 힘에서 밀려 다시 칼루가로 도망쳐야 했다.
한편 차르로 선출된 블라지슬라브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인데 차르가 되려면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해야 된다는 것을 이유로 즉위를 거부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를 핑계삼아 러시아의 직할통치를 선언했고, 가톨릭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러시아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여기에 스웨덴마저도 폴란드와 협상을 빌미로 러시아에게 현피를 신청하면서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짜 드미트리는 다시 기회를 잡고 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재규합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려 했으나 1611년 12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당했다. 그 부하라는 놈은 가짜 드미트리의 시체를 아예 토막내버렸다. 이후 마리나 므니제치가 우글리치 공작의 유지를 잇는다면서 그의 어린 아들 작은 악당 이반을 지도자로 내세워 저항을 계속했으나 결국 진압당했다. 이 때 작은 악당 이반을 비롯하여 그들을 지지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처형당했지만 마리나 므니제치는 죽지 않고 감옥에 가둬졌으며 감옥에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3.3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
아직 러시아의 동란이 마무리되지 않은 1611년 자신이 드미트리임을 자처하는 인물이 또다시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시도르카라 불리던 보제[1]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카자크인들과 프스코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프스코프의 도적"이란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앞서 등장한 가짜 드미트리들과는 달리 별다른 임팩트도 없이 1612년 3월 지지세력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4 종결
더 이상 자신이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오지 않게 되자 가짜 드미트리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후 이반 뇌제와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의 류리크 왕조는 대가 끊어진 것이 확정된 상황에서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 선출되어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왕조가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로써 마지막 짜르인 니콜라이 2세의 치세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의 동명의 오페라가 첫번째 가짜 드미트리를 다루는 내용이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9월 29일 방송분에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