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담

袁譚
(174년? ~ 205년)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장남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는 현사(顯思).

청주(오늘날의 산둥성)를 다스렸으며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였다. 결국 원가의 멸망에 단단히 한 몫한 인물이다.

2 정사

2.1 어린 시절

무제기에 주석으로 인용된 위서에 따르면 190년 당시 원소의 두 아들이 장성해 있었다고 하는데, 정황상 원담과 원희로 보인다. 당시 관례가 보통 15세 전후에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원담과 원희는 190년의 시점에서 15세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유비가 평원상이었던 시절에 유비에게서 무재로 천거받은 바 있는데 193년 초, 원소와 공손찬이 일시적으로 휴전했을 때 공손찬의 휘하로 있던 유비가 원담을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1]

아마 이때 약관인 20세 무렵의 나이가 아니었나 추정되며, 같은 해인 193년에 청주자사로 부임해 동방 문제를 담당한다.

2.2 청주 정복

193년에 이미 청주자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처음에는 도독 정도였던 것 같다.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구주춘추에서는 원담이 본디 도독이었을 뿐 자사는 되지 못했으나 훗날 조조가 자사로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196년 무렵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정식으로 원담을 청주자사로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

원담이 부임했을 당시 청주는 공손찬이 임명한 청주자사 전해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며, 청주 내의 원소 세력은 아주 미미하여 기주의 동쪽 끝 경계 부근부터 시작해 평원군 일대를 넘지 못했다. 때문에 수년간 전해와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원담은 제법 군사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부임한 뒤 전해를 격파하고 청주에서 공손찬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또한 북해태수 공융[2]을 격파해 그 세력을 멸망시켰으며, 청주에 난립하고 있던 여러 군소 군벌들과 황건적 잔당 무리도 성공적으로 흡수해[3] 오랫동안 헬게이트 상태였던 청주를 통일했고, 백성들의 열렬한 추대를 받아 그 위세가 바다까지 빛났다[4]고 하지만... 잘 나갈 땐 여기까지고 원담의 청주 통치는 엄청나게 개판이었다고 한다.

2.3 청주 통치

구주춘추에 따르면 원담은 천성이 방자하며 사치스럽고 호색한인 데다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해 주위에는 소인배만이 들끓었다. 그 결과 1만 호가 넘는 현이 있어도 세금은 그 3할에도 미치지 못하고 심지어 호적에 오른 가구는 겨우 수백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현지의 호족들이 경쟁적으로 토지겸병을 벌여 호적에 올라가는 자영농을 몰락시키고 자신의 장원에 소작인으로 편입시키는데도 '흥청망청 놀기 좋아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모르고 달콤한 아첨만 좋아하는' 원담은 호족들이 눈앞에서 아첨하며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면 여기에 도취되어 문제의 심각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는 소리고 호족들은 원담을 손쉬운 호구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연히 병역법도 개판이라 멀쩡한 현역 대상자들은 모두 현지 토호들이 먼저 자기 사병으로 뽑아가거나 뇌물로 병역을 면제받는 바람에 4급 보충역이나 겨우 징집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엔 아예 군사를 풀어 짐승떼를 사냥하듯 닥치는대로 체포하여 징집했다고 한다.

군인들의 배경이 이러니 군기도 빠질대로 빠져 도적떼를 소탕하는 영이 내려져 군대가 나오자 군사들이 전야를 노략질했고, 따로 호족들의 제대로 된 군대를 소집해도 원담을 만만하게 본 호족들은 기일에 제때 맞춰서 오는 법이 없었다. 이는 군법에 따르면 중범죄에 해당하는 사항임에도 호족들은 그로 인해 원담에게 처벌받는 일이 없었고 아무 걱정없이 편안히 지냈다. 이쯤되면 레알 호구인증

그래도 명사들을 공경하여 능력이 알려진 현사들을 널리 초빙했지만 이런 답이 없는 상황들을 보고 현자들은 원담에게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이 없는 건 아니라 왕수와 같은 유능한 인재들도 있긴 있었으나, 원담 본인의 용인술이 형편없어 소인배들을 신임했을 뿐 제대로 된 인재는 중용되지 못하고 그저 자리만 차지하는 신세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청주를 화려하게 정복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청주의 호족 세력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일반 농민들의 민생을 신경쓰지 않았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보다는 호족들의 비위만 맞추는 정책을 거듭하다보니, 오히려 호족 세력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결국 청추의 민생은 물론 원담 자신이 지식인들의 신뢰를 잃고 행정력도 추락했다고 볼 수 있다.

2.4 장자 폐출

무능한 정치로 원소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는지 정식 청주자사 임명을 전후해 원소의 형의 후사를 잇게 되면서 사실상 원가 후계자 레이스에서 일찌감치 리타이어되고 말았다는 의견이 한국에서는 대세가 되었다. 이 원소의 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는데, 원술의 친형으로 동탁에게 주살당해 대가 끊긴 원기(袁基)였던 것으로 보인다. 원기는 원술의 친형이니 원소에겐 이복형에 해당하며, 원기가 원소의 종형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기는 분명히 원소보다 나이가 많다. 원소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므로, 호적상 원기와 원소는 사촌 관계가 되기 때문에 종형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원소의 막내아들 사랑과 원담의 병크가 맞물린 결과, 원담은 장자인데도 불구하고 호적상 숙부가 되어 버린 아버지 원소의 관작을 승계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폐출되었다고 해서 후계자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상하게 중국이나 일본은 원담이 후계자에서 탈락했다고 잘 언급도 안 한다 오군의 육씨 가문을 예로 들면, 육강이 손책에게 박살날 때, 아들인 육적이 너무 어려서 그나마 연장자인 육손이 가주 역할을 이어받았다.그래도 육손은 당시 10대 초반 육강은 육손의 작은할아버지이다. 육손은 육적보다 촌수로 아랫사람인데 이어받은 것을 보면, 원담이 후계자로서의 서열이 낮아진거지, 아예 탈락했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 아예 탈락했으면 아무리 주변에서 밀어줬다고는 해도 세력을 말아먹을 정도로 후계자 자리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폐출된 뒤 원소는 원담을 조카라고 불렀고 원담은 원소를 숙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폐출되었다'는 부분 때문에 다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얘기 자체가 그다지 잘 다루어지지도 않았지만, 이를 접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의견이 갈리는 상태이다. 알고보면 삼국지연의에서 이 부분을 별 언급 안하고 넘겨버린 영향이 상당히 크다. 예를 들어 최훈삼국전투기 단행본에서 원담 폐적을 지적한 독자에 대해 다루면서 이를 적극 부정했는데, 문제는 일정한 논거를 들어 반박하기보다는 "못 믿겠다, 아니겠지, 그만하자"는 행간이라(…)

저수는 원담을 폐출하고 청주자사로 보낸 원소의 행동에 대해 토끼가 길거리를 뛰어다니면 온 사람이 뒤쫓으나 한 사람이 토끼를 붙잡고 있으면 탐하는 자들이 그만두니 이 점을 생각하라고 간언했다. 이는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려면 경쟁자들에게 기반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진언이었으나, 원소는 오히려 4명의 아이들[5]로 제각기 주를 다스리게 해 기량을 살펴보겠다는 이유를 대며 저수의 진언을 일축했고, 청주의 원담을 포함해 고간과 원희도 병주, 유주로 나가 제각기 주를 다스리게 된다.

거기에 이미 원상으로 마음을 정해 분쟁의 소지가 있을 원담을 폐출시켜 놓곤 지역적 기반을 그대로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이었는데, 의심이 많아 자식과 조카들만 임용한다는 곽가의 평이나 이 무렵부터 저수 등 호족 계열의 인사들과 대립구도가 심화되던 정황을 봤을 때, 원소는 일단 족벌 중심의 독재체제로 각 주의 통제력을 강화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후계 분쟁의 소지는 차후에 장성한 원상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서 해결할 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저수는 이를 두고 '재앙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라 말하고 다녔다고 하나, 원소는 이후로도 저수를 철저히 무시하며 점차 실각시킨다.

2.5 삽질의 반복

원소가 원담을 폐출시키고도 청주자사로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은 자식들의 충성심을 이용한 권력강화의 목적일 가능성이 크나, 이게 원담에게는 자신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희망고문으로 느껴졌는지, 그냥 포기하지 않고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청주자사로 있으면서 원술을 불러들이고, 유비를 맞아들이고, 정현을 초청하는 등 당대에 굵직한 인재 영입에 열을 올렸으며 관도전에도 원소를 따라 직접 종군하는 등 뭔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결과적으론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 원술 : 제호를 바치며 투항하겠다는 원술의 말에 원소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주부 경포를 시켜 은밀히 여론을 떠봤다가 반응이 좋지 않자 그대로 애꿏은 경포를 척살해 의혹을 해소했다. 한마디로 원술은 골칫덩어리라는 말인데 원담은 업에서 떨어져 있어 이런 분위기를 몰랐는지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 청주로 오라고 했다.(...) 원술이 도중에 죽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되었지만.
  • 유비 : 유비는 동승 사건의 관련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기에 원소 측에 조조를 칠 명분을 마련해 줄 중요한 인물이었고 원소 또한 엄청나게 중시했다. 게다가 과거에 유비가 원담을 천거했던 적이 있고, 공식 직함이 예주목이었기에 원소가 조조를 격파했을때 유비가 예주에서 어느 정도 지반을 구축하고[6] 원담과 서로 협력해 청-예주 중간에 걸쳐 있는 서주를 아우른다면, 유비는 원담의 장래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원담은 이 당시 직접 청주군을 이끌고 원소 본대와 합류하는 등 매우 의욕적인 상황이었는데, 아무튼 유비를 맞이한 것은 원담의 몇 안되는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안량,문추[7]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입지가 다소 미묘해졌고, 결과적으로 원소가 관도에서 패배하고 유비는 유표에게 가버려서 별 도움이 안 됐다. 남아있어봤자 어차피 제2의 유기 테크 아니지 유기가 제2의 유비 테크
  • 정현 : 대유학자 정현의 경우 노환으로 인한 건강문제로 초빙을 거절했는데 원담이 원소의 총애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강권해 데려가는 와중에 병이 들어 진중에서 죽었고 원소까지 욕먹이게 되었다.(...) 원술의 경우와 같이 안 해도 될 짓을 해서 스스로 손해를 본 경우.
  • 관도대전에서 직접 청주의 군사들을 이끌고 원소에게 합류하는 등 이쁨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관도전은 참패... 또한 원담은 관도전 이후로 원소의 신임을 잃고 입지가 축소되어 밀려나던 곽도, 신평과 함께 파당을 조성하는데, 이걸 원소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이후로도 곽도와 신평은 항상 원담에게 아첨하며 (나쁜 의미로) 죽음까지 함께하게 된다.

원소의 혈족으로 각 주를 장악하고 있던 고간, 원희는 물론, 원소를 제외한 원소세력 인사 전원을 통틀어서도 원담만큼 적극적으로 대외적인 행적이 보이는 인물은 없다. 이는 물론 기록 부족이란 이유도 있겠지만서도...

이는 원담이 중원의 싸움에 비교적 밀접하고 세력도 결코 작지 않은 청주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기록이 많이 남았을 것이다. 고간의 경우는 상당히 높은 비중을 가진 평가가 남아있으며 세력도 강성했으나 기록이 적은데, 현재는 유실된 사승후한서에 고간의 열전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원희는 상대적으로 후방인 유주에 있었기 때문에 중원 방향의 대외 활동은 실제로 적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이민족과의 교섭은 많았을 테지만 이민족은 기록을 안 남기니까.(…)

2.6 후계자 쟁탈전

결과적으로 하는 짓마다 병크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원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의중은 원담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원소는 여전히 삼남(혹은 막내아들)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본격적인 후계자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급사한다.[8] 202년 5월.

이 원소의 급사가 원담에게는 큰 기회가 되었는데, 당시 원상의 나이가 워낙 어렸기 때문에 기주 내에서는 원담과 야합하고 있던 곽도와 신평을 중심으로 나이나 경력면에서 앞서는(30세 전후) 원담이 옹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원담 또한 원소의 뒤를 잇기 위해 청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향했으나 도착하기 전에 원담과 사이가 나쁘던 심배 등이 선수를 쳐서 정권을 장악하고 원상을 옹립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서조작 여부는 미지수이다.

원담은 이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업 근교에 주둔시키며 원소의 첫 작위인 거기장군을 자처하는 등 원상의 승계에 불복했지만, 마침 조조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원상과 화해하고 조조를 물리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봉기는 끔살당했다. 이때 원담은 퇴각하는 조조를 추격해 습격하면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원상은 이를 거절했고, 또한 원담에 대한 군사와 무기의 지원을 중단했다.

군사지원을 중단한 원상의 의도인 즉, 공연히 욕심부리지 말고 청주로 돌아가란 소리다. 원담으로 인해 크게 위험을 겪었던 원상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지만, 후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원담으로서는 반강제로 내쫓기는 격이니 당연히 대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상이 원희등의 지지를 얻어낸 덕에 적장자로서의 정통성이 부족해도 이미 인정된 후계자인 반면, 자신은 분명 원소 생전에 원소 본인에게서 폐출되었기 때문에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따르지 않으면 반역이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양 전투는 원가가 조조를 물리친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원담은 이에 워낙 대노한데다 마침 곽도, 신평의 부추김[9]을 듣고 원상을 급습하지만 오히려 대패하여 남피로 도망간다.

이후로도 원상에 대한 적대를 멈추지 않아 다시 군사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성들을 워낙 쥐어짜서 그렇잖아도 명분 없는 싸움에 더욱 명분을 잃었고 청주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원담세력 내부에서도 곽도, 신평을 죽여버리고 원상과 화해하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가 된다. 원담은 이를 모두 무시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했으나 끝내 여기서도 거하게 털려버린다.

2.7 조조와 결탁하다

이후에 원상이 조조에게 공격을 받을 때 원담에게 구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왕수는 "형제는 손발과 같으니 원상을 도와서 조조부터 무찔러야 한다"고 말했지만, 곽도는 "그런 거 됐고, 그냥 조조군한테 위치 까발려서 죽임당하게 냅두죠"라고 했다. 그리고 원담은 곽도의 계략을 받아들였다.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이 대목을 두고 그 모사에 그 주군이라고 평한 바 있다.

완전히 대세가 기울어 원상에게 포위되자, 곽도의 계략[10]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며 조조를 재차 하북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원상을 공격해 기주 내의 원상세력을 완전히 멸망시켰으나, 조조의 업성 접수와 원상의 패퇴를 틈타 감릉, 하간, 안평, 발해, 중산 등 기주의 5개 군국을 점령하는 등 세력 확대에 매진하면서 야욕을 드러내자 결국 조조에게 공격을 받는다.

204년 12월, 원담은 조조가 자신을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평원에서 나와 용주[11]에 주둔하며 영격할 태세를 취하나 막상 조조가 자신의 군문 앞에 진을 치자 응전하지 않고, 밤중에 달아나 남피까지 이르러서는 그곳에 다시 진을 치고 주둔한다.

이듬해인 205년 1월, 남피에 도착한 조조와 싸워 한 번은 조조를 격파해 철수까지 고려하게 만들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격전 끝에 패하고 목숨을 잃는다.

조조가 온다는 말에 용주에 주둔하며 폼을 잡다가 막상 조조가 오자마자 남피로 달아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한서엔 원담이 남피에서 조조와 싸울 때 군대를 집결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담이 죽은 직후에 도착해서 통곡하던 왕수의 예를 봤을 때 단기간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전력이 각지로 분산되었기에 합류를 기다렸지만 군대 소집이 계산보다 늦어지던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8 원담의 목을 베었다

후한서 원소전에는 원담의 마지막 모습을 좀 더 비참하게 묘사하였다. 패배한 원담은 말을 타고 도주하다가 낙마했는데, 추격병을 다 따돌렸다고 생각했으나 유독 집요하게 쫓던 한 사람이 있어 원담에게 이르렀다. 원담은 추격병에게 "나는 너를 부귀하게 해줄 수도 있다."면서 목숨을 구걸했으나, 추격병은 이를 완전히 무시해서 원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원담의 몸과 머리를 분리시켜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원담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호표기를 통솔하던 조순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정확히는 조순이 아니라, 조순이 통솔하던 호표기 대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호표기의 역대 지휘관이 전원 조씨라는 점도 있고, 마침 조조의 하북 평정 무렵부터 조씨, 하후씨 2세대의 인물들도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정사를 참고하는 판본에서는 이들의 임팩트있는 첫등장을 위해 원담을 칼밥으로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담의 일족은 몰살되었고, 원담의 수급은 감옥문에 내걸렸다. 하지만 뒤늦게 달려온 왕수(王修)가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담의 수급 앞에서 곡을 하고 조조에게 원담의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청원하였으며 조조가 이를 허락하여 겨우 매장은 될 수 있었다. 왕수의 절의를 높이 평가한 조조는 왕수를 등용하였고, 이후 왕수는 조조 아래에서 위군태수, 대사농 중서령 등의 벼슬을 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소가 "성질이 급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한다."며 별로 좋지 않게 평가했고, 원소의 평가대로 성질이 급해 병크를 저지르는 모습도 자주 보이지만, 원소가 "어질고 영웅의 기개가 있다. "고 평가한 원상이 원담 이상가는 막장임은 물론 거의 패륜아에 가깝게 나와서 원담의 막장성은 상대적으로 희석되고, 오히려 원소에게서 폐출되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저런 막장짓이 장남이기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어 보인다.(이에 대해선 원상 항목 참고)

덤으로 유비가 서주에서 쫓겨나자 원소에게 피할 때 처음으로 유비를 맞이하기도 하고, 원담을 지지하는 대사도 해 주는 등 전반적으로 옹호적이다.

조조에게 항복한 뒤 조조와 사돈을 맺는 것이 조조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라지만 조조가 동년배 친구인 원소의 아들과 사돈을 맺는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주 독자층인 서민들에게는 쉽게 와닿지 않으니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12] 조조에게 원담이 항복했을때 조조는 원담을 칭찬하며 사위로 삼겠다고 공표했지만 실제로 딸을 보내지는 않았고, 조조가 원상과 싸우는 동안 원담이 세를 넓히자 맹약 위반을 이유로 혼약을 파기한다.

실제 역사상에서 원담의 딸의 운명은 상당히 안습한데, 조조가 원담의 항복을 받아들여 북상한 203년 10월,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으로 조조에게 보내져 며느리가 되었다가, 딱 1년만인 204년 겨울에 원상이 몰락하고 조조와 원담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소박을 맞아 원담에게 되돌려 보내졌다는 기록 외에는 직접적인 등장이 없지만, 원담의 사망 직후 원담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고 나와서 끔살당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원소의 처 유씨와 원소의 딸들, 원상의 형수 견씨와 원상의 처자 등 원상과 같이 있던 원씨 일족들이 수모를 당했을지언정 신변만큼은 보호되던 것과 비교했을때 상당히 대조적인 처우.[13]

결국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조홍일기토를 벌여서 죽는다. 후한서를 참고하지 않았는지 찌질한 최후가 나오지 않아서 나름대로 이미지 업?

4 평가

아무튼 결과가 저랬고 하는 짓이 워낙 막장이라 그다지 주목되지는 않지만, 열악한 상황에서도 전해, 공융 등을 격파하고 청주 전역을 재패했으며, 분산된 전력 집결에 실패하는 등 유리하다고 보긴 힘들었던 상황에서 벌인 조조와의 회전에서도 한 차례 승리하는 등 꽤 선전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 재능은 의외로(?)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격적으로는 이래저래 소인배스러운 인간. 야심 많고 경력도 화려한 장남이 아버지에게 폐출되면서 까마득히 어린 동생을 섬겨야 한다는 울분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보여주는 행동이 전부 근시안적인 데다 치졸한 수준이라 사실상 원가가 망하는 데 모든 역할을 혼자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근본적으로는 원담이 원상한테 개기는 게 가능할 만한 여건을 만들어놓고, 후계자 문제를 수습 못한 채로 급사해버린 원소의 책임이지만...)

유표는 원담을 일컬어, '천성이 급하며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고 평가했다. 나이 역시 아무리 적게 잡아도 원상보다 최소한 열 살은 많을 터이고(이 정도면 거의 띠동갑 수준이다!) 경력은 그야말로 넘사벽인데 유표는 원상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청주(=원담)가 천성이 급하고 그야말로 앞뒤 분간을 할 줄 모르지만 동생 쪽은 현명하니 큰 것으로 작은 것을 포용하고 우월함으로 열등함을 받아들이라고 한다.[14]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원담의 어리석은 결정이) 만세가 경계할 실례가 될 것이며 모든 동맹자들에게 수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대에서도 보통 한심하게 생각한 게 아닌 듯 하다.

구주춘추에선 원담을 비록 군사적 성공을 제법 거두긴 했으나 성품이 교만, 방자하며 음란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민정에도 무능하고, 주위에는 소인배들이나 기용하는 용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사실 구주춘추에서는 좀 거하게 깠지만 역사상의 평가나 행보를 종합해서 본다면 허영심이 강한 무골호인에 가깝다. 나름대로 능력이나 인망은 있지만 유달리 허영심이 강한데 귀는 얇고 충동적인 성향이 심해 그냥 생각 자체가 없는 듯, 하북을 말아먹는 그 장대한 병크도 별 계획 없이 그냥 꼴받아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쪽에 가깝다.(...)

원담에 대한 소수 의견으로 삼국지의 주석으로 인용되고 있는 전론에 의하면, 어질고 총명했다고 하고, 후한서에서도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하는 짓을 보면 총명은커녕 아무리 봐도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전론의 저자 역시 편협하고 치졸한 인간성으로 이름 높은 그 조비인데, 조비 역시 조식, 조충 등 동생들에게 후계 자리를 위협받아 동병상련으로 생각했는지 원담, 유기와 같이 동생에게 밀려난 형들을 노골적으로 동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전론 자체가 애초에 순전히 조비의 자기과시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책(더군다나 대체로 문학적 담론이 주류를 이룬다.)이기 때문에, 이러한 책의 성격과, 저자 개인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사서로서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15]

물론 원담도 일단은 나름대로의 군사적인 실적이 있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유능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또한, 전론에 의하면 조조와의 연합따위 때려치우고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죽이고 화해하자는 심배의 편지를 받고[16]눈물을 흘렸으나, 이미 전권을 곽도가 장악해버렸기에 곽도한테 겁박당하며 돌이킬 수 없었다는 말도 있다. 원담의 막장짓이 도저히 커버가 안되니 "그래도 나중엔 후회했다."는 식으로 쓴 게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이에 따르면 결국 마지막까지 호구였다는 소리니 이러나저러나 안습...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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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 에서는 원상보다 더한 쓰레기 능력치로 등장. 어느 시리즈든 항상 터무니없는 성능을 자랑한다.

삼국지 3에서는 그냥 잉여로 등장. 가장 높은 능력치가 무력 58이다. 원상,원희와는 당연히 비교가 안되는 쓰레기. 거기다 수명도 짧아서[17] 후계자로도 안좋다.

삼국지 6에서는 콩가루 집안인 원가의 사정을 반영해서인지(…) 원소의 아들들이 가진 꿈이 모두 최상위의 세 가지로 갈라지는데, 원담은 여기서 왕좌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서주에서 개발살난 유비를 원소 진영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원담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여담으로 원희의 꿈은 할거, 원상은 패권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원상보다 안 좋은 58/70/27/34. 병법도 분전, 충차 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2/68/30/40/57에 특기는 일제, 회복, 명사 3개 뿐. 아버지빨 명사 특기 빼면 그냥 쓰레기이다.

삼국지11까지는 아버지 뻘인 조조보다 삭은 얼굴이긴 해도 그나마 정상인다운 일러스트로 나왔으나 삼국지 12에서는 영락없는 개그맨 이미지로 나오고야 말았다. 후계자가 원상으로 선정된데 열불내는 장면인데 제 3자가 보기에는 우스운 표정. 전법은 무력상승 알디시피 실상은 현시창.

삼국지 DS 2의 경우, 전해보다 전 능력치가 낮게 나왔다. 통무지정매순으로 61/54/44/59/54[18]로 무력 72를 최고로 높은 능력치로 기록한 동생 원상이나 통솔 70에 지정이 60대로 원가 일원 중 수준급 능력을 자랑하는 원희에 비해서 최고로 높은 능력치가 통 61이라 거의 넘사벽 차이의 잉여력을 자랑한다. 능력치 합도 272로 원소 삼남 중 가장 낮고[19] 특기도 궁장과 화시 등 전투적으로 설정된 주제에 기본적인 능력치가 낮아서 쓸모없다. 그냥 머리수 채우기로 생각하는 게 편하다. 그래도 정치 59로 원상을 이겼다는 게 위안...이 될까?

5.2 삼국지 조조전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관도전투와 창정전투, 여양전투, 남피공략전에서 기병계 클래스로 등장한다. 그런데 황금갑옷을 착용하고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무적캐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한다. 아주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에디터를 쓰고 유닛의 운 수치를 높이거나, 전 캐릭터에게 옥새를 착용시켰을 경우... 일반공격으로는 절대로 퇴각시킬 수가 없는 무적캐로 변신하게 된다. 물론 이럴 때는 책략으로 갈궈주면 된다. 때문에 초보 사용자의 경우, 원담이 최종보스인 남피 공략전에서 쓸데없이 턴을 낭비하거나 제한 턴이 초과하는 경우가 있다. 유념해 두자. 혹은 조홍을 출전시켰다면 조홍으로 일기토 걸어서 죽이면 된다.

조조전에서의 얼굴은 삼국지 영걸전왕평과 똑같이 생겼다. 이러한 영걸전 얼굴 재활용은 그의 형제들에게 다 공통된 것으로, 둘째 원희는 영걸전의 경무의 얼굴을, 셋째 원상은 손환의 얼굴을 갖고 있다.

여담으로 "원담의 목을 베었다."라는 "조홍"의 대사가 디시인사이드 고전게임 갤러리의 필수요소가 되었다.위에 나온 무적캐 원담을 보병계 최강 쩌리인 조홍이 잡는걸 보고[20] 이것이야말로 인간승리라며 칭찬하는까는 용도로 사용한다.어째 취소선이 반대로 되어있는거 같은데

5.3 창천항로

관도대전의 서막이 오를 때 서주에서 패한 유비를 데리고 원소에게 안내하며 보고하는 것이 실질적인 첫등장.[21] 이후 관도대전에서 계속 얼굴을 내밀면서 등장.

고지식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원소의 아들들 중 가장 젊은 시절의 원소와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으나, 황제병 걸린 돼지로 전락한 원소가 '왕도' 운운하며 이해못할 기행을 벌이고 이에 사람들이 전원 감격하는 등 집단 정신병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것에 '도저히 아버님의 왕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며 고뇌하는 어찌보면 지극히 상식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저수전풍마저도 황제병 걸린 원소에게 감화되던 작중 모습을 봤을 때 어쩌면 사실상 원소 진영 유일의 정상인 포지션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원소의 행동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격하는 원상과는 완전히 상극으로 이 때문에 원상에게 틈만 나면 갈굼받으며 진중에서 거의 왕따 비슷하게 되면서 초조해 하고, 때문에 공을 세우기 위해 한순을 통한 보급선 공격을 시도하기도 하나 결과적으로 조조는 이걸 적들의 동요로 받아들이면서 반격을 개시해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되는 등 하는 정신병자 가깝게 묘사되는 원소와 그 추종자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상식인의 태도로 행동하지만 작중 결과는 오히려 미묘하게 나오는 등 뭔가 이해하기 어렵게 나온다.

오소 함락과 주둔군 전멸 이후, 이 사실을 은폐하며 원소에게 "적의 피로는 이제 극에 달하여 한방에 깨부술 수 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당당히 퇴각하는 것이 우리의 왕도" 라는 정신승리에 가까운 진언을 하는 원상 앞에 만신창이가 된 채로 나타나 오소의 2만 군대가 하룻밤만에 전멸했으며 식량고는 모두 불타 원정군의 군량은 모두 고갈되었다고 폭로하며 원소에게 왕도란 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전쟁인 이상 승리 이상의 결과는 없을 터이니 왕도에 연연하지 않고 40만 군대가 분연히 일어나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다면 무엇이 두렵겠냐며 더욱 진군해 천자를 죽이고 허도를 약탈하라는 호령을 내려 달라고 외친다.

매우 열혈 분위기의 간지를 내뿜지만, 사실 전략적으로 볼 때는 바보나 다름 없는 짓이었다. 애초부터 사기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굶기면서 싸우고 있던 병사들이 이제는 완전히 굶어야 된다는 소식을 듣고 "뭐? 식량 없어?! 그럼 죽을 각오해서 싸워서 적을 하루 빨리 몰살시키자~!!"는 생각을 먼저 할까? 아니면 "뭐, 뭐... 시, 식량이 없다고...?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지.. 어어....?"라는 상태가 되는 게 먼저일까? 당연하게도 결과는 후자였고, 원상과 참모들도 이걸 걱정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 써가며 말을 빙빙 돌려 원소에게 후퇴를 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원담에 말 한로 병사들에게 알려져 버렸으니, 당연히 좌중이 경악하고 원소는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이 직후 조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원소군은 완전히 개박살나고, 원담은 명령은 나중에 받겠다며 원소를 붙잡아 피신시키고 본영과 연결된 땅굴에 숨지만 지상의 본영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고 조조가 땅굴 속의 원소에게 꽃 한송이를 던져주는 기괴한 엔딩으로 관도대전이 끝난다.

이후 원소의 병사와 조조의 하북 평정은 나레이션 처리되고, 원상과 원희는 오환 토벌에서 재등장하지만 원담은 관도대전의 해괴한 엔딩을 끝으로 더 이상의 등장이 없다.

도대체 이게 띄워주는 건지 은근히 까는 메시지를 담은 건지 미묘한 캐릭터이긴 한데, 일단 독자 시점에서 보면 정신병자 집단인 원소군에서 유일한 정상인에 가깝다.

5.4 화봉요원

화봉요원 최고의 찌질캐 중 하나. 처음 등장 때는 나름대로 샤프해 보이는 얼굴에[22][23] 뭔가 카리스마 있어 보였지만, 전부 훼이크... 작중에서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아예 내레이션으로 '겉멋만 든 귀공자'라고 깐다(...). 첫 등장부터 지 아내도 아닌 견씨에 대한 흑심을 내비치더니, 대군을 이끌고 있으면서 요원화, 장료 단 두명에게 털리고 난 후, 여포가 아직 살아서 조조와 동맹을 맺었다느니 여포가 둘이라느니 거의 PTSD 수준으로 보이는 헛소리들을 지껄여 원방의 비웃음을 사는 등... 게다가 관도에서도, 원방과 원상이 준비해 놓은 판에 괜히 자기도 공 좀 세워 보겠다고 끼어 들었다가 전황을 완전히 말아먹고, 결국 오소에서 원방의 함정에 걸려든다. 그야말로 정진정명의 안습캐...

5.5 삼국전투기

원소가 가르마였다가 데긴으로 역변하면서 데긴의 아들인 기렌 자비로 나온다. 작가 소개에서는 원소에 못지않은 뛰어난 재능을 갖췄으나 원소만큼의 인망은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패기 넘치는 원상과 달리 신중하다는 표현도 있고, 간간히 등장해서 야심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묘사를 봤을 때 유능하지만 냉정하고 음험한 야심가 이미지를 컨셉으로 잡은 듯 하다. 근데 아무리 봐도 연의는 물론이며 사서상의 이미지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카리스마있는 악역인 기렌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원소 사후의 큰 틀에서 비중이 낮은 하동 전투를 순전히 마초 띄워주기용으로 3화에 걸쳐 연재한 것을 빼면 조조의 하북평정은 사실상 3화에 전체 압축되어 진행된 만큼 비중은 잉여로 전락했고 결국 한컷만에 죽는다.

생전 원소에게서 폐출된 사실은 언급되지 않으나, 이 점이 지적되자 최훈은 단행본에서 이를 언급하며 적극적으로 부정하였다. 심배가 쓴 글에서 원담 폐출의 내용을 언급함을 들어 원상 진영의 사람인 심배의 발언이니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에 더해 구주춘추의 내용을 인용하며 원소가 자식들의 재능을 살펴보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원담을 후계에서 배제하려 했다는 뉘앙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앞뒤도 맞지 않으며, 원담 또한 청주를 평정하면서 후계자로서 결함을 보인 바가 없다는 것이 것이 주장의 근거.

하지만 원담의 폐출 사실은 심배의 글과 별개로 후한서와 자치통감의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고, 한번만 언급된게 아니라 원담 진영의 인사인 곽도와 신평의 발언을 통해서도(이를 심배 탓으로 돌려 원담을 부추기고 있긴 하지만) 재차 확인되기에 무작정 심배의 말이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심배의 발언이라 해서 원담의 폐출 자체를 부정하고 원소 발언의 의도를 자식들의 능력 확인이란 문면 그대로 해석해 원소는 원담을 배제한 적이 없다고 보는 것도 기본적인 전거가 잘못된 추론으로, 원소의 의도가 먼 미래의 후사 문제보다는 당장 원씨 일족의 족벌경영을 통한 권력강화에 있었다고 본다면 후사 문제를 일단 원담 폐출이라는 미봉책으로 마무리짓고 원담을 포함한 자식, 조카들로 외주를 관리하게 하는 것은 앞뒤가 어긋나는 판단이 아니다.

또한 최훈은 원담이 후계자로서 어떤 결함도 보인 바가 없어 원소의 미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구주춘추에서 원담이 화려하게 청주를 평정하는 부분만 인용하고 이후 청주 통치과정에서 보인 막장행각은 쏙 빼먹는 악랄한 짓을 저지르곤 뜬금없이 심배의 문서조작을 거론하며 피장파장이란 식으로 요지를 흐리고 스리슬쩍 넘어가고 있는데, 이 점은 욕먹어 마땅한 부분.
  1. 이때의 인연 덕인지,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관우장비 없이 하북으로 갔을 때 원담이 유비를 얼른 알아봤다. 또한 유비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아버님께 알려서 본성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정도다.
  2. 참고로 공융이 북해에서 축출된 것은 건안 원년(196년), 사망한 것은 건안 13년(208년)이다.
  3. 삼국지 하기전의 기록. 대체로 관직을 주어 포섭했던 것 같다.
  4. 당시 청주의 해안지역은 해적들이 극심했다. 요동에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던 공손도 또한 바다 건너로 군사를 보내 동래군 일대의 현들을 점령하고 영주(營州)라고 부르며 영주자사를 두는 등 객기를 부린 바가 있고, 수만명의 군사를 보내 공융에게 찝적대다가 크게 패하는 기록도 있다. 원담이 청주 전역을 제패했다면 이런 해상세력들과의 충돌은 필수적인데,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바다까지 위세가 빛났다'는 표현으로 봤을 때 해적들을 소탕하거나 본국과 떨어져 있던 요동 공손씨의 영주자사부를 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고 보기도 한다.
  5. 보통 원담, 원희, 원상 + 고간으로 보나, 원매가 원소의 4남이라는 설도 있기에 원소의 아들 4형제로 보기도 한다.
  6. 실제로 관도전 당시 조조의 후방 교란을 위해 예주로 파견되었다.
  7. 문추가 연진에서 패할 때 누구랑 같이 지휘했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원소 세력 내에서 신참인 유비의 실질적인 입지는 크지 않았다고 봐야겠지만 어찌 됐든 손에 꼽는 고위직 인사였던 만큼 패전 책임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8. 생전에 원상을 적사(=대를 이을 아들)로 족보에 올렸으나 급사해버려서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9. 곽도와 신평은 이런 원담에게 원소가 그를 폐출시킨 것은 모두 심배의 이간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언했다. 물론 모함이었지만 심배는 평소부터 원담과 대단히 사이가 나빴고, 또한 당시 어린 원상을 옹립하여 기주의 권력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원담은 이를 그럴듯하게 여겼다.
  10.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일단 조조에게 항복하여 원상을 무찌른 후, 지쳐 있는 조조군을 급습하여 격퇴한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11. 평원국의 서쪽, 용하라는 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원소가 이곳에서 공손찬을 대파한 적이 있다.
  12. 생각해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게 애초에 조조의 자식들은 아들딸 합쳐 50명에 가까웠으며 개중엔 손자들보다 어린 자식들도 있었다.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며 조정은 조조의 아들들 중 항렬이 낮은 편이었으니 나이 차이 자체는 평범한 부부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물론 조정이나 원담의 딸이나 당대 평균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고, 일부다처제였던 당대 기준으로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도저히 쉽게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겠지만
  13. 이 때문인지 당나라 시대까지 원희의 자손이 남아 재상을 배출하기도 했다.
  14. 당시 원담은 적어도 30세 전후였으며, 원상은 많아도 20세 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5. 당나라의 역사가 유지기는 저서 '사통'에서 조비의 전론을 일컬어, 자뻑이 지나치게 심하고 자기 좋을대로 말해서 그다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평가했다.
  16. 원상 측에서 화해하자는 신서를 보낸 것 자체는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기에 사실로 봐야할 것이다.
  17.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경우도 많다.
  18. 전해는 동일의 순으로 68/65/56/61/63... 이정도면 거의 급이 다르다;; 물론 특기수는 동일하지만...
  19. 원상은 301로 2등, 원희는 306으로 1등
  20. 게임상 무력 수치도 원담이 조홍보다 훨씬 높다.
  21. 원상이 공손찬을 끔살시키는 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폼잡고 서있는 원소 뒤에 원상과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보인 것이 첫등장이나 폭풍간지를 내뿜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원상과 달리 아무런 소개 없이 마지막 한 컷에 얼굴만 내밀었을 뿐이라 이 캐릭터가 원담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고, 사실상 원소가 서있는 장면의 배경에 가깝다.
  22. 동생들과 비교해 보면 좀 이질적인, 약간 원방을 연상시키는 외모인데... 한편으로는 진삼국무쌍 4편의 조비 캐릭터와 꽤 닮았다. 작중에서 그의 사촌이자 배다른 형제이며, 경쟁자이기도 한 원방이 사실 조비라는 설이 대세임을 생각하면 뭔가 뿜기는 캐릭터 디자인.
  23. 근데 요즘 조비=원방설은 원천 분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