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요시미치

역대 조선 총독
초대2대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하세가와 요시미치사이토 마코토

長谷川 好道,
1850년 10월 1일 ~ 1924년 1월 27일

일본의 군인, 정치가, 일본제국 육군 원수를 거쳐 조선총독부의 제2대 총독(1916년 10월 14일 - 1919년 8월 12일)을 지냈다.

1 육군 대장이 되기까지

전임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와 같은 동향 조슈번(야마구치) 하급무사 집안 출신이며[1], 1871년에 군에 입대하여 세이난 전쟁, 청일전쟁때 공을 세운다. 특히 청일전쟁때 뤼순 공격으로 전공을 크게 올린다. 1895년, 군인으로써의 공을 세워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카조쿠, 귀족)이 되고 일본군 육군 대장까지 오른다.

2 전대 총독에서 계승한 무단통치

1904년부터 1908년까진 일본군의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되어 대한제국에 영향을 끼치며 1907년에는 자작으로 승진했다.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던 시점에는 백작이 되어 있었다.
이 시기 하세가와는 숭례문을 헐려고 했던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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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에게 경례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제2대 조선총독으로 재임 당시.) 하세가와가 화족이긴 했지만 영친왕은 화족보다 높은 왕공족이었기 때문에 저런 장면이 연출된 것. 애시당초에 물론 허울뿐이라지만...

1915년 육군 원수로 진급하고, 1916년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후임으로 조선 총독에 취임한다. 하지만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하세가와는 '전임자의 행정적 자취를 답습'한다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으며 데라우치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하세가와의 말은 따르는 척 하면서도 수면 아래에선 그의 명령에도 복지부동으로 일관했다. 거기에 하세가와의 금전적 탐욕 때문에 부하 관료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배신자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하세가와의 토색질 때문에 무단통치의 근간이 되는 헌병대의 사찰을 위한 비용까지 삭감되어서 하세가와 시절엔 무단통치가 무단통치가 아닌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기에 이른다.(...) 사실 하세가와 본인이 싫다는 것을 데라우치가 조선을 조슈 군벌 외에 다른 자들에게 줄수 없다고 억지로 끌어와서 앉힌 판국이었으니 더 안습이다.

이러한 안습한 나날은 말년까지 이어져서 일제에 도움이 된 토지 조사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승하하면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통치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대규모 소요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아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고 그와 같은 파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시베리아 출병, 쌀사건으로 인해 퇴임하면서 동시에 몰아닥친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게 되는데 이후 일본에서 후임 조선 총독을 누구로 정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하라 타카시, 다나카 기이치를 중심으로 하는 문관 총독론과 육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관 총독론이 강하게 대립했는데 이들의 의견을 절충한 것이 법제상으로는 문관 총독 임명도 가능하게 하는 대신에 새 총독으론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이 이루어짐으로 절대군주와도 같았던 조선총독의 권한 및 총독부의 구성에 대해 손을 보게 된다.

데라우치와 사이토 사이에 낀데다 3.1운동의 폭풍으로 묻혀버린 인물인데, 삼일운동을 강경진압한 장본인이면서도 이후 문화통치의 큰 목적을 이미 구상해놓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총독을 사임하면서 사이토에게 인수인계와 함께 남긴 조언문이 제도와 통제를 완화하고, 중추원 구성과 양국인의 혼인 장려 등 조선과 일본의 동화수준을 높여나가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던 것. 사실 그가 특이한 건 아니고 일본에선 진작부터 조선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오히려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무단통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후 니토베 이나조우 교수 등이 주장한 동화정책이 사이토 총독부에 의해 채택됨으로 우리가 아는 문화통치가 실시되게 된다.

3 이후

그 후 정계에서 은퇴 후 별 일 없이 평탄하게 살다가 1924년 사망.
너무 간단하잖아

이건 뭐 별 일 없이 살다가 죽음
  1. 메이지 유신이후 일본제국 육군은 조슈번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반면 해군은 사츠마 출신들이 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