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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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도 한국대학 졸업식 모습1953년 발행된 한국대학 수료증

韓國大學
Hankook College (1947~1955)

1 개요

한국대학은 1947년 10월 22일 독립운동가이자 백범 김구의 수제자인 대용 한관섭(韓觀燮)이 조국해방과 더불어 김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민족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세운 한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이다. 당시 한대(韓大)라는 약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55년 2월 14일 문교부에 의해 폐교 조치되었으나, '국제대학'으로 재건되어 오늘날 서경대학교에 이른다.

2 일본대학 분교 제안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7∼8년 전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한관섭은 일본대학 총장을 단독으로 만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국에 일본대학의 분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우리나라에 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당시 국내 사정으로는 그 여건이 전무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서라도 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의 실정을 잘 알지 못했던 일본대학 총장은 이를 신통치 않게 생각했으나 젊은 청년의 뜻깊은 교육열의에 감동하여 여행의 형식로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학 총장이 건강악화로 인해 사망하여 일본대학 분교 설립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3 한국대학의 설립

8.15 광복이 되자 한관섭은 서대문에 있는 일본인 양옥집을 접수하여 영어특수학원을 설립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강화도 교동땅, 일산땅, 광나루땅을 매입해서 재단법인 한국학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야간에는 비어있는 선린상업고등학교 교실을 빌어 꿈에 그리던 한국 최초의 4년제 정규 야간대학 '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한국대학은 서울대학교에 이은 대한민국의 두 번째 정규 대학이었다.[1]

한국대학이라는 교명에는 뒷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도 교명을 한국대학으로 신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교부 접수순에 의해 먼저 신청한 학교가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교명을 고려대학교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대학은 대동상업고등학교로 교사를 옮겼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전국에 있는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제주도 서귀포 정방폭포 정방사 입구에 초가집 1동을 한국대학의 분교로 하여 운영하였다. 전쟁 도중에는 부산 전시연합대학으로 합쳐져 운영되기도 했다.

수복 후에 한관섭은 대학 건물을 물색하던 중 장충동(을지로 6가)에 텅 빈 아파트(일본 적산가옥)가 있어 중구청을 통해 사용승인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비로소 한국대학이 터를 잡게 되었다.

4 학풍

당시 한국대학에는 2개 학부, 6개 학과가 존재했다. 학생수는 1천 3백명 가량이었다고 전해진다. 각 학부와 학과는 아래와 같다.

  • 법정학부
    • 법률학과
    • 정경학과
  • 문리학부
    • 영문학과
    • 경제학과[2]
    • 수물학과
    • 화학과

한관섭은 국가가 떳떳한 독립국가로써의 여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쉰다는 것을 죄악시했다. 따라서 낮에는 폐허화된 민족경제의 재건에 힘쓰고 남은 시간에는 민족 정신을 교육해야 한다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강조하였다. 또 학교는 오로지 면학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곧은 지론을 바탕으로 외부의 간섭도 용납치 않아 문교부의 불필요한 지시도 거부했다. 당대 학계 최고 석학들을 교수진으로 초빙하고 토, 일요일에도 밤 늦게까지 직접 특강으로 보충강의를 하는 등 교육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당시 한국에는 정식 대학교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이 우수한 교수진들은 대부분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관섭은 교수들에게 직접 찾아가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을 보고만 있어야 되겠느냐"며 여러번 간청하여 우수한 교수들이 한국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유능한 교수를 계속 확보하기 위해 요즘의 통학버스와 비슷한 개념인 12인승 마차를 만들어 교수들의 출퇴근을 돕기도 했다.

또한 신부, 수녀, 목사, 스님 등 다방면의 종교계 인사를 초빙하여 종교특강을 실시하는 등 자율적인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 의식수준 향상에 노력하였다.

5 폐교, 재단 이양

문교부는 한국대학이 야간대학으로 인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허락없이 주간대학 학생을 모집하였고 이사장학장 분리하여 운영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폐교를 명령했다.[3]

당시 문교부가 지적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학칙변경 없이 주간과정 약학과 학생을 불법 모집하여 대학정원 초과
2. 교육제도에 없는 통신교육 실시, 통신교육생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한다고 허위광고
3. 전임교수, 부교수, 전임강사 미채용

이에 대해 한국대학 측은 주간과정 학생 모집은 사전에 문교부의 언약을 받아서 한 것이고, 허위광고는 문교부 소관이 아닌 공보실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이며, 문교부가 교육법을 지나치게 적용하여 대학에 대해 무리한 처사를 하고 있다고 해명하였다.

결국 한국대학은 1955년 2월 14일 폐교의 운명을 맞이하였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폐교된 대학으로서 한국대학은 뜻하지 않게 이러한 불명예를 갖게 된다. 한관섭은 이러한 행정처분에 대해 반발하여 문교부에 항의,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벌였지만, 끝내 패소하였다. 한국대학의 폐교는 당시 언론에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과도한 처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한편, 한국대학이 위치해 있던 장충동 부지는 국방부에서 인수하여 전시군인연합대학의 교사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국내 유일의 4년제 야간대학인 한국대학의 특성상 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1,000여명의 학생을 편입시킬 학교가 마땅치 않았고, 이에 문교부는 기존 이사진을 해임시키고 한국대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낙하산 김정실을 한국대학 학장으로 위촉하여, 뒷수습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렇게 하여 김정실은 국제학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재학생들은 한국대학의 복구, 김정실 학장의 사퇴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폐교 처분을 받은지 한 달 만인 1955년 3월 28일 재단법인 국제학원에서 한국대학을 인수·승계, 국제대학으로 개명하여 성동구 신당동 224번지에 자리잡고 한국대학의 정신을 이어나가게 된다.
  1. 그 시절 우리나라의 대학이라고 하면 서울대학교를 제외하고는 전부 학원이나 전문학교 형태였다.
  2. 1949년 폐지
  3. 1950년대 문교부는 불분별한 대학 설립을 막고자 대학설치 기준령을 제정하기로 하는데, 이에 대한 본보기로 한국대학을 선택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는 시각도 일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