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14081940592185.jpg

focus_103983_2.jpg
돈의문 현판. 현재 유일한 돈의문의 흔적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

한양도성 8대문 및 보신각
창의문
북문
혜화문

서대문
지문
동대문
소의문
남대문
광희문

1 개요

敦義門. 조선시대 한양의 서쪽 대문으로 '의의(意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한성에서 평안도 의주까지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이자 외교사절이 오면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가는 나라의 중요한 문이였다.

2 위치

서대문이라는 이명(異名) 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서울 중구 정동의 현재의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자리가 돈의문 터였다.

다만 중구 정동을 비롯한 중구 서쪽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로 편입된 곳이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존재했던 게 맞다. 동대문구와 같은 케이스.

3 역사

한성 4대문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못한 비운의 대문

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가 마무리 될때 지어진 8개의 성문중 하나로 세워졌다.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 이때 세워진 첫번째 돈의문은 1413년(태종 13년)에 돈의문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좋지않다는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의 건의로 폐쇄되었다.[2]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은 지역의 지맥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사람과 말의 통행을 금지시켜야 합니다.

ㅡ 조선왕조실록 1413년 6월 19일

태종은 대신할 문을 세울 위치를 의정부에 명하여 찾아보게 했는데 이 때 태종시대의 대표적 권신이던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자 이숙번이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궁인(...)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만한 곳이라 하여 조정이 그대로 따라 그가 말한 곳에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상왕 좆까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린 뒤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우고 그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으니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위치의 돈의문이다. 이때부터 돈의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새로 세운 문'이라는 의미로 새문이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여기서 '새문'의 유래가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대의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고 마소가 오가자 시끄럽다라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 [3]이라 하였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구한말에 정동에 세워진 새문안교회는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굳어지게 된다. 이후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게되자 1711년, 숙종 37년에 다시 짓게 된다.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가 된 1915년. 돈의문은 일제의 경성 개발 중 전차 궤도 복선화[4] 추진에 걸림돌이 되었고 총독부의 결정으로 처음에는 흥인지문과 돈의문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은채 문 양쪽 성벽을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00년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총독부 토목국 조사과에서는 돈의문의 경매입찰은 진행하였고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낙찰되었다.

ㅡ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

그 뒤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고[5]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4 현황과 복원 계획

1256175430%EB%8F%88%EC%9D%98%EB%AC%B8%20%EB%B3%B5%EC%9B%90%20%ED%88%AC%EC%8B%9C%EB%8F%84%20copy.jpg

숭례문과 흥인지문만이 남아있던 탓인지 돈의문의 이명인 서대문은 각종 지명에만 남아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대문은 어디있는지 관심을 안가졌다는 점에서 비운의 대문이 되었다(...) 일제가 철거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을 것이란 점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 숙정문은 있긴 하지만 북악산 내에 있어서 공기... 사실 숙정문이 더 슬프다.

남아있는 일제때 촬영된 사진을 보면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는 달리 한가운데에 크게 문이 있고 성루에는 2층 누각인 숭례문,흥인지문과는 달리 단층 누각이라는 특징이 있다.

복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끝에 서울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돈의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2015년까지 서울 성곽도 복원될 예정이었으며, 그러면 복원된 숭례문과 함께 4대문과 성곽이 복원되는 셈이었다. 이는 돈의문 복원을 위한 자료수집 중에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돈의문 현판을 발견하였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후 돈의문 복원사업은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진 상태다. 이전에는 복원 시 서대문 고가도로 철거 후, 새문안길에 지하도로를 뚫고 그 위에 돈의문 문화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새문안로가 종로를 잇는 간선도로이며 복원기간 내의 교통체증 해결문제가 큰 사안으로 떠올랐고, 가장 큰 문제는 돈의문 외형 사진 몇 장, 현판 말고는 복원 근거 자료가 전무하다는 의견으로 현재로서는 복원이 무산되었다는 게 중론....수원화성을 복원했을 때, 발견 되었던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수원화성은 거의 완벽하게 복원 되었지만...어디 한양도성의궤 같은 것 없나?

사실은, 경희궁과 약 50m 거리로 돈의문과 경희궁을 통합해서 복원하려하는데 교통문제, 예산문제, 토지문제등 현실적인 문제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돈의문 주변 도로를 지하화하려는 계획이 있다. 경희궁과 돈의문 복원의 현실적인 문제점은 이기사를 참조하시길..
  1. 현판 뒷면에는 '신묘년(1711년) 11월 15일 유학 조윤덕이 쓰고 기사년(1749년) 2월 18일 영건소에서 개조'라고 음각되어있다.
  2. 동시에 창의문과 숙청문 또한 같은 이유로 폐쇄했다.
  3. 그 후로 사람들이 이숙번의 집 앞을 지날때마다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안이라며 손가락질 했다고 전해진다.
  4. 당시 한양의 전차 노선은 마포에서 돈의문, 흥인지문을 지나 청량리까지 운행되었다.
  5.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