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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empel's Ravens
과학철학자 칼 구스타프 헴펠이 가설의 귀납적 입증(confirmation)에 관하여 제시한 역설. 까마귀의 역설이라고도 부른다[1].
2 상세
소박한 관점에서 과학적 방법은 실험을 하거나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주어진 가설을 입증하는 활동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가설) 싸이는 사람이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싸이를 직접 만나 얘기를 해보고 사람이라는걸 확인하거나, 좀더 엄밀하게 하자면 싸이의 세포를 채취해서 염색체 배열이 인간의 것과 일치하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이때 가설이 보편적 진술, 즉 "모든 P는 Q다" 같은 형식의 진술이라 한들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입증하기 위하여 집 근처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아 그 깃털 색이 까맣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보자. 물론 집 앞 한 마리만 가지고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하지만 집 근처를 넘어 온 도시의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확인했고, 나아가 온 나라, 온 세계의 까마귀가 검다는 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관찰 범위를 넓혀갔다고 해보자. 통계학의 다양한 기법에서 나타나듯 이런 충분히 많은 관찰은 곧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에 충분한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결국 까마귀 한 마리 한 마리의 색이 검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집 근처 까마귀 한 마리를 관찰해 그 색이 까맣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또한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미약하게나마 입증한다. 이런 직관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조건(1) 니코드(Nicod)의 기준: 가설 "모든 P는 Q다('[math]\forall x(Px \to Qx)[/math]')"는 어떤 것이 P이면서 동시에 Q라는 점('[math]\exists x (Px \wedge Qx)[/math]')이 관찰될 경우 (미약하게나마) 입증된다.
즉 위 까마귀 사례의 경우 P를 "까마귀", Q를 "까만 것"으로 치환한 사례에 해당한다.
위 니코드의 기준과 더불어 고려해볼만한 사안은 가설들 사이에 동치관계가 성립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가설) 싸이는 사람이다"와 "(가설) 싸이는 사람이 아닌게 아니다"는 표준적으로 동치관계에 놓인다고 여겨진다[2]. 이때 앞에서 했듯이 싸이와 직접 얘기를 하든가 DNA 검사를 하든가 해서 싸이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런 관찰은 "(가설) 싸이는 사람이다" 못지 않게 그와 동치인 "(가설) 싸이는 사람이 아닌게 아니다" 또한 입증해주는 것 같다. 동치관계에 놓이는 두 가설은 매한가지인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이런 직관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조건(2) 동치성 조건: 관찰 e가 가설 P를 입증하며, 가설 P가 가설 Q와 동치라고 하자. 그렇다면 e는 Q도 입증한다.
당초 고려했던 보편진술 형식을 띤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math]\forall x(Raven(x) \to Black(x))[/math])"로 돌아가보자. 표준적인 논리학에 입각할 때 해당 가설은 그 대우인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닌 것이다([math]\forall x (\neg Black(x) \to \neg Raven(x))[/math])"와 동치이다. 따라서 어떤 관찰 사례가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닌 것이다"를 입증한다면, 조건(2)에 따라 그 관찰 사례는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도 입증한다.
그리고 조건(1)에 따라 가설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닌 것이다"는 어떤 것이 검지 않고 까마귀가 아니라는 것([math]\exists x (\neg Black(x) \wedge \neg Raven(x))[/math])을 관찰할 경우 (미약하게나마) 입증된다. 예를 들어서 흰 의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는 가설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닌 것이다"을 입증한다.
위 두 문단에서 나타난 내용을 종합하면 삼단논법에 따라 흰 의자를 발견하는 것은 곧 가설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닌 것이다"을 입증하고, 곧 그와 동치인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도 입증한다. 집 근처 까만색 까마귀를 발견하는 것이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입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귀결은 직관적으로 매우 부당한 것 같다.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명백히 까마귀에 관한 이야기인데, 대체 의자의 색깔이 이 가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식대로라면 조류를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학술대회에 나와서 발표를 하길,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가설을 입증해주는 새로운 근거들을 발견했습니다. 제 연구실의 흰 의자, 제가 입고 있는 빨간 티셔츠 같은 것들이 그 근거입니다"라고 말해도 된다는 것이다. 즉 새라고는 한 마리도 없는 방 구석에 처박혀서도 조류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해낼 수 있는 셈이다.창조연구 그렇지만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므로 상기한 조건(1)과 조건(2)는 직관적으로 매우 설득력있는 전제 같지만, 그로부터 이처럼 매우 부조리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에서 역설이 성립한다.
3 영향
이 역설을 제시한 헴펠 본인은 위와 같은 귀결이 역설적이라는게 심리적 착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즉 흰 의자도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가설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충분히 입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대부분의 과학철학자들은 헴펠의 주장을 거부하였으며, 위와 같은 역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각종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대표적인 이론들을 참고하기 위해서는 해당 링크 참조 (영어 주의).
즉 21세기 현대에 논의되는 대부분의 과학적 방법에 관한 이론들은 헴펠의 까마귀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이론적 장치들을 잘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헴펠의 역설은 철학과 학부 과학철학 수업에서 가설, 입증 같은 개념이 생각보다 얕잡아볼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고전적인 예시로 잘 쓰인다.
4 여담
데이비드 흄이 제기한 것으로 유명한 귀납논증의 문제와 혼동되는 경우가 잦은 것 같다. 나무위키의 본 문서도 종전까지 헴펠의 역설이 아니라 엉뚱한 귀납논증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었다. 헴펠의 역설이나 귀납의 문제나 둘다 귀납논증의 문제점을 다루지만 개념상 전혀 다르다[3].
서브컬쳐 쪽에서는 용기사07의 사운드노벨 괭이갈매기 울 적에에서 언급이 된 덕택에 유명해진 것 같다. 하지만 기존에 서술된 틀린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해당 사운드노벨에서 제대로 설명이 된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