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和洽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양사(陽士).
여남군 서평현 사람이다.
한글 기준으로 화흠의 이름과는 자음 한 글자 차이인데다가 자판의 위치도 오타나기 좋은 위치라 주의해야 한다.화흠과는 다르다 화흠과는
2 생애
2.1 초창기
효렴의 추천과 대장군의 추천까지 받았지만 당시 중앙의 정치 상황 때문인지 나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기주에 있던 원소가 사자를 파견해 여남의 사대부를 모으는데, 이를 보고 화흡이 생각하길
기주는 토지가 평탄하고 백성들은 강성해 영웅호걸들이 이익을 다투는 장수로서 사방이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다. 본초(원소의 자)는 자금에 의지해 비록 강대할 수 있었으나 영웅호걸들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있어 기주를 온전히 보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주의 유표는 어떤 원대한 포부는 없지만 인물을 아끼고 선비를 좋아하고 그 토지는 험난하고 막혀 있으며, 산은 평평하고 백성들은 쇠약하다.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용이하겠다.
그리고 유표에게 상객의 대우를 받아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데, 그런 유표를 보면서 화흡은
제가 본초를 따르지 않은 까닭은 다투는 곳을 피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군주의 곁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래 있으면 위험에 처하게 되고, 반드시 사악한 자가 나와서 군주와의 사이를 이간시킬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 멀리 무릉으로 떠난다.
2.2 조조 밑으로
시간이 흘러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이은 뒤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자 조조는 화흡을 불러 승상연속으로 삼는다. 당시 모개와 최염은 충의와 청렴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관리 등용에 절약을 숭상했는데, 화흡이 이에 대한 폐단을 지적하면서 적당히 할 것은 진언한다. 다음은 그 지적에 대한 전문이다.
천하의 국정은 관직과 인물에 달려 있지, 절검 한가지로써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절검과 소박함이 중도를 넘으면 스스로 처신하면 되니 이러한 절검으로 만물을 바르게 할 경우 잃는 바가 간혹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조정의 의견은 관리 중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좋은 수레를 타는 자를 청빈하지 못하다고 하며, 장리가 진영을 지나면서 겉모습을 꾸미지 않고 갈기갈기 찢어진 옷과 갖옷을 입고 있으면 일컬어 청렴하다고 합니다. 지금 사대부들로 하여금 고의로 그들의 옷을 더럽히게 하고 그들의 수레와 의복을 감추게 하며, 관청의 높은 관리들은 간혹 스스로 호로병과 밥을 가지고서 관청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교화를 일으켜 세우고 풍속을 관찰함에 있어서 중용에 처해지기를 귀하게 여겨야 가히 계승해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일률적으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절검으로써 관리의 자질을 구분하려 하고 관리들에게 억지로 그것을 하게 하면 반드시 피곤하고 초췌해지게 될 것입니다. 옛날의 위대한 가르침은 반드시 인정에 통하게 하는 데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무릇 괴이한 해위로 치닫게 하면 그중에 반드시 거짓이 숨어들게 됩니다.
2.3 모개 사건
213년에 11월 조조가 위공을 받아 위나라가 세워져 처음으로 상서, 시중, 육경을 둘 때 화흡은 시중이 되었는데, 그러다가 모개가 최염의 죽음에 관련해서 불만을 품고 조조에게 모개가 훼방하는 말을 한다는 고발이 들어갔다.[1] 노한 조조는 측근의 신하를 소집해 모개의 죄를 물으려 하지만 화흡은 모개의 평소 행동에 근본이 있다며, 사실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회가 끝나자 조조는
지금 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자 중에서 모개에 대해서 아뢰는 자는 나를 비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최염의 원망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임금과 신하의 은혜와 정의를 훼손시키고, 망령되게도 죽은 친구에게 원망과 탄식을 주게 하는 것이니 아마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소하와 조참은 한고조와 더불어 함께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고조가 급박한 처지에 놓였을 때마다 두 재상은 도리어 더욱 고조에게 공손해 신하의 도리가 나날이 빛났기 때문에 소하와 조참의 작위가 후세에 이르게 되었다. 화시중(화흡)이 나에게 이 일을 조사해 줄 것을 연달아 요청했으나 내가 듣지 않은 까닭은 이 일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화흡이 한 건의를 거절하니 화흡이 말한다.
만일 의견을 말하는 자의 말에 따르면 모개의 죄는 매우 무거워 천지로도 덮혀 질 수 없습니다. 신은 감히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모개를 변호해 인륜의 대도를 굽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모개는 모든 관리 중에서 뛰어나 특별히 발탁되어 높은 관직(상서복야)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해마다 은총을 받으면서 강직하고 충성스럽고 공명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거리끼는 바가 되었지, 마땅히 이런 것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보장하기가 어려우므로 마땅히 살피고 탄핵해야만 하며, 양자가 주장하는 것의 사실 여부를 조사해봐야 합니다. 이제 성은이 치욕을 먹음은 인덕을 덮고 차마 그를 재판에 이르게 하지 않아 그른지 옳은지의 구분을 다시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의심은 가까운데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슬슬 딸리기 시작한 조조는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진술한 두 사람을 온건히 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자 화흡은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간다.
모개에게 실제로 윗사람을 비방하는 말이 있었다면 마땅히 그를 시장에서 처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모개가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그 일을 진술한 자에게 대신을 무고함으로써 판단을 그르치게 한 잘못을 덧붙여야 합니다. 양자가 조사해 사실 여부를 분명하게 하지 않은 것이 신의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끝내 다음과 같은 말로 거부한다.
지금 군사에 관한 일이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서 곧바로 조사할 수 있겠소? 춘추시대 진나라의 호역고가 조정에서 월권행위를 한 양처보를 찔러 죽였는데, 이는 그 당시 군주에게 경계가 되었소.
결국 모개는 이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화흡과 환계의 힘으로 겨우 살아나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2.4 후반기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려고 할 때 화흡은 시의 적절한 의견을 내세워 시기를 보고 군대를 이끌고 백성들을 이주시키면 수비대를 설치하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화흡의 의견을 포기했다. 대표적으로 그 자리에 남은 것이 양부 같은 경우.
그 후에 낭중령으로 임명되어 다시 지방으로 나갔다가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화흡은 광록훈에 임명되었고, 안성정후에 봉해졌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승진해 서릉향후에 봉해졌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시간이 너무 팍팍 넘어간다
태화 연간[2]에 계절풍이 이르지 않아 흉년이 들었는데, 이 때 고당륭이라는 자가 이것은 담당관리 가운데 직무를 근면하게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어 하늘의 질서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고당륭의 주장에 조예가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데, 여기서 화흡은 계절풍이 오지 않은 것은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백성들은 드물고 밭가는 사람은 적으며, 떠돌아다니며 먹고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백성은 곡식을 명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한 시절의 농업 생산을 허비하게 되면 생존과 번식의 근본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왕은 번잡한 요역을 피함으로써 오로지 농업에만 힘쓰도록 했습니다. 봄과 여름 이래로 요역에 시달리고 농업은 황폐화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개탄하고 있습니다. 계절풍이 이르지 않는 것은 반드시 이러한 데로부터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소멸시키고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절약과 검소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태조(조조)께서 위대한 사업을 세우고, 군대를 옮기는 비용을 공급하고, 군대에게 상벌을 주는 비용을 공급하고, 관리와 선비들에게는 물자와 식량을 풍부하게 하며, 창고 속에는 곡식과 비단이 많이 있도록 했는데, 이는 태조께서 쓸모없는 궁전을 꾸미지 않았고, 헛되고 과다하게 지출되는 비용을 없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의 관건은 진실로 번잡한 노역을 폐기하거나 생략하고, 그 다른 임무를 덜고 없앰으로써 군비를 저장하는 것입니다. 세 방면을 지키고 방어하는 것은 마땅히 미리 방비하는 것에 있습니다. 적들의 허와 실을 헤아리고 사졸을 양성하며, 적을 이길 수 있는 계책을 세우고 공격해서 취할 수 있는 계략을 밝히고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구해야합니다. 만일 책략이 평상시에 정해져 있지 않고, 작은 적을 경시하고 얕보게 되면 군대가 자주 출동해도 오히려 힘만 들 뿐 공이 없게 됩니다. 이른바 '무(武)를 숭상하는 것은 이길 수 없다.'는 고인의 훈계입니다.
그 후 화흡은 전임해 태상이 되어 청빈하고 검소함을 생활을 하며, 자신의 밭과 주택을 팔아서 자급했다. 당시 사총팔달 등의 사치스러운 유행이 싫었던 조예는 이를 크게 칭찬하면서 그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 시호를 간후(簡侯)라고 했으며 아들 화리가 뒤를 이었다.
3 기타
두습과 함께 왕찬보다는 존경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이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한 번은 야밤에 두습이 혼자서 조조를 만나러 가서 밤이 될 때까지 있자 앉아있던 왕찬은 일어나 화흡에게 "조공(조조)이 두습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십니까?" 라고 하자 화흡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천하의 일을 어찌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낮에 조공을 모셨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데서 불쾌해 하는 것은 그를 대신하려는 것입니까?
진수는 청렴과 화합을 이상적인 근간으로 해서 일을 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