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누마 기이치로

역대 일본 총리
34대35대36대
고노에 후미마로히라누마 기이치로아베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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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沼(ひらぬま) 騏一郞(きいちろう) 1867.09.28~1952.08.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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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취임 후.

歐洲天地 複雜怪奇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드디어 우리 황국이 백인놈들을 지배하겠구나!

러일전쟁일본조선만주를 지키려고 한 정의로운 전쟁이다.'

일본의 법관, 정치인.

1867년에 오카야마에서 하급 사무라이 히라누마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72년에 도쿄로 상경하여 영어, 한문, 산술을 공부한 후 1878년 도쿄대학 예비학부에 입학했고, 1888년 제국대학 법과대학[1]을 졸업했고 사법부로 진출하여 출세가도를 타기 시작했다. 1908년 형법개정으로 설치된 범죄자이동식별법 조직회의 멤버가 되어 히라누마는 자신의 보고서로 지문에 의한 범죄인 등록제를 추진했다. 그러다가 1910년 덴노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하자 히라누마는 검사로서 고토쿠 슈스이 등 피고들에 대한 사형을 구형했다. 그는 보수우파로써 사법계와 추밀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국가집단체제를 통한 일본식 나치의 국가주의를 주장했지만 고관들만을 상대로 한 그의 정치활동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와카스기 내각과 하마구치 내각,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도 반대파로 여기고 이들을 맹렬히 비난해서 이들의 배신감을 샀고 수상후보가 되지 못한 채 추밀원 부의장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가 전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중일전쟁을 일으켜놓고 무책임하게 사임해버리자, 원로에 추밀원 의장[2]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총리로 발탁되었다. 조각 다음 날, 라디오 방송으로 "동아시아에는 구습이 타파되고 신질서가 세워져야 한다. 중일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일전쟁은 우리 일본인이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것도 총리가. 흠좀무. 그렇게 고노에 내각이 무너지고 제 35대 수상이 된 그는 히라누마 내각을 조직하였고 외교 활동에 주력했고 노몬한 사건 후에 소련과의 소-일 불가침조약의 체결로 만주에서 지배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남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그 외에 러일전쟁일본조선과 만주를 먹으려고지키려 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지껄이기도 했으며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를 박멸 대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네가 히틀러냐 힘에 의존해 세계를 봐라봤던 철저한 파시스트. 그 광기는 일본 내 같은 극우들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라고 한다.

집권 기간 자체는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집권 기간 사이 여러 후덜덜한 제목의 법안이 가결되었다. 병역법 개정안, 국민정신총동원 관제, 군사자원비밀보호법, 국민징병령, 군사보호원... 이런 막장스러운 법률이 전직 법관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도 아이러니. 배운 놈이 무서운 법이다

내각의 외교는 그저 "독일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소련을 양익에서 포위"한다는 망상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독일소련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히라누마의 외교 정책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반공세력이라 생각했던 우방국 독일이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조약 발표를 하자 히라누마는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나온 말이 歐洲天地 複雜怪奇(구주천지 복잡괴기)[3]라 논평했다. 게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패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발려버리자 결국 히라누마 내각은 총사퇴해야 했다. 그래도 사임 후에도 종전까지 중신으로서 일본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히로히토의 비공식적인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주신(重臣)[4][5]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945년 4월 다시 추밀원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일본의 패전 후 벌어진 도쿄재판에서 히라누마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1952년에 질병으로 가석방되었고 병이 깊어져서 가석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였다. 참고로 그의 위패는 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역시 야스쿠니 신사는 쓰레기통이였어 일본의 재활용 능력은 세계제이이이이이이일!!!!!

자민당 의원인[6] 히라누마 다케오가 그의 손자[7]다. 무개념 조부를 제대로 닮아 위안부가 전쟁터 매춘부라는 주장 개소리 을 하여 아시아 각국의 분노를 불러오고 있다. 기사 이로서 3대가 천하의 개쌍놈 인증을 했다(...)
  1. 훗날 도쿄대 법대가 된다
  2. 사실, 추밀원 부의장으로 오래 재직하였고,전임자였던 이치키 기도쿠로가 워낙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라누마의 헌법관이 천황주권론자인데다,극렬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추밀원 의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 의장이 된 것은 파시스트 단체인 국본사를 떠난 뒤였고, 그나마도 천황에게 자신은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맹세를 한 다음에야 가능했다.
  3.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함
  4. 과거에는 원로(겐로)라 부르는 유신과 신정부정권 초기에 공헌하고 총리를 지낸 사람들 - 이토, 사이온지 - 가쓰라 등이 천황을 보좌했으나 차츰 원로들이 죽자 남은 원로인 사이온지에게 원로의 추가지명을 위한 추천을 부탁했으나 사이온지가 더 이상 원로는 필요없다. 라 하여 사이온지 사후에는 히라누마와 같이 총리나 추밀원의장 등을 역임한 저직 고관들이 중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5. 패전 직전, 항복을 결의한 어전회의에서도 히라누마가 중신이자 추밀원의장자격으로 참여했는데, 이 때 항복하기 전에 국체수호가 보장되지 않으면 항복할 수 없다고 뻗댔다.
  6. 중간에 일어나라 일본 → 일본 유신회차세대당을 거쳐 자민당으로 돌아왔다.
  7. 친손자는 아니고 양자이다.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평생 독신이었기 때문에 직계자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