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체류 중인 미국인들을 대피시키는 미군. 1997년 3월 15일

알바니아어: Kriza piramidale (피라미드 위기)

1997년 1월 16일 ~ 1997년 8월 11일

국가 전체가 폰지 사기에 휘말려 내전으로 이어진 희대의 사건

1 개요

1997년 초 폰지 사기로 인해 알바니아 국민 대부분이 재산을 잃어버린 사건. 이는 반년 넘게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알바니아 내전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알바니아 사태, 혹은 알바니아 봉기라 불리기도 한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에는 'Albanian civil war of 1997'으로 서술되어 있다.

2 배경

한 국가 내의 절대 다수의 국민(60%)이 폰지 사기에 휘말려 재산 대부분을 손실한 이 희대의 사건이 어떻게 발생 가능했는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1990년대 초 알바니아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에도 서방권과 적대관계에 있지 않았던 인접 유고슬라비아, 적대관계였더라도 미국. 서유럽 국가들과 기본적인 교류는 하고 있었던 소련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달리 알바니아는 스탈린주의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었던 엔베르 호자의 장기 집권 아래 어떠한 국가와의 교류도 일절 거부하는 극단적인 폐쇄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폐쇄 정책 하에 타 동구권 국가들이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가운데에서도 알바니아는 철저한 중앙 통제 경제 정책을 취하면서 어떠한 자본주의적 요소도 배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알바니아는 동구권이 붕괴되던 1989년 1인당 GDP가 723달러에 불과해 동유럽 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 내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였으며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유럽 국가 답지 않게 최빈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여파로 1991년 알바니아도 마침내 동구권에서 마지막으로 47년 간의 공산 독재를 종식시키기는 했으나 극단적인 빈곤 상태, 자본주의 경제 체제 경험의 부재 하에서 알바니아는 체제 전환에 있어 루마니아, 불가리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3 발단

전술한 대로 알바니아는 자본주의 경험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고 이 같은 취약점을 파고든 집단은 다름아닌 현지 마피아와 결탁한 피라미드 회사들이었다. 1992년 5월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총선에서 패해 심장 전문의 출신인 살리 베리샤(Sali Berisha)가 이끄는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면서 알바니아 정부와 피라미드 회사의 유착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정부 내에 경제 전문가가 전무했던 살리 베리샤 정권은 외부 전문가에게 경제 조언을 의지했고 이 외부 전문가라는 작자 중 하나가 다름아닌 폰지 사기의 연루자인 하이딘 세이디야(Hajdin Sejdia)였다. 세이디야를 포함한 사기꾼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여러 피라미드 회사들을 설립했고 'Sudja', 'Beno', 'Bashkimi'를 포함한 이들 23개 회사들은 고수익을 보장해준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고 수익률은 리스크가 높다는 경제 상식을 50여년 가까이 폐쇄적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일반 알바니아 국민(심지어 정부 관료들까지도)들은 알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당시 알바니아의 물가상승률이 높아 제대로 된 재테크 수단같은건 찾기조차 힘들었기에 이들은 고수익이라는 말에 속아 전재산을 피라미드 회사들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이들 피라미드 회사들은 주로 무기 밀매와 고객들의 투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고 일단은 고객들에게 약속한 대로 고수익률의 배당금을 지급해주었다. 게다가 이 회사들은 알바니아 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승인된 회사들이었고 정부 관료들과의 유착관계도 있었기에 당장의 위험을 눈치채는 사람들은 없었다.[1] 결국 1997년 초까지 전체 330만 인구 중 무려 60퍼센트가 넘는 200만명이 피라미드 회사들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4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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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의 사실상 외항인 두러스(Durrës)에서 항구의 통제권을 장악한 마피아. 이들은 돈을 받고 알바니아인들을 바다 너머 이탈리아 등지로 밀입국시켜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불법 무기 밀매와 고객들의 투자 유치만으로 회사들이 정상적인 수익을 낼리 없었고 결국 5년 만인 1997년 1월 8일을 기점으로 이 피라미드 회사들은 연쇄 도산을 하고 사태의 실체가 드러나고 만다. 사실 국민들 중 일부만 연루되어도 큰 문제가 되는 게 폰지 사기 사건인데 알바니아의 경우는 국민의 과반수가 연관되고 게다가 이들 절대 다수가 전재산을 잃어버렸기에 큰 문제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일반 개개인만 투자한 것이 아니라 호텔, 공장, 연료 회사 등 경제의 핵심이 되는 일반 사기업체들도 이러한 피라미드 회사들에 투자를 하고 엄청난 손실을 입었기에 단 며칠 만에 알바니아 전체 경제가 마비되고 만다. 결국 1주일 가량 지난 1997년 1월 16일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시위를 시작으로 1월 19일에는 수도 티라나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번진다. 1월 24일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폭력 사태로 시위가 격화되기 시작했으며 내무부를 제외한 수도의 정부 부처들이 모두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어 파괴되어버리는 막장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2월로 들어서자 가장 큰 재산 피해를 입은 남부 지방에서 시위는 더욱더 빈발해진다. 2월 20일 블로라(Vlora)에서 대학생들의 단식 투쟁으로 촉발된 시위가 일주일 뒤인 2월 27일 시위대가 대학교 내에 상주하던 공무원들을 습격, 6명의 공무원과 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폭력 사태는 이제 최악의 유혈 사태로 발전되고 10일 간의 준 내전 상태가 시작되고 말았다.

2월 27일부터 3월 9일까지 남부 지방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3월 1일 블로라는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버렸고 시위대들은 근처에 주둔해 있던 해군 기지를 점령한다. 해군 기지 점령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정부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블로라, 테펠렌(Tepelenë)에 투입시키지만 폭도로 변한 시위대는 기지에서 탈취한 포로 이들의 접근을 막아선다. 3월 2일 인근 사란다(Saranda)도 폭도들에 의해 점령되고 3월 4일에는 이들 폭도들을 폭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지만 공군 조종사들 중 일부가 이를 거부하고 이탈리아로 전투기를 몰고 망명하는 항명 사태까지 벌어진다. 3월 8일까지 남부 지역의 대부분이 시위대들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일부는 수도 티라나 교외까지 접근해 리나스(Rinas) 국제 공항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남부 지방 뿐만 아니라 북부 지방까지 폭력 사태가 확산되어 결국 수도 티라나를 제외한 전국에서 정부가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시위대, 시위대와 결탁한 갱단들이 날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 군 기지들도 폭도들에 의해 습격당해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반출되고 만다. 이 중에서 총탄 약 15억 발, 수류탄 350만 정, 지뢰 100만 정, 총기 65만 정이 폭도들에 의해 탈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3월 9일 지로카스트라(Gjirokastra) 시장인 바쉬킴 피노(Bashkim Fino)가 이끄는 새 내각이 구성되고 살리 베리샤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조기 총선 실시, 남부 지방에서의 군대 철수를 약속하고 대신 안정을 되찾아 줄 것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결국 3월 28일 알바 작전(Operation Alba)이라는 작전명 아래 오스트리아, 그리스, 루마니아,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가 군을 투입하고 미국, 독일도 독립된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알바니아 사태는 겨우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5월까지도 갱단이 군을 습격해 수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불안정 상태는 계속되었다.

5 종말

살리 베리샤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6월 29일 조기 총선이 실시되고 당연하게도 사태의 주 원인을 제공한 민주당은 대패하고 파토스 나노(Fatos Nano)가 이끄는 사회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 한 달 후인 7월 24일 결국 살리 베리샤는 사임한다. 마침내 불안정 상태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8월 11일 알바니아에 투입된 해외 군대가 철수하여 사태는 완전히 종식된다.

6 결과

이 사건으로 2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고 전국에서 민간인, 경찰, 군인을 포함한 3,800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알바니아의 1인당 GDP는 전년도 951 달러에서 697달러로 1987년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본 사태는 자본주의적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체제 전환이 제대로 된 외부의 감독 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뼈아픈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고 알바니아는 그 교훈에 대한 수업료를 아주 값비싸게 치른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종 분규로 비화되어 최악의 유혈 사태가 벌어진 인접 구 유고 연방 국가들과 달리 알바니아는 경제 문제가 주 원인이 된 사태를 상대적으로 빨리 진정시킬 수 있었고 2년 후 벌어진 코소보 전쟁에서도 알바니아 본토 자체가 유혈 사태에 휘말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알바니아는 고성장을 이룩해내어 마침내 극빈 상태에서 벗어났고 유럽의 최빈국이란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2] 한편 이번 사태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살리 베리샤는 2005년 내각제 하에서 총리로 취임해 다시 권좌에 올랐으나 2013년 에디 라마(Edi Rama)의 사회당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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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나 스칸데르베그 광장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무력 시위를 벌이는 레카 조구(가운데 군복입은 남자). 1997년 7월 2일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알바니아 국왕으로 재임하며 알바니아의 근대화를 이끌다 무솔리니에 의해 쫒겨난 조구 1세(Mbreti Zogu I)의 외아들 레카 조구(Leka Zogu, 1939~2011)도 공산주의 붕괴 이후 알바니아로 돌아와 머무르고 있었다. 귀국 이후에도 상당한 수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계속 왕정 복고를 주장하던 레카 조구는 본 사태로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자 조구 왕조의 부활만이 나라의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며 7월 2일 티라나 스칸데르베그 광장에서 2000여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당연히 이는 중앙 정부에 의해 쿠데타로 간주되었고 최소한 수도는 정부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었기에 이 시위는 실패로 끝나고 레카 조구는 전용기를 타고 다시 알바니아를 떠나야 했다. 다만 이후 코소보 전쟁 당시 알바니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점이 감안되어 레카 조구는 2002년 사면되어 다시 귀국하고 2011년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대우받으며 계속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 다만 해외에서는 여기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996년 경부터 IMF 측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계속 경고를 하고 있었으나 알바니아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말았다.
  2. 2010년대 이후 유럽 최빈국은 몰도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