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베르 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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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엔베르 호자
(Enver Hoxha)
생몰년1908년 10월 16일 - 1985년 4월 11일
출생지알바니아 지로카스트라
사망지알바니아 티라나
정당알바니아 노동당
종교없음 (반신론)
배우자네즈미예 호자

1 개요

집권 초기에 찍은 사진. 공산권 독재자 중에서는 가장 미남이라고 일컬어졌다.[1]

알바니아공산주의 독재자이다. 알바니아를 무려 40여년 동안의 철권통치로 다스려 장기집권한 독재자들 중에서도 Top 10 안에 든다. 특히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비슷한 면이 많다. 게다가 카리스마가 강했던 것, 신격화를 시도한 것도 유사하다. 그나마 김일성의 신격화 방침과는 달리 자국 문화를 손수 때려부수는 짓은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기도 하나 이 사람도 PC가 등장하기 시작하던 20세기 후반에 국토 전역에서 타자기 사용을 금지한다며 해괴한 법을 몰아붙이는 극한의 패기로움을 보여줬다. 패왕색

2 초년 생애

어린 시절 만주를 벗어난 적이 없던 김일성과는 달리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다. 조구 1세 시절인 1930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간 촉망받던 생물학도였으나, 생물학을 그만두고 철학과 정치 쪽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프랑스 생활 중 유창한 불어를 익혔고,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산주의계 정치가 중에선 공부를 꽤 많이 한 축.

그가 돌아오자마자 알바니아는 무솔리니이탈리아에게 침략을 받았으며, 그는 알바니아 공산당의 빨치산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이탈리아군이 머저리였고, 이탈리아의 동맹국인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티토에게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어렵지 않게 빨치산 운동으로 알바니아의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처음에 호자는 이웃나라의 빨치산 지도자 티토와 협력관계지만, 티토는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의 한 연방국으로 삼킬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호자는 1945년부터 반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서고, 유고슬라비아와 사이가 나빴던 소련 쪽으로 기울어진다.

3 집권 이후

3.1 외교 정책

집권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숙청, 그리고 권력유지 등등... 여러가지로 김일성과 비슷한데, 항일운동의 경력을 내세운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외국 침략자에 저항한 경력으로 최고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알바니아 인민군의 총사령관을 겸임했고 여기에 수상,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을 겸임했다. 호자 시절에는 알바니아는 서방과의 관계가 나빴던 건 물론이고,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소련을 비롯한 여러 동유럽 국가들과의 사이도 나빠져서 교류가 드물어졌고 1968년에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하여 알바니아는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까지도 철저한 쇄국으로 일관했다. 또한 이웃 국가들과의 국경을 폐쇄했다.

호자는 서방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라, 프라하의 봄 때처럼 공산주의 국가들인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이 알바니아를 침공해서 자신을 축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항상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제국주의자-수정주의자들의 침략"에 대비해 전국에 75만개의 토치카를 건설했다.[2] 이 토치카들을 거의 도배하다시피 해서 현재까지도 흉물스럽게 녹슨 토치카들이 언덕 이곳저곳에 방치되어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강원도 만한 땅 크기에 무려 75만 개를 설치한 거다!! 이렇게 토치카가 알바니아 국토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가 되자, 당시 알바니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사람 사는 주택보다 벙커가 많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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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알바니아의 유일한 우방국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이었다. 마오쩌둥과 호자는 "반수정주의"를 모토로 다른 공산국가를 싸잡아 비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화궈펑이 집권하여 문화대혁명을 완화시키고 서방 국가와도 관계 개선을 하자, 호자는 중국도 수정주의 국가로 비난하여 관계를 끊었다. 소련 ,중국 등 모든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공산 진영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었고, 정권유지를 위해 항상 외부의 침략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선 1990년대 이후 북한과 비슷하다. 1960년대까지는 북한과 사이가 좋았으나,[3] 1970년대부터 사이가 나빠졌고, 호자는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디스했다. 1984대 김일성이 동유럽을 방문할 때 알바니아만 제외한 이후에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4]

호자의 이념은 "반수정주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정통 스탈린주의를 끝까지 고수하면서 조금이라도 유화적이거나 아니면 이단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을 모두 수정주의자로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으며, 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호자는 니키타 흐루쇼프, 요시프 브로즈 티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심지어 김일성까지 모두 수정주의자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고립주의의 패기

3.2 종교 탄압 정책

대부분의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개인숭배에 열을 올렸으며, 특히 종교를 철저히 탄압하여 공식적으로 "세계 유일의 무신론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도 못 하던 짓을 거의 해냈다. 알바니아는 역사적으로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차례로 받았기에 국민 거의 모두가 종교를 믿으며, 다수의 이슬람 신자와 소수의 기독교인이 섞여있었는데, 호자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우리는 이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해야 하며, 이미 중독된 사람들도 그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치료해야만 한다."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라고 외치며 1967년부터 대대적인 종교 탄압을 실시했다.

사실 1967년 전부터 종교 탄압을 가해오긴 했다.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기본이고 일반민중의 종교적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신론 운동을 언론, 교육, 모든 공공단체를 통해 실시했으며 종교적 내용을 담은 서적의 출판을 모두 금지시켰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개인적인 종교활동은 허락한다는 수준이었지만... 1967년부터는 아예 헌법으로 종교를 금지시키고 무신론, 무종교 운동을 시작했다. 이 당시 알바니아에 존재하던 수많은 모스크나 교회는 모조리 파괴당하거나 폐쇄당하고 운동경기장이나 창고로 개조되었다. 당연히 종교 신자들은 체포되어서 각종 고문과 처형을 당하거나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67년 한해에만 1600여 명의 종교 지도자들이 "인민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정권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어떤 신부는 무슬림과 가톨릭 신자들을 모아놓고 종교행사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26년간 강제수감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의 종교탄압 및 엔베르 호자의 숙청으로 인해 1946년부터 그가 죽은 1992년까지 알바니아에서는 5,577명의 남성과 450명의 여성이 처형되었고, 2만 6천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3만2천여 명을 강제 이주시켰고, 7천여 명이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한다.

알바니아 출신인 마더 테레사가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알바니아를 방문하려 했으나, 호자가 "종교를 버려야 입국을 허가해주겠다"고 이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 아이러니한 것은 엔베르 호자는 어렸을 때 무슬림이었으며, 엔베르(Enver)라는 이름은 아랍어 '안와르'[5]에서 비롯되고, 호자(Hoxha)라는 성은 터키어로 이슬람학, 과학, 아랍어 등등의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뜻한다. 이를테면 나스레틴 호자(Nasrettin Hoca)라든지.

엔베르 호자의 종교 탄압 정책의 그나마 긍정적인 면을 굳이 꼽자면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썼지만, 어쨌든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점이다.[6] 그리고 박해받던 종교인들이 서로를 숨겨주고 도와주며 신뢰감을 쌓은 덕분에 알바니아는 다수의 무슬림과 소수의 기독교가 공존하며 북부는 로마 카톨릭, 중부는 이슬람, 남부는 그리스 정교 등으로 나누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종교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엔베르 호자의 이런 종교 정책이 오히려 알바니아의 종교 생태계를 망쳐 놓았다는 분석도 있다, 엔베르 호자 집권 이전에도 알바니아는 종교 관련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국가였지만 탄압 때문에 종교 기반 시설들이 무너졌고, 종교 지도자들이 학살당해 이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외국의 지원을 받게 되자 거기에 편승하여 종교 원리주의나 근본주의 종파들이 들어와 기승을 부리고 있다.

3.3 최후

하지만 그런 그도 독재자의 최후답게 허무하게 죽었다. 무엇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늘그막에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의사들을 의심하고 누구도 믿지못하고 홀로 있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빨리 받지못해 허망하게 죽던 일을 잊지 않아서인지 믿을만한 의사를 주변에 두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도 의사들을 철저히 사전점검했다. 그나마 자식들에게 정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사후, 티라나 교외에 2차대전 당시 싸우던 파르티잔들이 안장된 국립열사묘지에 안장되었다. 국립열사묘지에 있는 어머니 알바니아 상 아래에 안장되었으나, 공산정권 붕괴 후 호자의 무덤은 파괴되고 시내의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이장된 무덤은 상당히 초라한 무덤이었으나, 최근에는 관광객을 맞아 고급 석재로 다시 무덤을 단장하고 30레크씩 참배료(...)를 받는다고 체 게바라도 그렇고 마르크스도 그렇고 공산주의자들은 죽어서 돈을 남기는 것 같다.

4 평가

1990년에 알바니아 노동당이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일당독재를 폐기하고, 1991년에 자유총선도 치러지고 이듬해인 92년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대부분의 동상이 부서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나중에 조금씩 평가가 좋아지긴 했는데 습지를 모조리 토치카로 만들어 메워서 알바니아에서 말라리아를 추방했고, 그의 치하에서 전국민의 90%가 넘던 문맹도 퇴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알바니아에 반종교적인 엄격한 세속주의 법률을 도입하였고, 여성 억압을 금지시켜 여성의 지위도 급격히 향상되고 사회진출도 활발해진 점으로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가난을 추방하지는 못해서 알바니아는 유럽에서 여전히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다.[7] 그래서 알바니아에서는 빈부차가 커지자 그를 그리워하는 노년층이 많다고 한다.

5 기타

  • 알바니아에서 타자기와 수염, 컬러TV를 금지시켰다. 다만 컬러TV 금지령은 당시 알바니아가 컬러방송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 낭비 방지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그랬던 거고, 집권 막판인 1981년에 컬러방송을 실시하면서 풀어주기는 했다. 다만 당대 알바니아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었다고... 사실 한국도 1980년부터 컬러TV 방송이 시작되었으니 지나치게 늦게 푼 건 아니었다고 볼 수 있겠다.
  • 의장, 수상,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인민군 통수권자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데 이 직함들을 자기 자신이 그자리에서 자신이 임명하여 얻었다.
  • 시골에서 자신과 닮은 치과의사를 납치해서 자신과 더 흡사하게 성형수술을 시킨 후 대역으로 세웠다.
  •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은 냉전 기간동안 동서유럽을 통틀어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고 외국인과의 대화는 당국과의 허가 없이는 불법이었다.
  • 호자의 극단적인 폐쇄 정책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작동 메커니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후 1990년대에 체제 전환을 겪어야 했고 이러한 문제점은 몇년 후 결국 초대형 사고를 불러일으켰다.
  1. 이는 소련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몰로토프의 말이다.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는 뭐가 되냐 얘네는 몰로토프 물러난 담에 집권함
  2. 알바니아의 인구는 300만.
  3. 김일성대에 알바니아인 유학생도 왔다고 한다.
  4. 그리고 대한민국-알바니아가 수교한 1992년 북한은 대사관을 폐쇄하고 불가리아 주재 대사가 알바니아 대사를 겸임하였다.
  5. أنور. 전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أنور السادات)나 가브리엘 앤워(Gabrielle Anwar) 할때 그 안와르이다. 이 이름은 '빛나는 자'라는 의미이다.
  6. 케말 아타튀르크 이후의 터키는 정교분리의 세속정치를 폈지만, 회교 특유의 종교 중시 때문에 100년이 지난 현재도 이는 진행이 너무 더디며, 이 틈을 타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같은 이는 정교분리를 폐기하고 이슬람주의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이런 이슬람주의 때문에 EU 가입에도 문제가 많은 편. 이런 의미에서 호자가 알바니아에서 종교세력(이슬람세력)을 그야말로 박살내어 놓은 것은 결과적으로 EU가입이나 유럽에 편입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셈
  7. 가난한 편이지만 유럽에서 알바니아보다 가난한 나라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부 구소련 소속 국가 중에 알바니아보다 가난한 나라가 있다. 국가별 1인당 GDP 순위(명목) 항목을 잘 찾아보자. 그리고 사실 알바니아는 엔베르 호자 전에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 당시 알바니아 인구의 80%가 농민이었고 대부분 토지를 지주가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공업은 소규모의 벽돌, 담배, 통조림 같은 걸 만드는 정도밖에 없었고 도로나 철도도 제대로 안 깔려 있었다. 물론 공업이나 도로나 철도 사정이나 지금도 썩... 문맹률은 2차 대전 직전까지도 85% (...) 수준이었다. 괜히 그 이탈리아에게 일치감치 쳐맞고 속국이 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