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야마 데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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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山哲 1887.07.28~1978.05.30일

역대 일본 총리
45대 요시다 시게루46대 가타야마 데츠47대 아시다 히토시

일본총리. 정치인. 일본사회당이 배출한 첫 번째 총리이다. 두 번째 총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가타야마 데츠 이후 무려 46년 후에야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집권했다.

와카야마 현 출생. 도쿄대학 법학부에 들어가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같은 고향 사람이었던 군함행진곡의 작사가 토리야마 히라쿠(鳥山啓, 1837-1914)의 집에서 하숙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에는 YMCA기숙사 일부를 빌려서 일본농민총동맹변호사로 활동했다.

당시 점점 군국화 되어가는 일본을 보며 사회개혁파로 젊어서부터 정치참여를 시도했는데, 1926년 사회민중당을 결성했고 1930년에는 사회민중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뒤 1942년까지 계속 당선되며 중의원 활동을 했지만, 1941년 정치군인 도조 히데키의 집권 이후 비판세력을 제거, 숙청하던 도조에게 말 그대로 찍혔다. 이후 사회민중당은 반국가단체로 몰려 강제해산 당했고, 가타야마는 도조 내각과 태평양 전쟁을 반대하는 지하 활동에 참가했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일본사회당을 결성해 서기장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사회당 위원장에 선출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1947년 요시다 내각연합군노동조합에 끌려다니다가 지지도를 잃고 총선거에서 2당으로 내려앉았고, 가타야마가 속한 일본사회당이 1당이 되었다.

1947년 당시 사회당의 의석 점유율은 미묘한 수준이었는데, 사회당이 1당이 되었지만 단독 내각을 꾸리고 유지할 만한 수준에는 크게 못 미쳤다.[1] 그리고 3당이었던 민주당아시다 히토시가 우파였기 때문에, 가타야마는 요시다가 아시다와 연합해 연립내각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했고 자신이 총리직에 오를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타야마의 예상과 달리 요시다와 아시다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요시다가 오히려 총사직하고 물러나버리자 총리 자리가 사회당 위원장이던 그에게 돌아갔다. 가타야마는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옆에 있던 당 간부에게 매우 당황해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거 큰일났네."(...)

가타야마는 총리에 지명되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연립내각 협상에 들어갔다. 그는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국민협동당과 3당이었던 우파 민주당을 포섭해 연립내각을 이루기로 합의 했지만, 각료 자리를 어떻게 나눠 줄 것인지에 대한 협상고급 용어로 자리싸움이 총리 취임 시기까지 마무리되지 못했다.(...) 결국 총리였던 가타야마가 임시로 전체 각료직을 겸임(!)하고 취임했다.(...) 패전 후의 일본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파와 연합했지만 일단은 좌파 성향이었던 가타야마 내각은 집권 후 여러 가지 개혁을 주도했다. 패전 이전의 일본 법과 제도에 대해서 축소해 개정하거나 철폐했고, 일본사회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탄광국유화 정책은 꽤 긍정적으로까지 평가될 만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가타야마가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속한 집권 사회당의 분열에서 초래되었다.

연립정권이었으나 일단 최대 정당을 형성한 일본사회당은 가타야마의 집권 이후 분열되기 시작했다. 사회당 안에서 좌우파로 갈라진 계파가 대장성에서 제출한 세금인상안을 놓고 격뿜격돌했고[2], 결국 원래부터 우파였던 민주당이 연립정권을 깨고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참상(...)에 가타야마는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지만, 일본사회당 내부의 밥그릇 싸움에 눈총을 보내던 일본 국민들은 요시다의 자유당과 아시다의 민주당으로 표심을 돌려버렸고, 결국 결과는 사회당의 완전한 참패였다.[3] 게다가 그 선거에서 가타야마 본인도 낙선해버렸다!(!)[4]

오늘날 가타야마 데츠라는 사람은 성품 자체는 상당히 훌륭한,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고 평가되지만, 그의 성품과 지도력으로는 사회당 내부의 분열을 막기가 힘들었고 총리 재직 시기도 사회당 내부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선 좀 안습.

이후 사회당은 결국 좌우파로 분리되어 자기들끼리 치고밖고 싸웟다. 그러나 1955년 우파세력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으로 합당하여 보수대연합을 실현시키자, 이에 자극받아 다시 통합하여 집권 자민당 vs 제1야당 사회당의 일명 55년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사회당내 노선투쟁이 다시 벌어져서 결국 사회당내 우파 일부계파가 1959년에 민사당으로 떨어져나갔다. 여담이지만 키타야마 데츠도 민사당 창당에 나섰지만 1963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그대로 정계은퇴를 하였다.
  1. 총 466석 가운데 144석, 3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2.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이 인상안을 찬성하는 가운데, 사회당 좌파가 날치기로 부결을 시켜버렸다(...). 그걸 안 사회당 우파와 민주당이 빡쳐서 중의원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의사봉 레이드를 뛰었다(...)고 한다.이 모습이 오늘날 어느 나라의 국회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된다면 아마 그건 오해다. 아마도.
  3. 144석 -> 48석(!)
  4. 여담이지만 가타야마 데츠는 전후 일본 총리 중 가장 낙선 경험이 많은 총리이다. 1942년 선거, 1948년 선거와 1963년 선거에서 중의원으로 출마했지만 각각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