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항목은 지산동 고분군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1 개요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왕릉로 55에 위치한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무덤군을 의미하며 폭넓게는 이후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추가로 축조된 고분군까지 모두 포함하여 지산동 고분군이라고 불린다.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1963년에 사적 제 79호로 지정되었고 고분은 총 704기가 확인되었다.
가야시대의 유명한 금관인 리움미술관 소장 금관(국보 138호)이 출토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물론 정확히는 도굴로 세상에 나왔고 그걸 이병철 회장이 구매한 것이지만. 때문에 이 고분군에서 나온건 확실하지만 어느 고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013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되었으며 2015년 3월에는 우선등재 추진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가장 최근인 10월에는 공동추진 MOU가 체결되었으며 2018년 (사실상)세계유산 등재예정 이라한다.
2 특징
고분군 가운데로 도로가 관통하며 그 부근에 '대가야 박물관'이 있다. 고분군은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덤을 백제나 신라처럼 산중턱 혹은 평평한 곳에 만들지 않고 산정상 능선 부근을 따라 축조했다. 이는 높은곳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이므로 신성한 곳이라는 당시 가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산동고분군이 자리잡은 능선쪽은 나무가 없어서 시야가 탁 트여있고 올라가면 고령군을 전부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나 안개 낀 날도 사진이 잘나오는데 고분군 사이에 안개가 끼어있는 걸 밑에서 보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도 너무 높지 않고 계단도 잘 갖춰져 있어서 주민들에게는 좋은 등산로이자 공원이며 산책로라고...
대가야 박물관[1]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할 뿐만 아니라 이 고분군의 경비(?) 업무도 겸하고 있다. 지산동고분군은 인구가 바글바글한 곳이 아닌 고령군 내에서도 약간 외진 곳에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고분군 위에는 약간의 전등이 있고 가끔 순찰을 다닌다고 한다. 2015년 11월 현재 서남쪽 고분군 일대가 정비중이다.
또한 워낙 무덤이 많아서 그런지 파괴되거나 유실된 고분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예를 들면 당연히 무덤이 있었을 자리에 무덤이 없거나[2] 야트막한 언덕아니면 웅덩이 같은 흔적으로만 남아있고(...) 무덤의 권역를 표시하기 위해 쌓은 돌들이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은 가야시대에 쌓은 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을 나무 다섯그루가 원래 자기자리인마냥 자리잡고 있다.
3 역사
처음으로 축조된시기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다. 일단은 대가야(반파국) 1대왕인 이진아시왕때부터 이곳에 무덤이 축조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처럼 대규모로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한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순장이라는 매장풍습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에이 설마 이런게 있었겠어' 하는 생각이었는데 파헤쳐보니 어마어마한 순장인원으로 놀랐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
4 무덤의 내부구조
전체적으로는 거의 구덩식돌덧널무덤이며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뀐다. 하지만 이곳 지산동에는 확인된건 모두 구덩식돌덧널무덤이고 굴식돌방무덤은 약간 떨어진 곳인 고아리에 벽화고분형태로 1기가 자리잡고있다. 그리고 신라에 병합되기전에는 부장품토기도 가야토기였으나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이후에는 신라토기들이 출토되고있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의 무덤과 백제의 무덤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선 왕이 묻힌 으뜸돌방(이하 주석실)이 한가운데에 있고 왕이 저승에가서 쓸 물건들을 매장한 딸림돌방(이하 부석실)이 1~2개 근처에 있으며 그 주위로 순장자들을 묻은 순장 덧널이 많게는 20개 이상까지도 있다.
또한 왕이 안치된 주석실에도 순장자가 2명 있었는데 이는 왕을 호위하던 최측근 무사나 신하로 추정되며 부석실에는 장물들을 보관하는 장물지기를 한명씩 순장했다고 한다.
주석실의 높이는 최대크기 2m, 길이는 9m로 어마어마한 크기이며 그만큼 엄청난 양의 유물이 묻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부석실도 비슷한 크기이다. 반면 순장 덧널은 길이가 1.6에서 커봤자 2m정도 이는 당시 사람들의 신체사이즈가 작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5 순장
자세한 것은 순장 항목 참조.
6 수난의 역사
1910년부터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증거를 찾으려 가야시대 고분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쳤으며 이후 그 유명한 지산동 44호분을 마구잡이로 파헤쳐놓고 딸랑 허름한 보고서 한장만 남기는데 그쳤다.[3][4] 때문에 우리 손으로 발굴하기 직전까지도 무슨 유물이 출토되었는지, 고분 내부는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후에도 외진 곳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도굴꾼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어 어지간한 큰 무덤엔 도굴갱이 1~2개는 꼭 뚫려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뚫기 귀찮아서 수많은 도굴꾼들이 선대 도굴꾼이 뚫었던 도굴갱으로 계속 드나들며 무덤을 도굴했고 결국엔 왕이 안치되었던 주석실과 왕의 유품들과 저승에 가서 쓸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던 부석실은 모두 도굴되어 광복 후 본격적으로 발굴을 해봤을 때에는 토기조각과 화살통, 환두대도[5] 일부, 관장식조각들을 일부 수습하는데 그쳤다...
참고로 현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가야 유물들은 주석실, 부석실에서 출토된건 별로 없다. 왜냐하면 도굴꾼들이 무덤을 도굴할때 도굴꾼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유물이 묻혀있을 만한 큰 석실 위주로 탐색을 하는데 긴 막대기를 무덤에 꽃아 톡톡 두들겨봐서 크게 울리는 쪽만 파서 가져간다. 즉 도굴꾼들은 주석실과 부석실만 도굴했고 순장덧널은 도굴하지 않았다. 이유는 파는데 드는 힘은 똑같은데 유물은 별로 없기 때문에... 때문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유물들은 거의 순장 덧널에서 출토된 것이다. 금동관도 마찬가지다. 순장 덧널과 비슷한 별도의 덧널에 피장자와 함께 묻혀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금관은 우연치않게 도굴을 피한 무덤에서 나온것이다. 금관의 주인은 100%왕이었을 테니까.
7 유명한 무덤들
지산동 44호분 :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으며 현존 국내 최대 순장묘이다. 고분의 크기는 동서 27m 남북 25m로 큰 크기의 대형 봉분이며 고분의 주인과 측근 호위무사가 안치된 대형 주석실 하나와 장물들을 보관한 부석실2기가 있었고 발굴된 주변에 있는 순장곽만 32기가 넘으며 순장자는 37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순장묘이다. 이곳에서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야광조개국자[6]가 출토되었고 등잔과 금동합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가야가 백제와 교류를 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외에도 전형적인 가야유물인 곡옥목걸이, 철제 마구류, 철제갑옷, 대도등이 출토 되었다. 특히 순장곽은 금귀걸이, 팔찌가 출토된 것과 그냥 단순한 토기 4개가 출토된 것, 갑옷이 출토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순장자들의 신분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테면 금,은 장신구가 출토된 곳의 주인공은 왕의시녀, 단순히 토기만 출토된 것은 일반백성, 갑옷은 무사인 것이다.
지산동 45호분 : 1977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고 44호분과 마찬가지로 순장묘이다. 순장자는 최소11명 이상으로 44호분과 함께 국내 순장풍습를 증명하였다. 크기는 지름이 대략 23.5m에서 22m정도 되고 타원형 모양이며 44호분만큼이나 큰 무덤이다. 현재 2.85m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는 4m정도 였을 거라고 한다. 44호분과 약간 다른점을 꼽자면 주석실과 부석실이 남벽을 공유한 상태로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출토유물은 매우 다양한데 금동제 관형 장식, 금은제 귀걸이, 갑옷조각, 구슬 목걸이, 재갈, 등자, 관을 고정시켰을 꺾쇠와 못도 출토되었다. 토기는 주로 작은사이즈의 토기들의 출토되었다.
지산동 47호분 :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으로 1939년에 첫 발굴도굴되었다. 봉분의 직경은 49m로 어떤 고분보다도 크다. 대가야 3(?)대 4(?)대 왕이었던 금림왕의 무덤으로 전하나 8(?)대,9(?)대 이뇌왕의 무덤이라는 추측도 있다. 약65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금동제 호록, 황어뼈, 금장환두대도, 이형금동제품, 철촉 30여점이 출토되었다.
지산동 32호분 : 1978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이 33호분 35호분과 함께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대형 주석실과 순장곽 1기가 같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분의 규모는 대략 13.1m에서 12.6m정도이다. 현재 봉분의 높이는 1.5m정도이지만 원래는 3m급 중형 봉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 가야시대무덤에선 드물게 금동관이 출토되었고 보기드문 방배형관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금동관에 새겨진 무늬는 황금 비율이라고 한다.
지산동 32호분 금동관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산동 30호분 : 대가야 박물관 입구에 도착해서 왼쪽의 언덕길을 조금 걸어올라가다보면 바로 나오는 무덤이다. 1994~1995년에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대가야 박물관 부지를 선정하면서 부지에 위치한 이 무덤을 발굴조사하였다. 이 무덤 또한 순장묘[7]이고 도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산동고분군 무덤형태를 비교하면 가야초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봉분의 규모는 동서 18m, 남북 15m 가량 된다. 석실은 길이 6.45m, 너비 1.26m이다. 높이는 3m정도다. 특이하게도 석실 덮개돌에 이전 청동기시대에 새겨놓은 암각화를 그대로 뜯어와 사용하였다.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암각화는 보존될 수 있었다... 바깥에 있었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또 유명한 이유는 이곳에서도 금동관이 출토 되었기 때문이다. 크기는 매우 작으며 아기의 머리에 맞을 정도이다. 아마도 왕자의 금동관이었는데 일찍 요절을 하여 이 무덤에 묻혔으리라 생각된다. 실제로도 발굴당시 작은 규모의 덧널에서 유아로 보이는 유해과 함께 출토되었다.
- ↑ 대가야 박물관은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축조과정도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한번 들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산동44호분을 발굴당시 그대로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이 있으며 지산동 고분군의 역사도 자세히 보여주기 때문에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입장료는 청소년과 어린이는 1500원, 어른은 2000원. 고분군 입장료는 무료이다. 다만 정해진 루트로만 다녀야한다. 고분군 안에 길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길로만 다니면 된다. 특별한 고분 앞에는 설명이 붙어있기 때문에 참고하면 좋다. 참고로 월요일은 휴무. 하지만 고분군은 출입이가능하다.
- ↑ 기준이 애매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가보면 능선과 경사면 경계에도 무덤이 있다. 즉 완벽한 봉분이 아닌 기울어진형태의 봉분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정작 위 능선의 평평한 땅에 무덤이 없다. 그런 불안한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쓸만한 땅이 꽉차서 그랬다는 건데 자리가 있는데도 일부러 불안한 자리에 만들었을리는 없지 않는가?
- ↑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임나일본부의 증거따위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거짓말이니까.
- ↑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가야토기들이 있다. 일본은 이 토기들이 스에키 토기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도굴한적 없다고 잡아떼고 있지만 제작방식으로 볼때 한반도에서 건너간 토기들이 확실하며 도굴범들은 빼도박도 못하는 일본이 맞다.
- ↑ 환두대도는 왕족급의 인물들옆에 신분과시용으로 매장하던 것이며 이것이 발굴된 고분은 고분의 주인이 최소 왕족 또는 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무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형태이며 환두대도의 발굴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 ↑ 야광조개국자의 재료로 쓰인 조개 종류는 오키나와 근처에 서식하고 있으며 이는 가야가 오키나와와 직접 무역을 했거나 아니면 백제로부터 이 물건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 ↑ 순장곽은 5개 정도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