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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浩 (1804 ~ 1866)
1 개요
조선 말기의 지도 제작자이자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음.
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오늘날 현존하는 자료는 많지 않다. 또한 그의 태생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잔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와 교류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미루어보아 실학을 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그는 최한기와도 교류하였으므로 김정호는 최한기가 편찬한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맡았고, 최한기는 김정호가 편찬한 청구도의 서문을 써주었다. 그외에 김정호를 후원한 인물로는 김정호도 참여한 여도비지를 편찬한 최성환, 대동여방도 서문을 썼으며 김정호에게 지도 제작을 의뢰한 신헌[1] 등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한성부 종로 쪽에 살았던 듯하다. 종로학원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다보면 석재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읽어보면 김정호가 이쯤 살았던 것 같다고 시사하는 문장이 적혀 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성동구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그의 호를 딴 고산자로가 있다.
2 대동여지도
파일:Attachment/Foot Draws Kim.jpg
발로 그렸다는게 그 발로 그렸다는게 아니다
자신이 이전에 편찬한 지도, 청구도와 동여도 그리고 이전의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해서 근대 이전에 제작된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편찬했다. 보통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호 자신이 전 국토를 유람하며 대동여지도를 제작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로 그가 그러한 방법으로 지도를 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한반도를 세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번이나 오르며 정확하게 실측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설명은 지도가 흥선대원군 때문에 사라졌다고 당당히 사기를 쳤던 최남선의 글에 처음 등장[2]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던 김정호가 전 국토를 답사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듯하다. 그러나 필요한 지역만 답사했을 가능성은 있다[3].[4]
사실 지도 안에 담긴 정보는 너무나 상세하기 때문에 직접 그 정보를 전부 스스로 모아서 지도에 담을 수는 없다. 대동여지도 실물의 크기는 높이 7미터에 가로 3미터 반인 만큼 거대하다. 더불어 여러 판으로 나뉘어 있고 이 여러 판들을 펼쳐 놓아야 비로소 거대한 지도가 완성된다. 때문에 지도 전체를 전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는 축약본만 보니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지리 정보가 들어있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는 10리마다 표식을 두어서 실용적인 목적을 꾀하였고, 더 나아가 여러 지방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삽입하는 등,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조선사대 당시의 생활상을 꼼꼼하게 알 수 있는 훌륭한 정보지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10리는 직선거리 10리가 아니라 실제 거리 10리이다. 산이 험할수록 촘촘하게 찍혀있다. 또한 김정호는 "대동지지"라는 지리지도 서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도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대동여지도 목판 11매가 보관 전시되어 있다.[5] 이 중앙박물관 목판은 초창기 해당목판에 잘못된 기록을 수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호가 직접 만든 초판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는 더 많이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만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 외에도 많은 지도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도덕후.
3 논란
흔히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후 이것이 대원군에게 알려지자 대원군에 의해 옥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이야기의 근원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어 독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사실 최초는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인데... 그 최남선이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독본에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다.) 총독부의 주장인 즉슨 김정호가 지도 제작과 지리학에 재능이 많았으나 국가는 지도 제작에 전혀 뜻이 없어 김정호 자신이 직접 전 국토를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지만, 쇄국정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이 이에 분노하여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며 대동여지도를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감옥에 가뒀고 결국 김정호는 옥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후 조선어 독본에서는 일본에서 대동여지도를 입수 러일전쟁때와 이후 땅 도둑질토지조사사업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했었고. 즉 조선인들이 버린 김정호의 가치를 일본인이 발견해서 러일전쟁에 기여했다고 조선어 독본은 쓰고 있다.(출처:#)
일단 조선어 독본 자체가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위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앞뒤가 하나도 맞지않다.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한 역사만화. 보면 좋다. 일단 조선어독본에서는 김정호가 잡혀갈때 딸도 같이 잡혀갔다고 쓰고 있는데 일단 조선이 연좌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모같은 특별범죄가 아니라면 연좌제를 적용하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김정호가 수감되었다는 기록자체가 전무하다.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어디에도 김정호가 투옥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거기에 고문당해 죽었다면 '물고'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기록한 주변인들의(유재건-이향견문록) 기록은 모두 그냥 죽었다고만 나온다. 거기에 후술하겠지만 대동여지도 제작에 도움을 줬던 신헌은 규장작이나 비변사에서 국가중요기록까지 내와서 김정호에게 제공했는데 만약 김정호가 지도제작으로 투옥되었다면 신헌은 목부터 날아갈 일이었다. [6]
그리고 조선은 지도 제작에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던 나라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처음 부임할때 해야할 일을 정리한 부임육조에서 부임첫날에 할 일로 관할고을의 지도작성을 말하고 있다. 이는 중앙집권의 강화와 북방 개척 등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서였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과 국학자들을 통해서 경제적, 실용적 관심에서의 지도 제작도 이뤄졌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도 이런 실학자들의 실용적 관심에서의 지도 제작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거기에 대원군은 군사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정확한 지도야말로 근대 군사학에서 꼭 필요했을 터. 절대로 태웠을 리가 없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흥선대원군이 분노해서 감옥에 갇힐 정도면 지도는 물론이고 목판은 모조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그것도 단순한 목판이 아니라 여러번 수정 작업의 흔적이 있는, 그러니까 김정호가 처음 만들었던 목판이 말이다. 이런데도 제대로 확인도 안해보고 복사 붙여넣기를 해서 '지도를 불태워 없애고 목판을 도끼로 부쉈다'고 써놓은 위인전까지 있었는데 당연히 현대에도 남아 있는 대동여지도 목판은 뭐냐는 질문이 나왔고, 위인전 출판사들은 확인후 수정할 생각은 안하고 해당 목판을 복원된 복제품이라고 둘러댄 바 있었다. 이 이야기는 일본어 위키백과에까지 당당히 등재되어 있었으며, 영어 위키백과에도 이 구라가 적혀 있었다. 현재는 둘 다 제대로 수정된 상태.
김정호에 대한 당대사람들의 기록은 최남선의 주장과 완전히 다른데 일례로 대동여지도를 만들 당시 강화도 총융사였던 신헌이 쓴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 서문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있다.
나(신헌)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여기서 김백원의 백원은 김정호의 호였고 대동여지도도 23권(22첩+색인1권)[7]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아 신헌이 말하는 김백원은 김정호이고 그가 만들었다는 지도는 대동여지도로 추정된다. 이것으로 추측컨데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개인이 만든 지도가 아니라 반대로 국가의 지시로 비변사, 규장각 등의 중요자료를 수집해 만든 지도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중앙박물관 목판에는 조각기법들이 여러개가 발견되어(즉 제작자가 여러명이였다)(출처:#) 대동여지도는 광범위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지도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당대사람들의 평가와 남은 유물로 추정건데 김정호는 옥사가 아니라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지도제작때문에 옥사한 건 사실이 아닌것으로 확인된다.사실 흥선대원군 때문에 죽었긴 죽었다 카더라 고문사가 아니라 과로사로
어쨌든 그로 인해 <조선어 독본>의 김정호 이야기가 생구라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최근에는 대동여지도가 직접 발로 다니면서 그린 게 아니라는 연구 논문도 발표되는 한편, 2009년 한국 사학계에서 19세기 동양의 지도 제작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린이나 학생용 서적에도 김정호의 옥사 이야기가 거짓이었다는 내용을 싣는 수가 많아졌다.
4 미디어믹스
1983년에 '한국인의 재발견 - 고산자 김정호'라는 관변드라마를 MBC에서 방영할때 다산 정약용편과 함께 방영된바 있다.물론 결말은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바로 그 사망... 이대근이 김정호 역을 했고 백두산을 일곱번 오르내리는 부분은 대한민국의 분단상황으로 인해[8] 한라산 백록담에서 촬영했다. 해당 드라마 비디오테이프는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 소장 중이며 열람이 가능하다.
1995년에 3.1절 특집으로 KBS1에서 방영했던 <땅울림>에서는 김정호 역을 김영철이 맡아 열연한 바 있다.
김정호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 영화가 2016년 개봉했다. 제목은 "고산자, 대동여지도". 차승원이 김정호 역을 맡게 되었다. 예고편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퍼트린 흥선대원군에 의한 옥사설로 낚시를 하였고, 실제 내용은 예고편과는 또 다른 형태의 역사 판타지이다.
시트콤 오포졸 제39화에서는 오지명 포졸과 김병만 포졸이 김정호를 일본 간첩이라며 잡아서 관아로 끌고 갔다가 신원이 밝혀지자 사과하는 내용이 나왔다.
- 참조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병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는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김정호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신헌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 ↑ "팔역의 산천을 샅사이 답사함을 사양치 아니하였으며... 백두산만을 닐곱 번 올나갓으며 이를 위하여 수십 년 과객질을 하얏다" -고산자를 회함-, "그동안, 팔도를 돌아다닌 것이 세 번, 백두산에 오른 것이 여덟 차례라 한다." -조선어독본-
- ↑ 다만 객관적으로 김정호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들은 모두 김정호가 실측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3가지인데, 청구도에 대한 서문인 최한기의 '청구도 제'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 열람 하였다", 신헌의 '대동방여도 서'에는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를 등을 참고"하였고,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는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도 직접 답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 ↑ 전국을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도 일본의 이노 타다타카를 모델로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에도 근방의 상인출신이었던 이노 타다타카는 수차례 실측여행을 떠났고, 남쪽의 큐슈부터 북쪽의 홋카이도에 이르는 지역을 직접 측량하여 일본 최초의 실측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도>를 편찬하였다고.
-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 지하 보관소에 버젓히 남아 있었음에도 박물관 사람들조차 그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에 박물관 이전 작업 중에 유물 정리하다 보니 그제서야 그게 있다는 걸 발견한 것.
- ↑ 신헌은 나중에 판중추부사까지 올라 강화도 조약과 조미수호조약등을 맻는 등 중요관료로 승승장구한다
- ↑ 위스컨신대에서 소장중인 대동여지도
- ↑ 한중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고 북한이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