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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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史
선대고대중세근대현대
~ A.D 538538~11851185~18681868~1945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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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대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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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덴노다이쇼 덴노쇼와 덴노
왕호다이쇼 덴노 (大正天皇)
이름요시히토(嘉仁)
생몰년도1879년 8월 31일 ~ 1926년 12월 25일 (47세)
출생지일본 도쿄 아카사카 구 동궁어소
사망지일본 가나가와 현 미우라 군 하야마 정 하야마 어용저
재위기간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14년 152일)
즉위식1915년 11월 10일
장례식1927년 2월 8일

1 소개

大正 (たいしょう), 한 글자(일본어 2바이트 규격)로 압축하면 .
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年號, 또는 원호 元號). 메이지 덴노의 아들 요시히토(嘉仁) 덴노의 치세.

연호 '大正'은 <주역(周易)> 단전(彖傳).임괘(臨卦)에 나오는 "亨以, 天之道也(바른 것으로 크게 형통하니, 하늘의 도라)"에서 유래했다.

2 전반적인 생애

메이지 덴노의 측실인 야나기하라 나루코(柳原愛子)[1]의 소생으로 어린시절의 칭호는 하루노미야(明宮). 정실인 쇼켄황후(昭憲皇后)[2]에게 자녀가 없었고 다른 측실 소생의 형제자매 4명마저 줄줄이 사망하여, 사실상 메이지 덴노의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서자임에도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병약했고 생각한 걸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등. 어딘가 나사빠진 행동으로 인해 생긴 그의 별명은 존재감이 없는 천황(影の薄い天皇).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솔직담백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보질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못하여[3] 1921년에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섭정[4]에 나선다. 이에 대해서 히로히토 스스로가 한 증언이 있다. 황태자 시절의 다이쇼는 매우 쾌활하고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었지만, 즉위한 후 온갖 제약에 속박되는 생활을 하게 되자 이로 인해 괴로워했다고 한다.

사망한 날이 12월 25일이라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해당 날짜에 그 능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어머니 나루코가 측실이었기에 오랫동안 어머니와 만나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임종에 즈음해서야 아내인 사다코 황후가 배려해서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숨을 거두었다고. 감동이다

3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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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에 불과한 시기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가 - 시베리아 출병 - 쌀 소동 - 워싱턴 회의 - 관동 대지진 등 국내외 굵직한 사건사고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우리로서는 경술국치 직후 일제강점기 무단통치 - 3.1 운동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회유공작)를 겪은 기간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번벌(藩閥)[5] 정치에서 벗어나 정당 세력이 활성화되고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노동쟁의가 격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두드러진다. 이를 가리켜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민주적 개혁이 결실을 이룬 건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였으며, 이 또한 일본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의 산물은 아니었다.

4 가족관계

측실은 없으며, 데이메이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을 낳았다.

  • 차남 아츠노미야 야스히토(淳宮雍仁) 친왕(1902-1953) : 만 20세가 되던 1922년, 지치부노미야(秩父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1928년, 아이즈 번의 마지막 영주인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의 손녀 세츠코(勢津子)[6]와 결혼했다. 세츠코 비는 한 차례 임신했으나 2.26 사건 당시 유산되었고, 이후 자녀를 낳지 못했다.

5 기타

일본의 입장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팽창한 국세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로, 군부에 의해 사회 분위기가 경직되었던데다가, 경제 공황과 전쟁의 영향으로 살기가 팍팍했던 쇼와 초기의 1930~1940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살기 좋은 시대였다. 때문에 일본인들에게는 이 시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으며,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창작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이를 다이쇼 로망이라고 한다. 물론 그나마 재위 후반기에 벌어진 관동 대지진과 이어서 벌어진 금융공황으로 인해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는 등 만만찮게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게임/애니 사쿠라 대전의 시대적 배경 다이쇼는 한자 하나만 바꾸어 太正 [일본어 발음으로는 같은 타(다)이쇼]시대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었으나, 하이카라 씨가 간다는 다이쇼 중기, 다이쇼 야구 소녀는 다이쇼 후기로 배경은 현실 역사의 이 시대이다.


다이쇼 덴노가 즉위하기 전 황태자 시절(1907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10] 위는 방한 당시의 사진. 왼쪽이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훗날의 다이쇼 덴노), 가운데는 한국 황태자 이은, 오른쪽은 일본의 방계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威仁).

당시 그의 방한은 이토 히로부미가 밀어붙여서 성사된 것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 어쨌든 역사상 일본 황태자의 해외 방문은 이게 처음이며[11] 그 후 지금까지 덴노나 황태자의 방한은 아직 성사된 바 없다. 다만 쇼와 덴노헤이세이 덴노가 방한하려고 몇 번 추진하기는 했다.

일화가 하나 있는데, 다이쇼 덴노는 병약하고 소극적이라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길 꺼렸다. 그래서 한 번은 한 번이라도 국회로 행차하여 군주의 존재감을 나타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이쇼 덴노는 갑자기 공문서를 돌돌 말아 김밥 모양으로 만든 다음 그걸 망원경이라고 국회 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로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와달라는 요청도 다시는 없었다고 한다. 오 나름 머리 좋다[12] ㅊ..초딩??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일화가 약간 있다. 황태자 이은을 마음에 들어하여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는 내용이 일본의 교수 하라 다케시(原武史)의 저서 『다이쇼 덴노(大正天皇)』에 언급된 바 있다.

요시히토(다이쇼 덴노)는, 번역관에게 '때때로 한국의 태자 (이은=영친왕) 를 만나니까 조선어를 익혀보고 싶은데, 책 같은 것은 없는가. 있다면 시종에게 전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한 이외에도 이은을 만날 때마다 '오늘 이야기한 문장을 조선의 언문 (한글) 으로 써서, 거기에 발음과 번역문을 달아서 제출하도록' 이라고 (번역관에게) 명했다고 한다. 요시히토는 덴노가 되어서도 한국어 학습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시종에게 때때로 한국어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시종 구로다 나가히로(黒田長敬)는 다이쇼 덴노의 사망 직후 '언젠가의 일이다. 무언가를 아뢰었더니 미소를 띄우시면서 묘한 말씀을 하셨다. 이상하다고 여겨 생각해 보니 그건 한국어였고, 앗 하고 몹시 놀랐다'고 진술하고 있다.

다이쇼 덴노 본인이 억압적인 궁중 환경과 기질이 맞지 않아 심적 고통을 많이 겪은 탓에, 어린 나이에 인질로 일본에 끌려온 이은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껴서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다이쇼 덴노가 보인 기행 중에서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는 것은 혹 서툰 한국어로 말한 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일제강점기, 백두산의 최고봉인 병사봉(兵使峰)은 그의 연호를 따서 대정봉(大正峰)으로 불린 흑역사가 있다. 무슨 짓거리야 다이쇼 덴노 본인도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13]

2011년은 다이쇼 100년이 되는 해이다. 백년기념 사이트

하지만 그 시기가 일제강점기가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 시기를 일본에서 다룬다는 것은 정말 위험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사이마스밀리마스가 우익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최근 오소마츠상의 일러스트 중 다이쇼 로망풍의 일러스트가 올라와 논란에 휩싸였다.

6 다이쇼/출생

6.1 실존인물

6.2 가상인물

7 다이쇼 시대를 다룬 작품

  1. 나루코의 오빠 야나기하라 사키미츠(柳原前光) 백작의 딸 야나기하라 뱌쿠렌은, '다이쇼 시대 3대 미인'이자 문학가로서,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2. 이치죠 가문의 딸로, 본래 이름은 마사코(勝子)였으나 결혼하면서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3. 정신병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4. 후계자인 황태자 였으므로 우리나라식으로는 대리청정에 해당한다.
  5.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츠마, 쵸슈 등의 출신자들이 형성한 파벌
  6. 이방자 비의 이종사촌 여동생. 본래 한자는 節子였으나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와 한자가 같았기 때문에 개명했다. 勢는 황실과 인연이 있는 땅인 이세(伊勢)에서, 津은 친정 마츠다이라 가문의 근거지인 아이즈(會津)에서 따왔다고 한다. 데이메이 황후가 가장 귀여워한 며느리이기도 하다.
  7. 패전 후 신적강하로 신분과 재산을 잃은 후,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쳤다.
  8.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히로히토 덴노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한편 스게마사는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이기도 하다.
  9. 친손녀 5명에 외손자까지 따지면 손자, 손녀, 증손자까지 많다.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이을 친손자가 없어서 그렇지. 다카히토 친왕의 손녀들에 대한 정보는 여왕 항목을 참조.
  10. 이 때 비루한 나라의 수도를 문으로 들어가기 뭐하다면서 당시 수도였던 한성 성곽의 일부를 허물고 들어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훗날 서울 성곽과 돈의문이 파괴되는 시초가 됐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성곽 붕괴는 다이쇼 덴노가 직접 내린 명이 아니라 다이쇼 덴노가 방한하기에 앞서 먼저 온 일본 정부 요인들에 의해 멋대로 행해진 짓이었다.
  11. 일본 천황의 해외 방문은 쇼와 덴노가 처음이다. 순서대로 미국, 영국, 대만(사실 중국에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서 무산되고 대만을 방문함.), 네덜란드 총 4개 나라였다.
  12. 다이쇼 덴노가 멍청해서 그랬건 노리고 그랬건 간에, 다이쇼 덴노의 희망대로 다시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13. 악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에 덴노 신격화와 우상화를 주로 하는 곳은 덴노 본인이 아니라 명목상 덴노 휘하인 정부 기관이었다. 당장 이 문서의 서술만 봐도 다이쇼 덴노는 개인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덴노 신격화, 우상화는 메이지 덴노 때부터 패전을 맞이할 때까지 꾸준하게 유지된 정책 중 하나였다.
  14. 공식 프로필 상으로는 쇼와 5년생이지만, 실제로는 다이쇼 15년 런던 출신이다.
  15. 우에키 히토시는 쇼와 히토케타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는 본인 항목 참조.
  16. 주요 캐릭터들이 다이쇼 원년(1912년)~2년(1913년) 출생. 단 이시가키 타마키와 오가사와라 아키코는 제외(7월 30일 이전 출생이라 시간상으로는 메이지에 해당).
  17. 1990년 기준 65세면 1925년생으로 다이쇼 14년생.
  18. 작품배경이 다이쇼 20년이라 정말로 가상인물일 수밖에 없다.
  19. 작중 인물들 전부 다이쇼 시대 이전에 태어났으나, 배경은 다이쇼 중기이고, 원작 결말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