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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 |
1 개요
권노갑(權魯甲)
1930년 02월 18일 ~
DJ의 영원한 비서실장
2 생애
대한민국의 정치인.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1930년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태어났다.[2]그러나 성장기는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지냈다.[3]
목포상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목포여자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다.[4][5]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자 김대중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김대중의 계파인 동교동계에서 한화갑과 양갑으로 불리며 정치 활동을 했다.[6]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때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 때 고문을 포함하여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목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서 민주정의당 최영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패배 후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치러진 199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같은 해 지역구를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에게 물려주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7년 한보 비리로 기소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새천년민주당 경상북도지부장 안동지역을 맡으면서 권정달의 영입과 권정달의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로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있다.[7]
2002년에 진승현 게이트에서 국가정보원 차장인 김은성을 통하여 불법자금을 받은 것으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2003년 열린 항소심에서 무죄를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에게서 금강산 카지노.면세점 허가를 비롯한 대북 사업 전반에 대한 지원을 요청받고 현대상선에서 비정상적으로 나온 20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2003년 대검 중수부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가 2004년 징역 5년에 추징금 200억원의 기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2007년 3월 출소하였다.
이 후 2선으로 물러나 민주당과 그 후신 더불어민주당의 상임고문[8]으로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후계자인 문재인 전 대표의 노선에 일관되게 비판적 태도를 취하다가 2016년 1월 민주당의 후신인 더불어 민주당을 탈당, 안철수 지지를 선언했다. 다만 국민의당에 합류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3 선거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목포시) | 평화민주당 | 87,735표(84.2%) | 당선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목포시) | 민주당 | 76,486표(82.05%) | 당선 (재선)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6번) | 새정치국민회의 | 4,971,961표(25.3%) | 당선 (3선) | 1997년 한보사태로 인한 의원직 상실 |
- ↑ 2014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본인 회고록 순명 출판 기념 사업회
- ↑ 여기에서는 목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정확한 사실 추가바람
- ↑ 그래서인지 김홍일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비례대표로 이적한 1996년에 잠시 국민회의 안동 을
유령지구당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최근에는 동시통역사에 도전한다든가,동시통역대학원 과정에 갔다든가 하는 소식이 있었다.
- ↑ 동교동에서 외신들과의 인터뷰 통역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어느 정치 계파나 다 그렇겠지만, 동교동계라고 또 다 같은 동교동계는 아니다. 권노갑의 경우 김대중의 정치 초기부터 가신에 속했던 사람으로, 보통 동교동계의 좌장이자 구파의 대표자로 불렸고, 한화갑은 신파로 분류된다. 후에 새천년민주당 정풍 운동 당시 이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신구파간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는 16대 대선 정국까지도 이어진다. 다만, 권노갑과 한화갑 개인의 사이는 좀 더 이전부터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 ↑ 권노갑 회고록 중
- ↑ 다만 실질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일종의 명예직으로 사실상 정계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황이며, 언론에서도 보통 은퇴했다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