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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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보면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말이지…….

1947년 9월 7일 ~ 1990년 8월 22일

It grew on me like a drug habit, except it was not me who was taking the drugs.

그것은 마약처럼 습관이 되어갔다. 내가 약을 먹는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레이엄 영(Graham Young)은, 영국 최연소로 (정확히는 탈륨)을 이용해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자이다. 탈륨 화합물을 찻잔에 묻혀서 동료들에게 건네주는 식으로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별명은 'Teacup Poisoner(찻잔 독살자)'였다고 한다.

1 어린 시절(1차 범행기)

태어난 지 3달 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모 손에 컸다. 그러다 2살 때부터는 재혼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는데 훗날 정신과 의사들은 "정서 발달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온정이나 동정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진단했다.

독약에 대한 집착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학교 친구들이 운동선수나 가수를 우상으로 삼았다면, 그레이엄은 영국의 악명높은 독살자 할리 크리픈을 우상으로 삼았다.[1] 특히,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아내장모를 독살하여 1855년 글래스고에서 교수형을 당한 살인범, 에드워드 프리처드를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였고, 히틀러의 절대적인 권력을 부러워했다.

14살에는 약국에서 학교 과학 숙제를 핑계로 나이를 속여 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을 구한 뒤 늘 품에 지니고 다니며 그 약병을 자신의 작은 친구라고 불렀다. 그 후 학교 과학 실험실의 청소 당번을 자진하여 학교 과학 실험실을 드나들게 된 후로는 화학 실험에서 사용하는 독극물을 자유롭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독학만으로 대학원 수준의 화학 지식을 습득한 것도 14세 때 일이다. 그리고 며칠 뒤 약병에 든 독약을 학교 친구와 가족들을 상대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아이들이 먹는 샌드위치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을 섞고 그 양에 따라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지켜봤다. 약을 먹은 친구들은 구토를 하고 복통을 앓는가 하며, 심하면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 그레이엄은 그의 나이 15살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의붓어머니를 독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엄이 화학 시간에 이상한 실험을 제안하는 것을 보고 학교의 화학 선생님이 의구심을 갖게 된다. 방과 후에 그레이엄의 책상을 조사한 선생님은 안티모니 타르타르산염이 든 독약병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 유명한 죄수들과 독약에 대한 수필, 독약의 효능 및 치사량을 적은 종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조사를 받게 된 그레이엄은 가족과 친구들을 상대로 독약을 실험했다는 사실을 털어놨고, 의붓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 동안 자살을 시도했는데 자살 이유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독약 없이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2년, 15살의 그레이엄은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아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에 위탁된다. 그러나 그의 미치광이 행각은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독극물에 대해 워낙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정원에 있는 월계수와 나뭇잎에서 청산가리를 추출할 수 있을 정도였고, 병원 직원과 동료 수감자에게 독극물을 먹여서 그 중 1명은 중독으로 사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9년 뒤에는 석방되어 나오는데, 후에 정신과 의사 보고서를 보면 그 당시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건 오진이었다.

2 청년 시절 ~ 사망(2차 범행기)

퇴원한 뒤 보빙턴 마을로 이사 가서는 사진기 회사의 창고 일을 맡았는데, 회사에 들어갈 때 사장에게는 사랑하던 의붓어머니가 죽은 뒤 신경쇠약에 걸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진기를 생산하는 회사에 취직한 이유부터가 독극물 살인에 필요한 탈륨을 훔치기 위해서였고, 취직한 다음 날에는 시내에 나가서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의 독약을 구해온다. 그 뒤로 거의 70명이나 되는 회사 근로자들이 설사, 경련, 요통, 멀미, 마비 증상을 겪기 시작한다. 몇몇은 입원을 했고, 그중 두 명은 고통을 겪다가 죽고 말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병을 사람들은 ‘보빙턴 병’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레이엄이 가져다준 커피와 차를 마시고 나면 병에 걸린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공장의 누군가가 동료들에게 독약을 먹인다는 의혹이 불거져서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레이엄은 경찰 조사를 받는 동안 자신의 뛰어난 화학 지식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레이엄은 수수께끼의 질병이 탈륨 중독일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보인다고 말했고, 이는 경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경찰이 그레이엄의 과거를 조사해 보자 소름 끼치는 진실이 밝혀졌고, 그레이엄은 살인 혐의로 즉시 체포됐다. 그레이엄의 아파트에서는 탈륨, 안티모니, 아코니탄 같은 독약이 발견되었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액자 사진도 나왔다. 그레이엄의 일기장도 나왔는데, 거기에는 여러 독약이 사람들에게 끼친 결과가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레이엄은 일기장에 기재한 내용이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한 기록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레이엄은 사람들의 목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에게 인간은 실험동물과 같았다. “마음만 먹었으면 전부 다 죽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살려준 거죠.”라고 그레이엄은 형사에게 자랑했다. 1972년 6월 바로 재판이 시작되었고, 모든 혐의를 인정했기에 재판은 10일 정도로 짧게 진행됐다. 배심원은 그에게 법정 최고형인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레이엄은 18년 가량 교도소에서 조용히 복역하다가 1990년 8월, 자신의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43세였으며,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3 여담

사이코패스 연구자들에게는 현재까지도 요주의 연구 대상이다. 살해 방법도 문제지만, 만약에 그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시의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에 가담했다거나, 오랫동안 범죄 욕구를 참다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지거나 옴진리교를 믿었다고 상상해 보라. 만약 히틀러가 일찍 태어난 그레이엄에게 실험을 하게 해 주었다면, 유대인을 대량으로 살해한 독가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물질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안그래도 끔찍했는데 더 끔직한 물질이라니... 노바 6? 특히,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망자가 고베 대지진을 능가하는 심각한 참극을 빚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가진 화학 기술을 좋은 쪽으로 썼다면 과학이 좀 더 발전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재능이 이런 작자에게 있었다는 것만이 아쉬울 뿐이다.
  1. 할리 크리픈은 1910년에 아내를 죽여 지하 석탄 창고에 매장한 뒤 자신의 비서와 도망을 친 살인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