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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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23대 안원왕 고보연24대 양원왕 고평성25대 평원왕 고양성
시호양원왕(陽原王) /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 양강왕(陽崗王)
고(高)
평성(平成)
생몰년도음력? ~ 559년 3월
재위기간음력545년 3월 ~ 559년 3월 (14년)

1 개요

Bicameral king
고구려의 제24대 . 는 평성(平成). 그 평성과는 다르다.

이 해(545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高麗國) 세군(細群)과 추군(麤群)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에 맥국(狛國)의 향강상왕(香岡上王)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해(546년)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박왕(狛王)[1]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狛王)의 질병이 심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중부인과 소부인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ㅡ 《일본서기흠명왕기

안원왕의 장남으로 후사를 둘러싼 정쟁속에서 순탄치 못하게 즉위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46년에 안원왕에게는 정부인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고, 중부인(세컨드)의 8살 아들인 평성을 왕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8살에 왕이 되었다는 소리.... 그러나 소부인(third)에게도 아들이 있었고, 안원왕이 병에 걸리면서 중부인의 친가인 추군과 소부인의 친가인 세군이 왕위를 다투어 추군이 이기고 세군 2천여명을 몰살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에만 전해진다. 교차검증이 안되지만 당시 고구려의 왕권이 불안했다는 방증이 많아서 사실상 왜곡이 아닌 기록으로 본다. 여하간 이렇게 불안한 시국에서 즉위했다.[2]

548년에는 가야 안라국이 구원을 요청해 동예인을 대거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지만(독산성 전투) 신라가 원군을 보내서 결국 나제연합군에게 완패했다. 한편, 몽골초원에서 기존의 강자 유연을 몰아내고 한참 성장중이던 돌궐유연과 우호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침공했다.[3] 앞서 백암성과 신성을 개축한 적이 있는데 돌궐이 백암성과 신성을 공격했으니 고구려 측에서도 뭔가 낌새를 까고 대비한 모양이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고흘이 1만 군사로 돌궐군을 격파하여 1천여 명을 참살하나, 돌궐과의 싸움을 눈치챈 남쪽의 나제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하류는 백제에게, 상류는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 때 백제의 성왕평양성까지 공격하고 싶었지만 신라가 고구려와 화친해서 이는 막았다. 까딱했으면 고구려 멸망이 100년은 앞당겨졌을지도(...) 554년에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했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물러났고, 백제까지 때려잡고 잘 나가는 신라군에게 계속 맥없이 당해 한때는 옛 옥저 땅(지금의 함경남도 지역)까지 신라군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진흥왕은 여기에다 진흥왕 순수비를 박아놓고 갔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왕족장배왕이 무리를 이끌고 이 시기에 일본으로 망명해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이 시기 고구려 내부사정이 불안정하고 혼란했다는 의미인 듯 하다.

참고로 북제의 박릉 출신의 사신인 최유가 고구려에 파견되어 북위 말년에 고구려로 이동한 북위 유민 5천호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고구려에서 응하지 않자, 양원왕을 쥐어패고선 허락을 얻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양원왕이 23세 즈음에 사망했고 최유도 최소한 그 이전에는 고구려에 사절로 왔을테니 스무살 남짓 된 권한 없는 왕이 만만해 보이기는 했을듯. 물론 이 기록은 최유의 열전에만 전해지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국까들은 이걸 당연히 사실로 받아들이고, 국빠들은 반대로 이걸 고구려와의 교섭에서 패배한 최유가 화풀이로 지어낸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와 같이 고구려가 내외적으로 상당히 어려웠던 상황이라 이 때가 반란의 적기라고 생각했는지 557년 10월에 환도성에서 간주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양원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二年春二月 배나무가 특이한 현상을 보이다
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二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三年秋七月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다
三年 동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도움으로 실패하다
四年秋九月 환도에서 좋은 벼이삭을 바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 동위에 조공하다
六年春一月 백제가 도살성을 빼앗다
六年春三月 신라에게 2성을 빼앗기다
六年夏六月 북제에 조공하다
六年秋九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七年夏五月 북제에 조공하다
七年秋九月 돌궐의 침입을 물리치다
七年 신라가 10성을 빼앗다
八年 장안성을 축조하다
十年 백제 웅천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年冬十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冬十月 호랑이가 평양에 들어오다 잡혔다
十一年冬十一月 금성이 낮에 나타나다
十一年 북제에 조공하다
十三年夏四月 양성을 태자로 삼다
十三年冬十月 환도성에서 반역 사건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三月 양원왕이 죽다.
  1. 고구려를 짐승 박(狛)으로 칭했었다.
  2.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신라엄친아 거칠부의 손을 잡고 고구려를 떠나버리는 것도 이시기.
  3. 이에 대해서는 아직 돌궐이 요동의 고구려에서 저 멀리 떨어진 몽골의 서쪽 귀퉁이에서 유연에게 막혀있던 시기라 이 기록 자체가 시기가 틀렸거나 없던 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유연은 세력이 크게 쇠락한 상황이었고 이듬해 정월 돌궐이 유연을 격파한 위치가 하북성 북쪽의 장자커우 일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유연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많이 약화된 상황이었거나 돌궐의 세력권이 고구려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