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那日本府說
목차
1 개요
4 ~ 6세기에 걸쳐 일본이 한반도에 통치 기구를 세워 반도 남부 지방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주장. 일본에서는 남조선경영론(南朝鮮經營論),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라고도 한다. 한마디로 일본판 요서경략설.
세계의 교과서들도 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받아 들여 지도에 표기하고 있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1] 뿐만 아니라 일부 사이트에도 여전히 정설로 명기되어 있다. 2016년 기준으로 "4세기 중반에 가야가 일본 식민지로 대체"되었다고 적고 있는 독일어 위키백과독일어 능력자 모집
조선의 남쪽을 경영했다는 의미에서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그를 통해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였다. 이어 스에마쓰(末松保和)는 대일본사(大日本史)의 한 편으로 일한관계(日韓關係)를 정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을 완성시켰으니, 그것이 괴작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였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현재 일부 일본의 교과서와 극우 집단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광복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일본서기》 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어 왔으며, 당시 야마토가 한반도에 진출해 이를 통치할 여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꾸준히 제시되었다. 우선 '임나일본부'란 명칭부터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반박의견으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북한 역사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김석형은 백남운(白南雲)과 함께 북한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의 스승은 일제 당시 임나일본부설을 일본 학계의 정설로 만들었던 일본 사학자 스에마츠 야스카스였다. 그가 임나일본부 관련 수업을 할 때마다 김석형은 한복을 입고 출석해 수업 내내 그를 매의 눈빛으로 노려보았다고 한다. 김석형의 분국설은 스에마츠의 임나일본부설을 철저하게 뒤집어 해석한 것으로, 이 주장에 의하면 삼한, 삼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 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왕릉비』가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것과 함께 설득력이 희박한 주장이나,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91년에 나온 가야사 연구에서 천관우가 《일본서기》에 나온 왜의 한반도 안에서의 군사 활동 기록의 주체를 《일본서기》 문면(文面)에서적은 대로 왜로 볼 것이 아니라 백제로 주어를 바꿔서 해석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즉 원래는 해당 사건들이 백제가 주도한 정벌인데 훗날 《일본서기》가 편찬되면서 덴노의 권위(덴노가 한반도 및 주변부 세력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들이 그 명령을 따르는 위치에 있었다고 설정된)를 위해 주어를 백제에서 왜로 바꾸었다는 것. 다만 이 논리로 나온 결과(임나일본부는 사실은 백제의 임나 주둔 군사령부)가 《일본서기》에서의 관련 기록들과 모순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한반도(특히 백제) 관련 기록들을 그 주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바꿔 해석한다는 논리 자체는 한국 사학계에서 널리 수용되었고, 김현구나 노중국, 이도학, 이희진 같은 대부분 사학자들이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2010년 한·일 학자들의 모임인 한·일역사공동연구회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볼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한일 양국 역사계의 최초 합의 사항.).[2] 그러자 '일본이 드디어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과연 그럴까. 우선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 있지만'이라는 단서가 걸린다. 또 당시 일본학자들의 의견이 일본 정부나 학계의 공식 견해도 아니었다.[3]
역사학자 이희진이나 김현구 선생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했다"는 건 과거 식민지 지배 시절의 제국주의적 용어, 스에마쓰 야스카즈 같이 한반도 남부가 야마토 조정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는 남선경영론적 식민사관 학설 주장을 폐기했다는 뜻이지, 고대 야마토 조정은 5세기 한반도 남쪽의 정치 세력(가야, 백제 그리고 신라)에 대해 자국의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었던 세력이라는 시각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어느 쪽으로든 한반도에서 왜는 갑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그것이 을인 한반도 세력(백제, 신라, 가야 등)들의 역학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라고 전제하고 역사를 본다는 것.일본판 요서경략설인가
일본 중학교과서 중 일부에 임나일본부 관련 서술이 사실인 양 실려있어 논란이 일고있다. 관련뉴스
2 근거와 논박
2.1 일본서기의 내용
근거 중 핵심적인 것이 고사기 일부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는 320년 즈음 신라를 복속시키고 369년 왜군을 보내어 초고왕과 함께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임나(任那), 즉 가야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사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에는 걸리는 문제점이 한둘이 아니다. 동기부터가 신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대뜸 접신해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금은비단이 넘치는 나라가 저기 있다' 하니 쳐들어간다. 마침 진구황후가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애가 막 나오려 하니까 돌을 소매 or 허리춤에 끼우고 주문을 외워 출산을 늦추고, 그렇게 어찌어찌 바다를 건너가니까 신라가 밀물에 잠겨버린다(..). 신라침몰 신라가 밀물에 잠기자 신라왕이 놀란 나머지 알아서 항복한다. 버전에 따라서는 신라왕의 무릎뼈를 뽑고 돌 에서 기게 하다가 목까지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어림없는 소리. 석우로 전설과 혼합된 듯. 그리고 신라의 항복을 본 고(구)려와 백제가 지레 겁먹고 항복한다...게다가 그때 신공황후(神功皇后.진구황후) 가 꽂은 창이 아직도 신라 궁궐 문 앞에 있다카더라(...)그런거 없다 이야기 자체가 지나치게 신화 - 전설양판소의 경향이 강한지라 스에마쯔 이후로 이 기록을 믿는 사람들은 그저 데꿀멍(...) 더구나 진구황후 본인부터가 아버지보다 먼저 태어나서 활동하고타임머신이라도 돌렸나보다 설마 그 진구가 노진구였던건가, 《일본서기》에 일본에 항복하거나 죽였다는 신라의 지배층들은 진구황후의 생존시기와 전혀 안맞는다. 해당 문서 참조.
《일본서기》자체에서도 문제가 되는데, 임나일본부를 일본 덴노의 명령으로 일본이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달리 정작 《일본서기》본문에는 가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세운 세력은 철저하게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군사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통제한다면 무엇인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을 경우 그쪽에 직접 명령하면 될 터인데, 뭔가 임나에 요구사항이 있으면 일본은 죄다 백제왕한테 요구해서 간접적으로 얻어내지 직접 요구를 전혀 못한다. 실제로 한일 학자들의 토론시 일본 학자가 태클걸었다가 이 때문에 한국학자한테 데꿀멍당한 적도 있다. 목라근자의 자손은 후에 일본으로 귀순하여 일본 소가씨의 시조가 된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임나를 자기들의 땅으로 인식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난보쿠초 시대에 《일본서기》와 같은 목적으로 편찬된 신황정통기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설을 기록하면서, 주석에 고구려/백제/신라가 진구황후에게 복속했다는 것은 조상님들이 삼국을 삼한이라고 불렀던 데서 헷갈린 거임. 고로 삼국이 아니라 신라만 지배한 거임 신라는 쩌리라 만만하다 이거지? 이라 기록했고, 그마저도 《일본서기》에서 삼국을 삼한으로 본 기록과 중국 사서의 내용을 요상하게 뒤섞어 진한/마한/변한을 합하여 신라라고 부른다고 잘못 적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학계에서는 진구황후의 삼한 정벌론에 대해 사로 검증을 통해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제국주의의 팽창하에 묻혀버렸다.
2.2 일본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시기상의 오류
또한 임나일본부에서 나온 단어인 일본(日本)이라는 말은 정작 7세기 이후에나 쓰인 단어로서 5세기 장수왕이 만든《호태왕비(好太王碑)》에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왔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본래 일본의 국호는 '왜(倭)'였으며 '일본(日本)'으로 국호를 정한 것은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비정하는 시대보다 한참 후세의 사람인 덴무 덴노(673~686)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호태왕비에도 '일본'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으며 '왜'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日本)이나 왜(倭)나 대왜(大倭) 대화(大和)나 모두 야마토의 음차이므로 반박으로서는 미흡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日本)의 발음은 지금은 니혼이지만 그시대에는 야마토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대국(邪馬臺國)의 일본발음도 야마타이코쿠로 야마토와 유사하다.
다만 다이카 개신 이후 국명을 일본으로 칭한 것에 대해 다시 견신라사, 견당사가 그에 대해 해명하고 다닌 것을 보면 발음문제를 떠나 사서 상(일본측 공식기록 만이 아닌 한, 중 공식기록)'일본'이란 공인된 국호는 임나일본부설이 나오는 시기와 연관 짓기란 어려운 것이다. 또한 기록 자체가 후대에 정리되면서 과장된 쪽으로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뚜렷이 제시할 수 있다.
2.3 칠지도
일본서기에서 백제가 일본에 칠지도와 칠자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근대에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서 칠지도가 발견되었다. 일본학자들은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 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했다.
일본학자들은 '우왕ㅋ 칠지도가 기록된 일본서기가 신뢰성이 있으니 임나일본부설도 사실이겠군ㅋ'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그런데 칠지도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4]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높은사람이 낮은사람에게 하사하는 물품에 적힐만한 내용이란걸 단박에 알 수있다. 하지만 앞에 '태화'라는 연호를 문제삼아 일본학자들은 애를 쓰며 동진이 백제를 통하여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 주장한다.
2.4 중국 역사서의 왜왕 책봉 기사
한편 남조(南朝) 송(宋), 제(齊), 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왜왕의 책봉에 대해서는, 당시 가야와 신라가 중국과 통교하는 부분에서 약했기에 남조에서는 사정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며, 이를 왜에서 차지하지도 않은 땅을 언론플레이용으로 책봉명에 갖다붙인 것이라고 반박한다. 신라의 조공 기록은 377년과 382년에야 처음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고구려를 거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나마도 북조인 전진에 대한 조공 기록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 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매우 흔했다.
남조에서 내린 작위에는 본래 일본이 요구했던 작위 명에서 백제가 빠졌다. 백제와는 이미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으니 '일본이 백제를 거느리고 있다'고 굳이 써서 외교 관계에 지장이 생길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가 받았던 진동대장군이라는 작위가 일본이 받았던 안동대장군보다 두 단계 높은 직위였는데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높은 정동대장군 직위를 받기도 했다), 이것은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주장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이를 보조한다.
2.5 수서 왜국전 내용
그 외에도 수서 왜국전 등에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라는 기록 역시 존재한다.
역사 갤러리에서는 2006년에 이 기사의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부분을 두고 '신라와 백제가 왜를 통해 대국이 되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냥 개드립. '以 A 爲 B'는 'A를 B로 삼다, 여기다'로 해석한다. 다른 용법은 없다. 차라리 이걸 까고 싶다면, 수서가 편찬된 시기를 고려해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본문에도 나오지만 편찬 과정이 엄밀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수서의 기록 또한 쇼토쿠 태자가 '동천자가 서천자에게, 잘 지냄? ㅋ'하던, 일본 자신의 정체성이 국제 질서 이상으로 표출되던 시절이라, 여기에 고무된 일본의 허세가 기록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2.6 양직공도 신라 제기
2011년에 새로운 버전의 양직공도 신라 기록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에 '或屬韓或屬倭'(혹은 한에 속하기도 하고, 혹은 왜에 속하기도 하였다)라고 되어있어 언론에서는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볼 때 '혹속왜'이라는 구절은 앞에서 말한 책봉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며(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건 왜곡된 것), '혹속한'이라는 구절 또한 삼한 시대를 가리키는 서술이거나 백제의 언론플레이로 추정된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나머지 기록 또한 다른 신라 관련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 부분 또한 큰 맥락에서 기존 기록과 거의 일치하니, 예전 사서에서 그저 발췌한 내용 이상을 넘을 수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2.7 『광개토왕릉비』의 내용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도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399년에 왜군이 신라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때 왜군의 거점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인것처럼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은 후대 일본에 의한 과장이나 왜의 언론플레이를 통한 윤색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낮기에 큰 논란이 되어 왔으나, 『광개토왕릉비』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로 일단 일본의 주장은 지적받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신묘년조는 관용적으로 신묘년(391년, 영락 1년)조라고 불리고 있을 뿐 정확하게 말하면 병신년(396년, 영락 6년)조의 일부분이다. 호태왕비에는 호태왕의 치적에 대한 기사는 을미년(395년, 영락 5년)조의 비려 정벌에서 시작하며 정확한 의미에서의 신묘년조는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의 '신묘년조'는 을미년조와 병신년조 사이에 끼어있으며, 문맥상 을미년의 비려 정벌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병신년조에 붙는 것으로 본다. 병신년에 호태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묘년(391년)의 일을 언급했다고 하면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문제의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기존의 번역)
신묘년조의 해석은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일본인 학자들이 최초로 한 해석에서도 해독하기 어려운 세 개의 글자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신(新), 라(羅), 가(加) 가 들어간다고 보고 "백잔, 신라, 가라를 파해서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백잔, 임나, 신라를 파해서"로 보거나 해독되지 않는 부분에 동사가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해서"라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한때 『광개토왕릉비』 조작설이 화제가 되었지만 중국 학자 왕건군의 연구 이후 조작은 없었다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탁본시 더 잘 되도록 석회를 바르기는 했지만 글자를 석회로 덮어 변조하지는 않았으며, 지워진 글자는 풍화작용과 비문 발견시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불을 붙여 태울 때 떨어지고 훼손된 것이라고 한다. 신묘년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한국, 중국, 일본의 학계에서 이런저런 다른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유명한 해석 중 하나는 정인보의 설로 신묘년조의 재해석 중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설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백제와 신라를 격파했다는 부분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고구려인 것은 당연하므로 생략되었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잔, ○○, ○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정도가 된다. 위키백과에는 이 설이 정설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 설은 현재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로는 다음의 사항들이 언급된다.
- 신묘년인 영락 1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했다면 이를 신묘년조로 기록하지 않고 5년 후의 병신년조에 신묘년의 치적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다.
- 391년에 백제를 이미 격파했다는 것은 396년에 새삼스럽게 백제를 공격할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병신년조에 신묘년의 일을 언급할 이유도 없다.
- 정인보의 해석은 주어가 아무 단서 없이 바뀌어서 어색하다.
- 비문의 다른 부분에서는 '왕'이라고 주어를 명시하고 있지 당연하다며 생략하지 않았다.
2004년에 정인보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이 유물은 '호태왕'과 '신묘년'이 적힌 방울이다. 방울을 만들었으므로 중요한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요한 일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킨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측에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을 병신년조에 끼워서 언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방울을 만들었음 → 중요한 치적이 있었음 →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음 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본다. 즉위 1년에 방울을 새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
그 외에도 해(海)가 매(每)를 잘못 읽은 (혹은 변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이 경우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고 백잔,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혹은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자 백잔이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등으로 해석한다. 단 이러한 설 역시 정인보의 설과 같은 약점이 있다.
그 외에도 渡海破(도해파)가 入貢于(입공우)를 변조한 것이라는 주장(2005년 전북대의 김병기 교수의 주장)도 나왔지만, 이 주장에 따르면 원래의 글자 중 入은 높이가 다른 글자의 절반 정도였어야 하고 于는 오른쪽 2/3 정도에 몰려있었어야 하며 변조 과정에서 획을 채워 없애기까지 해야 하는 등의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인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신묘년조의 내용이 반드시 임나일본부설에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임나일본부설의 내용대로 임나 지역이 오래전부터 왜의 영토였다면 신묘년에 임나를 백제 및 신라와 나란히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겠는가라는 점 때문이다. 반대로 임나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임나일본부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혹은 임나가 이미 일본 영토이면 왜가 '바다를 건너'올 이유가 없다며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본서기》에도 왜군이 바다를 건너서 임나 지역에 있는 세력과 합세하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고구려측 기록에서 왜군이 일본 영토 내부를 이동한 것까지 기록했겠는가 여부는 단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짧은 문장 하나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논란이 되는 형국이다.
호태왕 10년에 신라를 구원한 사건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그 전해부터 신라를 공격한 것을 백제 - 왜 - 가야의 연합군으로 간주하고 백제가 공격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비문에서는 왜군만이 언급되어 있다. 백제군이 주력이었다면 왜 백제군이 언급되지 않는지가 문제가 되며, 가야군이 참전했으리라는 것 역시 왜군이 패주할 때 임나로 달아났다는 점 이외에는 근거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 맞서기가 좀 애매하다. 왜군의 규모는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 때 고구려는 5만명을 동원했으므로 왜군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도 한국 학계에서는 왜군의 규모는 1만명 정도로 훨씬 적었고 단지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결과가 신속한 승리라는 것 이외의 근거도 없고, 당시 고구려 서북면의 국경도 그다지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문이 있다. 실제로 고구려군이 신라를 원정하는 동안 후연의 공격으로 신성을 비롯한 700리의 땅을 잃었고, 고구려군은 신라에서 급히 돌아와야 했다.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부분이 별로 없다는 점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별 근거가 없다는 꼬리표를 떼기 어렵다. 가야의 역사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유일하게 서술다운 서술을 하고 있는 사료가 다름아닌 일본서기다. 이걸 그대로 믿을 수도 없고, 부정하자니 다른 기록도 마땅치 않고(...) 쉽지 않다. 현재 역사가들은 신라무덤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장수왕 3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글귀를 새긴 그릇) 등과 왜의 침공기록으로 봤을 때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파견 왜를 격퇴하고 그 대가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해야할 점은, 『광개토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단순 찬양후빨을 위해 세워진 것이라 업적을 훼손하는 쪽으로 쓰여질 수 없었다. 때문에 업적 예찬을 위해 과장과 은폐, 혹은 곡해된 내용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서기》가 기록상으로 큰 가치를 지녔지만, 자국에 대한 과장과 왜곡에 대한 논란이 큰 것 처럼, 『광개토왕릉비』 역시 무조건적으로 사실만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2.8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이론적 반론이 확립될 즈음 한일 양국 사학계를 긴장시킨 것이 바로 주구묘와 장고형무덤(전방후원분)의 발굴이었다.
전방후원분은 본래 일본에서 발견되던 무덤 양식으로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발견되며, 주변에 하니와로 대표되는 많은 부장품들이 묻혀 있는 수백 미터 단위 크기의 거대 무덤이다 (고훈 시대 항목 참조). 모양은 앞부분이 네모 혹은 사다리꼴로 생겼고(前方), 뒷부분은 원형(後圓)인데 뒷부분에는 사람을 매장하고 앞부분에서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대 일본에서 군장제의 발전을 보여주는 무덤 양식으로 서서히 거대해지는 양상을 보이나, 6 ~ 7세기 일본이 중앙집권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소멸한다.
한편 주구묘는 전방후원분의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무덤 양식이다. 일본에서는 주구묘 중 방형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고 보지만, 논란의 여지는 아직 많다. 무덤이 장구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주변에 해자 형태의 홈만 있다.
그런데 1991년에 전방후원분이 전라남도 함평 영산강 지역, 그러니깐 백제의 남쪽 지역에서 발견되면서 한일사학계가 발칵 뒤집히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을에서는 전방후원분을 그저 산으로 알았지만, 오래 전부터 장고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전부터 뭔가 특이하게 생긴 산이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던 듯. 이들의 등장은 대체적으로 5 ~ 6세기 경으로, 그 연대가 일본보다 늦고 임나일본부설의 시기와 거의 일치해 큰 논란이 되었다. 이 기사에서 등장하는 장고묘(전방후원분)가 바로 이 무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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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나온 그 무덤들. 전형적인 '전방후원'의 양식이다.
저 전방후원분이 처음 한반도에서 나왔을 때,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의 강력한 근거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게다기 이전에는 분명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의 초기형 무덤인 주구묘가 일본에서만 독자적으로 발견되었으니, 주구묘 → 전방후원분 → 남한 지방에 전파(≒ 임나일본부설)라는 연결고리에 태클을 걸 논리가 없었고, 이때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관련 전공 사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캐묻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1996년 이후 마한 지방(전남 영광 군동리, 충남 보령 관창리)에서 일본보다 최소 한 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나와버렸다. 정확히는 지금까지 일본에만 있었던 주구묘가 한국의 발굴기법 발달로 주구묘가 청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놓쳤던 사실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국사 교과서를 달달 외웠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지도 모르겠지만 주구묘는 국정 국사 교과서 시절 마한 파트에 떡하니 사진까지 나와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한국 사학계가 식민사관의 극복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 환빠 보고 있나? 고대 삼한세력과 당시 왜와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한일역사학계가 인정하고 있으니, 결론은(...) 이 사건으로 당시 일본학계 전체는 상당한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NHK 방송사가 헬기까지 띄워 영상자료를 찍어가고, 일본학자가 직접 발굴현장에 찾아와 한국산 주구묘를 바라보며 '평생의 연구가 다 날아갔다'며 눈물까지 흘렸다. 더욱이 전라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의 대형 주구묘들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설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HD 역사스페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편)
이후 강원도 평창을 비롯해 한반도 중부에서도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주구묘가 발견되었다. 중국의 경우 주구묘 자체는 없고, 일본보다 훨씬 앞선 3세기 후반의 무덤인 타후팅 고분이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긴 게 좀 비슷한 수준이라 논란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상황에 힘입어 전라도 남부 지역에서 발굴된 독자적인 금관(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관. 단 이것이 백제 중앙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크다),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 문화 및 돌방무덤의 독자적 양식이 주목받으며 분명 백제와는 다른 (이주한 목지국으로 비정되기도 하는) 전남의 독자 세력 혹은 마한 잔존 세력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마한에서 주구묘 → 장구형 무덤의 발전으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목소리도 커진 바 있다.
다만 마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주구묘가 한반도에서는 어떻게 변천했는지 그 유적 발굴과 정리가 미미하고, 전남의 독자적 세력으로 지목되는 잔존 마한 세력의 실체도 불분명한 상태라 이에 대해 아직 자신있게 설을 제기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는 상태이다. 즉 마한 주구묘에서 일본 주구묘가 발생한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일본으로 넘어간 주구묘가 어떻게 발전해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는가나 오히려 전방후원분이 한국에 넘어올 수도 있지 않았냐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아직 명확히 해명할 만한 발굴 성과가 없다. 고고학적으로 전방후원분 자체는 분명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졌고 널리 유행한 데 반해, 한국은 일시적으로 잠깐 등장하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는 양상은 일본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은 5 ~ 6세기에 갑작스럽게 그것도 거의 반세기 가량만 잠깐 등장한 것으로 보는 게 고고학계의 견해다. 즉, 일본에는 주구묘에서 전방후원분으로 무덤 양식이 바뀌어가는 모든 과정이 뚜렷이 남아있으나,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한국 내에서 장고형 무덤에 관해서는 현재 고고학계도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연구 수준이 매우 낮으며, 도대체 왜 갑자기 영산강 유역에 이런 무덤들이 등장했는지, 그리고 묘주가 어느 세력인지에 대해서도 오리무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부터 연구 성과가 축적된 다른 무덤 양식과는 달리 말 그대로 급작스럽게 나타나게 된 화두이니... 한국에서의 주구묘 연구는 현재 매중장주체부 위치에 따른 용어 정립조차 난제인 상황. 현재 정해진 것은 주구묘 중에서도 매장주체부가 지상에 있거나 또는 떠 있으면 분구묘 지하에 있으면 봉토묘라고 부르자는 정도이다. 다시 말해 아직 정리가 덜 된 상황이고, 한국 학계와 일본 학계 모두 이 무덤에 대한 접근이 매우 조심스럽다. 역사 전쟁의 분위기가 심한 상황에서 자칫하면 자승자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으로 지목되는 시기 때문.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 상에서 4세기 후반에 설치된 기구이고 4세기 후반을 묘사한 호태왕비 해석 문제도 이와 얽혀 있는데, 장고형 무덤의 등장은 이보다 1세기 가량이 늦다. 게다가 6세기 초반에는 왜 사라졌는지도 의문이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은 커녕 관계가 좋았음을 암시하는 기록만 있으니 '백제의 일본 구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크다.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상황.
혹은 백제에서 끌어들인 왜의 토호나 군장 세력(대체로 한반도와 활발한 교역관계를 보인 서일본계의 세력)이 아니느냐는 지적도 있다. 475년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참패해 참수당한 뒤로 북쪽으로의 진출이 사실상 가로막히자, 동성왕과 무령왕 대의 백제는 완전히 병합되지 않았던 전남 지역의 잔존 마한과 제주도(498년 탐라 조공 기사가 나타난다)를 복속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이 때 일본 세력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두 왕은 즉위 이전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왕으로, 무령왕과 당시 케이타이 덴노의 관계 또한 매우 밀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에서 군사력을 지원받아 정복을 행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이것의 결과물이 일본색이 밴 장구형 무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임나일본부설과 같이 행정 기관으로서의 장악이 아님 또한 분명한 전제이다.
이렇듯 다양한 학설이 세워져 각자의 설득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지만, 뚜렷한 정답이라고 할 만한 설이 수립되지는 않았다. 다만 애시당초 왜인식 무덤이 발견되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로 비정하고 있던 가야 인근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전라도 지역, 특히 서해안 및 남해안의 해안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연결 짓기에는 이미 논조 자체가 다른 문제로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되어서, 이미 해당 문제는 임나일본부설과는 다른 별개의 문제로 다뤄지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넷우익이 판을 치는 일본 위키백과에서는 가야항목에서 한국의 민족사관 때문에 실증유물을 부정한다고 써놓는 황당한 논리를 해놓고 있다.관련항목
3 결론
종합하자면 대부분의 기록들은 왜의 과장과 허세에서 비롯되었으며, 임나일본부는 이름뿐일 뿐 실제는 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뭐, 1500년 뒤까지 일본이 이걸 명목으로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느끼고 식민사관까지 만들어냈으니 언론플레이만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어쨌건 역사적으로 통치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것은 현대 한국 사학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서도 점차적으로 인정해나가, 현재는 앞서 말했듯 양국 사학계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다만 일본은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한 적이 없으며 여전히 상당수 일본 교과서와 외국 교과서에도 버젓이 실려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결론을 맺기는 힘들다.
4 수정설의 대두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큐슈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대마도 설치설,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5]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임나일본부의 영역과 성립시기는 작아지고, 군사적 침략의 가능성은 옅어진다.[6]
일부에서는 백제의 치적을 일본이 가져다 썼다는 말도 있다.복사, 붙여넣기. 정확하게는 원래는 백제가 주도한 것인데 나중에 기록을 정리하면서 왜왕이 명령해서 왜가 주도한 것처럼 주어를 바꿨다는 설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관우가 제기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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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라국(흔히 말하는 아라가야)에 존재했던 안라왜신관을 가리켜 임나일본부라고 부른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서기》에 나온 기록에 의하면 부(府)를 "미코토모찌"라고 불렀는데 이는 관청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앞서 말한 한반도 내 일본 군사 세력의 잔영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찌되었건 기존의 일본 사학계가 주장하던 식민지설은 점차적으로 폐기되어가는 추세이다.
일본인들이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의 재앙을 피해 떼를 지어 한반도로 도망쳐온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인이 아니라 통치 기관이 자연 재해 때문에 머나먼 타지인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말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냥 '이런 설도 있다'는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맞을 듯. 다만 이 설을 차용한다면 6세기 초반에 갑자기 임나일본부의 기록이 사라진것도 '한반도에 피난온 일본인들이 재해가 끝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5 한국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
한국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 참고.
6 기타
2005년에도 서울 강동과 하남에 전방후원분이 발견됐다는 기사[7]가 떠서 웹상의 재야사학자들과 수많은 일빠, 환빠들을 설레게 했으나 강동의 것은 한달도 안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전방후원분이라 볼 근거가 없다"고 밝혔고, 하남의 것은 선사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와 전방후원분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애초에 전문적인 고고학 조사기관이 아닌 민간단체에서 제기한 의혹이었으니... 그러나 일빠와 환빠 모두에게 매력적인 소재인지라 2010년대까지도 블로그 등지의 '자칭' 역사 전문가들이 '식민사학자들이 백제 최고(最古)의 유적을 은폐한다.' 또는 '국뽕사학자들이 왜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근거를 은폐한다'는[8]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현혹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 "영어 역사서의 지도 27% 한국 표기 오류"
- ↑ 일본 "임나일본부 없다"…근현대사는 인식 차이↑
- ↑ (여적)임나일본부
- ↑ 칠지도(七支刀, Seven-pronged Sword),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 ↑ 이노우에 히데오가 주장하였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가 미비하다고 한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81-83
- ↑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역사비평사,2009,p84-85
- ↑ 링크는 2차 보도이며 KBS 9시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각 지역의 동산들이 전방후원분이라는 주장으로 해당 동산이 정말 전방후원분이라면 일본의 것보다 훨씬 크다는 주장인데, 진상이 다 밝혀진 2016년 현재는 원본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
- ↑ 심지어 두 의견이 주장하는 바가 완벽히 반대된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결국 극과 극은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