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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1월 19일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다. 호는 상산(常山)이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도쿄 게이오기주쿠대학 유학 시절 2.8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가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1944년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1]하였지만, 1954년 제3대, 1958년 제4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민의원. 민주국민당-민주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윤보선 등과 함께 구파의 일원이었다.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민주당이 집권할 당시, 같은 구파였던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처음 국무총리로 지명받았지만, 과반수를 넘기지 못해 인준받지 못했다.[2] 그 대신 국무총리가 된 주인공이 바로 신파의 지도자격인 장면. 이후 장면의 1차 내각이 신파 일색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여 다수의 구파 의원들과 함께 탈당, 신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 중단.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군소정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자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해 8월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해 김재광 등과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7년 7월 19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 서대문구) | 한국민주당 | 31,181 (56.67%) | 당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 서대문 갑) | 민주국민당 | 12,887 (41.33%) | 낙선 (2위) |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 서대문 갑) | 민주국민당 | 9,681 (38.97%) | 당선 | |
1958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 서대문 갑) | 민주당 | 26,638 (69.33%) | 당선 |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시 서대문 갑) | 민주당 | 36,707 (71.14%) | 당선 |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 | - | 당선 |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 | 신민당 | - | 당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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