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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항목은 김영삼 초산 테러, 김영삼 초산 테러 사건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파일:/20130223_256/csr100_1361611288053hiYKz_JPEG/%B1%E8%BF%B5%BB%EF_%C3%CA%BB%EA%C5%D7%B7%AF.jpg|400px]]
"1969년 6월 20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삼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길 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야당 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더라면 아찔한 일이었다. 얼굴에 공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 상처가 났을 것이 뻔했다." -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
1969년 6월 20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국회의원 김영삼을 암살하기 위해 승용차에 정체 불명의 청년들이 질산병을 투척한 사건이다.
참고로 당시 신문보도 등에서 질산의 일본식 표현인 "초산(硝酸)테러 사건"이라고 알려져서, 항간에는 초강산 또는 아세트산 테러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김영삼은 당시 박정희의 장기집권하기 위해 헌법을 바꾸려는 3선 개헌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가지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질산 테러 사건이 발발하게 된 연설을 국회에서 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요, 잡으라는 공산당은 안 잡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정보부가 개헌 음모에 가장 깊이 관련하고 있다.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충고한다.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 총리는 정보부장 파면을 건의할 생각 없는가?"
그런데 그 날 저녁 김영삼이 저녁식사 후 자신의 승용차로 상도동의 집으로 귀가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작업복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서로 싸우는 시늉을 하며 김영삼의 차량을 막아선 사이 다른 1명이 차문을 열려 하였으나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위협을 느낀 김영삼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게 하여 경적을 크게 울리며 전진하자 괴청년 중 한명이 무언가가 담긴 유리병을 던져 차량 후미의 유리창에 맞고 박살이 났다. 병 깨지는 소리가 워낙 커서 김영삼은 처음엔 수류탄을 던진 것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차에서 내려보니 심한 악취와 함께 차량 도색이 우글우글하게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범행 현장을 조사하여 보니 아스팔트 일부도 녹아내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의 감식 결과 질산으로 판명 되었는데, 당시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던 터라 박정권의 테러로 추측되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언론인 김충식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나중에 김영삼에게 '미안하게 되었다'며 우회적으로 사과했다고 언급했다. 참고 그러고 보니 황산이나 염산에 비해 일반인이 입수하기 어려운 질산으로 공격한 걸 보면, 높으신 분들이 뒤에서 손을 썼다는 냄새가 나기는 난다.
흔히 이런 테러를 당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인데 김영삼은 바로 그 다음날 국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 독재국가를 끌고가는 원부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은 민족반역자다. 이건 날 죽이려는 정부의 음모다"
그러나 이러한 김영삼과 야권의 노력에도 결국 3선 개헌은 통과되었고 이 사건 이후 야당에 대한 테러가 10월 유신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여담으로 2006년 지방선거 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에 얼굴을 베이는 테러를 당했는데, 김영삼이 병문안을 와서는 "나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산 테러 등의 여러 일을 겪었다."는 말을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