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신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은 소판이었다. 어머니인 지소부인은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문명왕후가 김유신의 여동생이므로 지소부인과 김유신은 외삼촌과 조카사이이다. 이쪽 족보가 좀 꼬여있다보니 고모가 외할머니인 셈이다.
2 활약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문무왕 12년(672), 석문 전투에 비장(裨蔣)으로 출전하였으나 신라군이 참패한 상황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으려 하였으나 부관 담릉이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귀환했다.
아버지인 김유신은 왕명과 가훈을 저버린 죄를 물어 목을 벨 것을 주청하였으나 문무왕은 원술에게만 중형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며 죄를 용서하였다.
원술은 부끄러운 나머지 시골에 은둔해 있다가 이듬해 김유신이 죽은 후 어머니를 만나 보고자 하였으나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했으니 나도 너의 어미가 아니다"라고 하여 결국 만나지 못했다.
결국 부모에게 버림받은 원술은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그 길로 태백산에 들어갔다.
문무왕 15년(675) 당군이 매소성으로 쳐들어 올 때 산에서 내려와 힘껏 싸워 신라를 승리로 이끄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가 용납하지 않아 세상을 비관하고 벼슬에도 오르지 않았다.
3 배경
이 일화까지만 보면 김유신 부부가 매우 비정해 보이지만 이들을 이해하려면 당시 신라 귀족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나제동맹이 파탄난 이래 백제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지속적으로 침략에 시달리며 위기를 맞았던 신라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여러차례 위기를 맞았고 이때 목숨을 내놓다시피한 과감한 공세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개중에는 말 그대로 죽기전에 발악이나 해보자는 식의 돌격이 없진 않았지만 반전을 노리고 시행된 계획된 군사작전도 많았다. 당장 김유신이 낭비성 전투에서 그렇게 싸워 전세를 뒤집은 사람이고 황산벌에서 단기필마로 돌격했다고 알려진 관창이나 반굴도 실제론 일련의 별동대를 이끌고 싸운거 아닌가 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황.
군사작전이건 동귀어진식 돌격이건 전사할 위험성은 굉장히 높았고 김유신의 친족 젊은이들 또한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전사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돌격하여 죽은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였고, 마찬가지로 죽은 관창 또한 김유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설명이 복잡하므로 관창 항목 참고)였다. 하지만 비령자를 비롯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사서에서 자주 확인되는 바, 황산벌 전투에서 희생한 두 젊은이의 사례는 당시 신라에서는 결코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1]. 화랑들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시되던 '노비'까지[2]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전사하고 칭송을 받은 사례가 기록되어 있어, 신라 사회가 오랜 전란속에 극도로 호전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정들의 목숨을 내놓은 분투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이겨내고 삼국간 쟁투에서 승리자가 된 신라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의 영웅 김유신의 아들이 패배하고도 살아돌아온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원술을 내치지 않는다면 김유신이 주변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진다. 또한 김유신 본인이 가야계라는 출생의 한계를 실력으로 극복하고 출세한 인물이었기에 골품제 하의 신라에선 그를 질투하고 흠잡으려는 자들도 많았을 것이니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이런 비정한 태도를 보였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볼 면목이 없다.
김유신 역시 역사에 일일이 기록되지는 않았더라도, 탈영하거나 함부로 퇴각하는 부하들을 처벌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술의 처지를 이해하고 넘어간다면석사 원술의 상황이 정말로 그럴만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라 특별히 봐줬다고 보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당시의 군인 대부분이 자원입대한 게 아니라 징집되서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군대의 기강과 사기를 위해서 군대 수뇌부인 김유신으로서는 자기 자식을 더욱 엄하게 처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현대적인 인도주의의 관점을 내세워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신라 관련 사료에서 나타나는 젊은이들의 '죽을 때까지 싸운다'라는 풍조는 윗사람들이 권위를 내세워 강요한게 아니다. 수시로 고구려나 백제와 전쟁을 해야했던 당시 신라의 상황에서 빚어진 문화에서 나타난 특수한 현상이며, 또 신라인들의 관점으로 기록한 사료에서 유독 낭만적으로 부각시킨 사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모한 자살돌격이 아니라 별동대 운용같은 군사작전에서 나온 희생을 포장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임전무퇴'를 태평양 전쟁 말엽에 출현한 일본의 가미카제에 비유하며 비난하는 시각도 있지만, 사실 신라의 화랑정신은 가미카제나 옥쇄 사상처럼 갑작스레 생겨난 현상이 아니며, 맹목적인 애국심을 명분으로 국가에서 청년들의 자살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사서에서 나오는 신라 젊은이들의 희생은 오히려 화랑이라는, 낭만주의적인 충성심으로 무장한 청소년 단체의 특성에서 나온 소산이지 근대 내셔널리즘으로 인한 국민들의 희생 강요와는 전혀 개념이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유신 스스로가 이러한 화랑들의 필두였고, 김유신 본인도 노년기에 신라 정계 최고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희생을 전혀 피하지 않았던 솔선수범형 지휘관이다. 비판을 한다면 이런 낭만주의의 어리석음을 비판해야겠으나,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유럽 중세의 기사도고 조선시대의 선비 정신이고 간에 모조리 싸잡아 비판해야 한다.
관점에 따라서 신라에서 지독한 수준의 골품제가 유지 되었던 명분은 바로 이런 자살 돌격을 할 정도의 광신적인 충성심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골품제의 근원과 기능은 화랑제도와는 무관하다. 골품제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고 그것이 상당히 독한 수준의 신분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국가로써의 미성숙과 정체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기현상에 더 가깝다. 또 어떤 의미에서 화랑이란 골품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또한 생각해봐야 할 문제.
타국에도 이런 사례는 적지 않다. 삼국지의 우금이 대표적인 케이스. 현대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괜히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항복하는 행위에 대해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재평가받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죽어 마땅할 죄였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그 상황에서 실망한 기색을 보였어도 죄는 묻지 않겠다는 조조의 발언이 오히려 대인배 취급을 받을 만했다는 것. 벽화로 그를 조롱해 화병으로 죽게 만든 조비가 까이는 것은, 용서해주는 척 하면서 빙빙 돌려서 그를 모욕한 것이 한 나라의 임금답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지, 차라리 우금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그 죄를 물어 죽었더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까지 했다.
단 '현대에서도 김원술 같은 상황이었다면 처형감'이란 식의 의견에는 문제가 있다. 현대에서도 지휘관이나 사병의 퇴각은 분명 사형급의 중죄이긴 하지만, 이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퇴각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김원술의 경우는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잔존병력이라도 데리고 퇴각해서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김원술 본인도 처음엔 자살돌격을 결심했으나 부장이 제지해서 그만둔 것이었고, 김유신의 원술의 목을 베라고 주청했을 때 문무왕이 그렇게 하지 않고 원술을 용서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참작의 여지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4 기타
때때로 현대의 서적에선 그를 언급할 때, 성인 김씨를 생략하고 이름만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덕분에 중국 삼국시대의 꿀물황제와 비교당하기도. 더더욱 안습.
4.1 창작물에서
극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서 창작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특히 비극적 서사를 만드는데 좋은 인물.
- 비극적인 스토리인 관계로 현대에 와선 원술랑이란 제목으로 연극화 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유치진. 원술랑참조.
- 드라마 삼국기 에서는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유신의 또다른 아들 군승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역사상의 기본 얼개를 따르긴 하지만, 김유신이 문무왕(김법민)이 왕위를 노리는 동생인 김인문과의 관계를 두고 갈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를 단호히 내치게끔 하기 위해 자신도 혈육인 아들을 내침으로써 모범이 되어야 했다는 식으로 보다 당위성을 부여하여 각색되었다.
- 어린이 드라마 화랑전사 마루에서 21세기에 부활하여 화랑들을 훈련시키는 인물로 나왔다